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서른을 3주 앞둔 77년생이다. 독이 한창 오른 음력 8월 뱀띠라 손녀딸 ‘시집 못갈까’ 우려한 할머니 덕에 호적상으로는 78년생이다. 77년생이나 78년생이나, 뱀이나 말이나 드세기야 오십보 오십일보지만, “내일 모레 서른인 애가 왜 그러니”라는 핀잔에 “대한민국은 법치 국가거든, 민증 까, 나 스물 여덟이야”할 때만큼은 78로 시작하는 주민등록번호가 철딱서니 없이 흐뭇하곤 했다. 하지만 최근 부쩍 줄어든 주량과 퍼질러지는 몸매를 보며 생물학적으로 코 앞에 닥친 ‘서른’을 불안해 하는 것은 사실이다.
스물 아홉이 서른된다고 인생이 순식간에 나빠지거나 혹은 좋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서른이 되면, 그래서 삼십대가 되면 왠지 인생의 ‘선택지’가 줄어들 것 같은,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내가 입을 수 있는 옷도, 그리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남자도 줄어들 것 같은 막연한 불안감이 나도 모르게 슬쩍 똬리를 트는 건 어쩔 수 없다. 30살에 접어들었다고 해서 어느 누구도 그를 보고 젊다고 부르는 것을 그치지 않겠지만 본인은 스스로를 젊다고 내세우는 게 어색하게 느껴진다고 <삼십세>의 작가 잉게보르크 바하만도 말하지 않았던가.
그래서일까. 최근 개봉한 영화 <도쿄 타워>와 <프라임 러브>를 보는 심정이 편치 않았다. <도쿄 타워>에서는 40대 유부녀 역을 맡은 구로키 히토미가 고교생으로 분한 꽃미남 오카다 준이치와 열렬한 사랑에 빠진다. <프라임 러브>에서 37살로 나오는 우마 서먼도 극중 23살 브라이언 그린버그와 부럽지 않을 수 없는 사랑을 한다. 그런데 참 희안한 일이다. 두 영화의 서로 다른 결말을 보면서, 나는 히스테리를 부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연상연하 커플이 맺어져도 “쳇!”, 안 맺어져도 “젠장!”하며 딴지를 걸고 있었다.
먼저 <도쿄 타워>는 두 연인이 맺어지는 걸 보니 장이 꼬였다. “능력있는 남편 덕에 럭셔리숍 운영하고, 맨날 드레스 뻗쳐 입고 꽃단장 하고, 우아하게 라흐마니노프 듣고 그레이엄 그린이나 읽으면 된다 이거지? 예쁘니까 좋아, 능력있는 남편 만나 내내 호강하다가, 어린 꽃미남 꼬셔서 그 나이에 진정한 사랑도 하고!” 이렇게 완전히 빈정이 상해서 심퉁이 하늘을 찔렀는데, <프라임 러브>는 또 두 사람이 맺어지지 않는 게 불만이었다. “뭐야, 저거! 천하의 ‘우마 서먼’도 안 된단 말이야? 나 스무 살 때도 가져본 적 없는 환상적인 몸매, 남부럽지 않은 커리어, 화가지망생 남자친구한테 전시회 기회를 마련해줄 정도로 인맥 넓은 우마 서먼도 어린 연인 앞에서는 꼬리를 내릴 수 밖에 없다는 거니? 마음 주고, 몸 주고, 직업까지 찾아주고도 어린 남자친구의 미래를 위해 한발 물러서야 하는 게 ‘여자 나이’니?!”
굳이 분류하자면 <도쿄 타워>는 완벽한 판타지고 <프라임 러브>는 판타지적(으로 멋진) 주인공을 동반한 현실의 이야기다. 서른살이 된다는 건 완벽한 사랑의 판타지를 더 이상 믿지 않을 만큼 성숙했지만 그렇다고 냉혹한 연애시장의 현실을 받아들이기는 힘든 제2의 ‘질풍노도의 시기’일까. 앞으로 내가 헤쳐나가야 할(!) 이 시기에 수많은 로맨스 상업영화들이 내게는 고통스러운 감상을 요구하는 예술영화로 둔갑할 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