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14일, 피터 잭슨 감독의 신작 <킹콩>이 한국의 극장가를 찾는다. 잭슨이 어린 시절 오리지널 작품을 본 뒤 영화감독이 되기로 결심했다는 일화답게 <킹콩>은 1933년 세상에 나온 이후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켜왔고, 그들 가운데 영화라는 길을 걷게 된 사람들 역시 셀 수 없을 정도다. 아울러 70여년에 이르는 킹콩의 기나긴 역사는 다양한 속편과 관련작, 아류작들로 가득 채워져 있으며 그 자체가 시각효과와 장르영화의 발전사와도 일맥상통한다. 2005년 새롭게 탄생한 <킹콩>을 보러 가기 전에 이 거대한 고릴라가 만들어온 연대기를 한번 되짚어보는 것도 한층 흥미로운 관람을 위한 좋은 준비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혹시 아는가, 오늘 옆자리에서 같이 영화를 본 그 사람이 훗날 유명한 감독이 되어 있을지?
거대 괴수영화의 시작을 알린 ‘천상의 피조물’
<킹콩> King Kong(1933)
<킹콩>은 탐험가 기질을 타고난 제작자 겸 감독 메리언 C. 쿠퍼가 창조한 작품이다. 일찍이 거친 탐험과 야생동물(특히 고릴라)에 깊은 흥미를 가졌던 그는 대공황의 절정에 직면해 있던 1930년대 초의 대중을 현실세계로부터 잠시나마 도피시켜줄 오락영화의 결정판을 만들고자 했다. 동료인 어니스트 B. 쇼드색과 함께 세계 각국 오지의 생생한 장면을 담은 다큐멘터리로 유명해진 쿠퍼는 <킹콩>에서 자신을 매료시켰던 모든 요소를 펼쳐 보인다. 해골섬으로 대표되는 미지의 땅으로의 모험담, 야수 콩이 상징하는 자연과 칼 데넘이 상징하는 문명과의 대립각, 콩과 금발의 미녀 앤 대로우가 연출하는 고전적인 미녀와 야수 플롯. 이 모든 것을 영상에 담아낸 작품은 당시로서는 거의 전례가 없었다. 또한 시각효과의 역사에 있어 <킹콩>은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영화다. <킹콩>이야말로 시각효과가 스토리를 이끌어간 거의 최초의 영화이자 동시에 그것이 가장 완전한 형태로 구현된 영화이기 때문이다.
<킹콩>의 주인공은 앤 대로우도 킹콩 자신도 아닌, 털가죽과 점토로 뒤덮인 철골 인형을 영상 위에서 날뛰는 거대 고릴라로 재탄생시킨 시각효과인 것이다. 이는 1925년 아서 코넌 도일의 소설을 각색한 <잃어버린 세계>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윌리스 오브라이언의 솜씨. 그가 스톱모션 애니메이션과 배면 투사, 매트 페인팅 등 당시에 가능했던 모든 기술효과를 총동원해 만들어낸 <킹콩>의 환상적 영상은 투박한 흑백 화면을 벗어나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박력으로 가득하다. 특히 킹콩과 티라노사우루스 렉스가 벌이는 격투 장면, 긴장감과 공포가 생생한 외나무다리 시퀀스, 성이 나 원주민 마을을 잔혹하게 파괴하는 콩의 묘사 그리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꼭대기의 장렬한 라스트 등은 그 하나하나가 고전이 되어 수많은 영화와 애니메이션 등에서 인용 및 재생산되었다. 또한 <킹콩>은 거대 괴수영화의 시조로서도 가치가 높다. 공룡을 포함한,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압도적인 힘을 가진 거대 괴수가 등장하는 영화는 물론 그 이전에도 존재했다. 그러나 킹콩은 그들과 차별화된 독자적 캐릭터를 가졌으며 괴수 캐릭터가 영화를 대표하는 역할을 처음으로 완수함으로써 이후 레이 해리하우젠의 창조물들이나 일본의 고지라와 가메라 등으로 대표되는 거대 괴수 장르의 맹아가 된다. 2년여의 제작기간을 거쳐 1933년 3월2일 공개된 <킹콩>은 흥행에서 대성공을 거뒀으며 작품에 관련된 모든 사람을 유명인사로 만들었다. 1991년에는 미국 국회도서관의 영구 보존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1998년에는 미국 영화연구소가 뽑은 역대 최고의 미국영화 100편에 선정되는 등 <킹콩>은 70여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한 시절을 풍미한 영화로부터, 시각효과의 진수를 만끽할 수 있는 고전이자, 거대 괴수영화의 출발점을 거쳐 당당한 문화적 아이콘의 반열에까지 오른 것이다.
아버지 킹콩은 아들 키코를 낳고
<콩의 아들> Son of Kong(1933)
<킹콩>의 대성공 직후 RKO는 쿠퍼에게 “연말 시즌을 목표로 가능한 한 빨리 속편을 만들라”고 요청했다. 쿠퍼 역시 킹콩의 유명세가 식으면서 아류작이 난립하기 전에 승부를 걸어야 한다고 판단하여 속편 <콩의 아들>은 8개월 만에 신속히 만들어졌다. 칼 데넘 일행이 보물을 찾기 위해 해골섬에 돌아가 킹콩의 아들 키코와 만나게 된다는 내용을 다룬 이 속편은 흥행에도 성공했고 윌리스 오브라이언의 스톱모션 시각효과도 여전히 훌륭했다. 그러나 작품의 전체적 완성도는 전편과 비교할 수 없이 떨어진 것으로 평가받았다. 그 이유로는 위화감이 들 정도로 강조된 코미디와 연결이 엉성하고 부자연스러운 스토리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무자비한 야성의 상징이었던 킹콩과 달리 키코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온순하고 충성스러운 고릴라인데, 애교있고 귀엽기는 하지만 전편에서 압도적인 박력을 내뿜었던 아버지만은 못했다. 킹콩을 이용하다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 장본인인 데넘이 또다시 자신의 이윤을 위해 섬으로 돌아온다는 설정과 결말에서 키코가 그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내용도 그리 유쾌한 것만은 아니었다. 이같은 퀄리티 저하는 속편을 당연시하여 전편 이상으로 물량 공세를 퍼붓는 현재와는 달리 절반으로 깎인 예산과 촉박한 제작 스케줄상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이러한 작품의 내외적 한계 때문에 <콩의 아들>은 킹콩의 정사(正史)에 틀림없이 속함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빛을 보지 못했던 비운의 작품이 되고 말았다. 또한 이같은 시행착오는 반세기 뒤 디 로렌티스판 리메이크의 속편인 <킹콩2>에서도 그대로 반복되고 만다.
오 놀라워라, 스톱모션의 발전
<마이티 조 영> Mighty Joe Young(1949)
<마이티 조 영> Mighty Joe Young(1998)
<마이티 조 영>은 <킹콩> 시리즈가 아니지만 메리언 C. 쿠퍼(제작), 어니스트 B. 쇼드색(감독), 윌리스 오브라이언(시각효과) 등 <킹콩>을 만들었던 여러 재능들이 다시 한번 머리를 맞댄 결과물이다. 아울러 야성과 문명이 충돌한다는 주제 역시 <킹콩>의 변주에 해당하기 때문에 항상 함께 언급되곤 하는 작품이다. 주인공은 아프리카에서 ‘조셉 영’이라는 이름의 고릴라와 함께 자란 소녀 질(테리 무어). 이 영화에서 그들은 칼 데넘처럼 탐욕스러운 흥행사 맥스 오하라(다름 아닌 데넘 역의 로버트 암스트롱이 연기했다)에게 발탁되어 할리우드의 호화 나이트클럽에서 서커스를 공연하지만 결국 탈출하여 다시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내용이다. <킹콩>과 다른 점은 마음이 따뜻해지는 해피엔딩. 이 영화는 <킹콩> 이상으로 드라마와 액션의 조화가 뛰어나며 무엇보다도 훨씬 발전된 시각효과를 만끽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실사 캐릭터와 스톱모션 캐릭터가 동작을 주고받는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는 점. 아프리카에서 카우보이들이 벌이는 조의 포획작전, 조가 10명의 장사와 줄다리기를 벌이는 장면 등에서 이러한 효과가 두드러진다. 그리고 사람이 직접 모델의 자세를 바꿔야 하는 스톱모션의 특성상 프레임마다 털의 모양이 달라졌던 <킹콩>과 달리 <마이티 조 영>의 조는 표면에 고무를 입히는 등의 개선이 이루어졌고, 털의 재질감도 훨씬 리얼하게 재현할 수 있었다. 오브라이언의 거듭된 실험 결과로 한층 동작 묘사가 부드러워진 스톱모션도 영상의 퀄리티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특히 이 영화는 윌리스 오브라이언의 조수로 참여하여 약 80%에 이르는 애니메이션 작업을 소화해낸 레이 해리하우젠의 재능을 엿볼 수 있는 기회라는 점에서도 스톱모션의 역사에 있어 의미가 깊다.
1998년 제작된 리메이크는 배경이 현대로 옮겨진 것과 함께 질이 동물보호론자로 설정이 바뀌었으며 그가 조와 함께 밀렵꾼들의 위협에 맞서는 내용을 그렸다. <불가사리>로 시각효과 영화를 체험했던 론 언더우드 감독이 안정된 연출력을 선보였으며, 1976년판 <킹콩>과 <그레이스톡 타잔> <정글 속의 고릴라> 등을 통해 일급 특수분장 전문가로 인정받은 릭 베이커가 수트메이션(배우가 괴수 옷을 입고 연기하는 기법)과 모델을 담당했다. 여기에 적절히 사용된 CG가 조화된 영상은 유인원 시각효과의 한 정점을 기록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테리 무어와 해리하우젠이 남녀주인공을 보며 “처음 만났을 때의 당신 모습이라오”라고 말하는 카메오 장면도 인상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