성장기 내내 홍콩 영화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고 생각한다. 왕자웨이(왕가위) 감독이나 장궈룽(장국영)의 영화를 거의 다 골라 보았다. 단순히 동양적인 매력을 넘어 서양적 세련미를 덧대는 그들이 나의 구미를 당기기에 충분했다. 멜로나 무협 영화에 온통 마음이 가있던 내게 코미디 배우가 들어올 여백은 사실 없었다.
그러다가 만났다. 저우싱츠(주성치). 뉴욕에서 아메리칸 발레시어터 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다. 한국인으로서 최초의 아메리칸 발레시어터 단원이란 수식어로 벅찰 정도의 기대와 절정을 맛보다가 십자인대 파열이란 부상을 입어 발레 인생에서 가장 치열하게 사투를 벌여야 했던 시절이었다. 혹독하고 끔찍했던 순간이었다.
그 시절 빼놓을 수 없는 취미 생활이 일주일에 한 번씩 32가의 한인 타운에서 우리 비디오를 빌려 보는 것이었다. 거의 3년 동안 단골로 드나든 탓에, 내 취향들을 잘 알고 있던 비디오 가게 주인이 난데없이 <소림축구>를 권했다. 속는 셈치고 보라며 서비스로 밀어 넣어준 덕에 만난 <소림축구>의 저우싱츠. 그때까지만도 저우싱츠 역시 연휴 때 텔레비전에 흘러 지나가는 흔한 코미디 배우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그날은 좀 달랐다. 중국의 무술 문화와 그의 절대 고독한 표정이 어우러진 블랙 코미디. 웃지도 않으면서 인간의 본질적인 나약함을 불현듯 비웃는 그만의 내공이 오락성, 폭력성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면서 영화는 대중 예술의 극치를 그려냈던 것이다.
무엇보다 허무맹랑 코미디의 유쾌함을 넘어서, 인생철학의 한 단면을 엿보게 해주어서 기뻤다. 여느 무술 고수 배우들과 달리, 자기는 도저히 흉내낼 수도 없는 전통 무술을 자기만의 스타일로 변형시켜 소화해내는 그에게서 또 하나의 인간 승리를 찾아볼 수 있었다. 마치 배우 자신이 일반 관객과 하나가 되어, 그 자신 역시 오를 수 없는 고수들을 동경하고, 그 마음을 담아 고수 흉내내기를 감수하며 일반인의 대리만족을 시켜주는 듯한 그에게서 느끼는 매력은 참으로 묘했다. 나는 그것이 다른 무술 고수 배우들에 대한 주성치의 콤플렉스라고도 보았는데, 그는 그것을 좀처럼 감추려 들지 않았던 셈이다.
이후 난 그의 작품들을 닥치는 대로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때 발견한 <희극지왕> <식신> 등은 나를 여지없이 ‘저우싱츠’의 늪으로 밀어넣었다.
브루스 리, 청룽, 그리고 리롄제로 이어지는 걸출한 무인들의 축에 절대 낄 수 없어도, 그는 적어도 무술과 연기가 무엇임을 정확히 간파하는 인물이라고 생각되어진다. 그만의 코미디적 해설로 대중에게 친근하게 와 닿는 이유이고, 결국 <007 북경특급> <홍콩 레옹> <도성> 등을 통해 패러디의 지존으로 거듭났던 배경이 아닐까. <쿵푸허슬>의 하이라이트에서 거세게 피어오르는 그만의 카리스마를 난 소름 끼치게 느꼈다.
나는 내가 ‘순수 예술을 하는 이’라고 선 긋고 싶지 않다. 콤플렉스를 인정하고, 그것을 자기만의 매력으로 바꾸면서 자신있게 패러디를 추구한 주성치를 통해 다시금 확인한 교훈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장르를 뛰어넘어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그 ‘무엇’에 대한 갈망도 키워줬다. 그래서 주저없이 내 연인으로 꼽는다. 저우싱츠. 참 힘든 시절, 너무도 소중하게 만난 배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