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2월의 어느 아침, 베를린의 하이엇 호텔 앞에서 빌 머레이를 봤다.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커피를 든 채 빙그레 웃음을 짓고 내 앞을 지나갔다. 하지만 언론에 따르면 그는 베를린영화제에 오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다. 내 착시일까. 그러나 185cm의 키에 크고 주름 많은 얼굴과 벗겨진 이마와 센 머리를 착각하기가 그리 쉬울까. 일단, 진위를 떠나 황홀했다. 그러나 말을 걸어 그를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에이전트나 홍보담당자 없이 지내는 그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고 싶었고,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기를 바랐다. 지금 돌이켜보니, 웨스 앤더슨이 베를린영화제에 출품한 <스티브 지쏘우의 해저생활>은 베를린 최고의 작품이었다.
함께 <브로큰 플라워>를 본 동료는 잭 니콜슨의 <어바웃 슈미트>가 떠오른다고 했다. 나도 동의했다. 늙은 아버지 역할로 주연을 맡을 수 있다는 건 매우 희귀한 경우다. 지금 그런 주연을 맡을 수 있는 이가 잭 니콜슨과 빌 머레이 말고 누가 있을까. 충무로에서 중년의 주연 남자배우로 백윤식 말고 떠올릴 수 있는 이가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브로큰 플라워>는 그런 의미에서 19년 전 아들을 찾는 아버지의 영화가 아니라, 아버지를 찾는 딸과 아들의 영화다. 생각해보라. 당신의 초인종을 누르는 19년 만의 아버지가 로버트 드 니로나 알 파치노나 제레미 아이언스나 빌 머레이라면 누구를 택하겠는가. 무심하고 매사 시큰둥하지만, 녹색과 검정색 추리닝 두벌로 한철을 나는 이웃집 아저씨지만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챙겨주고, ‘뺏기기 전에 먹어두라’고 충고를 하는 빌 머레이를 고르지 않을까. <스티브 지쏘우의 해저생활>에서 30년 만에 만난 아들에게 대마초를 권하고(그러나 아들인 오언 윌슨은 그런 건 피우지 않는다고 오히려 거절한다), 술에 취해 잠든 스칼렛 요한슨(<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의 구두를 벗겨주는 빌 머레이를 택하지 않을까.
그러니, 삶이란 참 신기한 것이다. 젊은 날 ‘센’ 기를 발산하던 로버트 드 니로나 알 파치노가 늙어서는 별다른 매력을 발산하지 못하지만(<더 팬>의 광기어린 로버트 드 니로나 <베니스의 상인>의 잔소리 많은 샤일록을 아빠로 택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젊은 날 오스카 후보에도 한번 오르지 못하던 빌 머레이가 지금은 50대 중반에 들어서 섬세한 관객의 전원일치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이다. 소피아 코폴라나 웨스 앤더슨 같은 30대 유능한 감독들이 캐스팅 의사를 묻는 데만 8개월 이상이 걸리는데(매니저가 없어서 뉴욕에 있는 그의 집 전화로 메시지를 남기고 하염없이 기다려야 한다) 굳이 빌 머레이를 찾는 건 무슨 이유일까.
빌 머레이는 스티브 지쏘우가 <백경>의 에이햅 선장 같은 영웅이 아니냐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한 적이 있다. “에이햅 선장은 영웅이다. 영웅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지쏘우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하는 사람이다.” 젊은 관객이 뒤늦게 빌 머레이에 대해 열광을 보내는 것은 그런 이유 아닐까 싶다. 빌 머레이는 지켜야 할 것을 지키는 영웅은 아니다. 자기 살고 싶은 대로 살았던 자유인이다. 우리는 그에게서 꼰대가 아닌 자유를 찾아 헤매는 동시대의 선배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꼰대처럼 잔소리를 하지도 않고, 과잉된 자의식으로 우리를 짓누르지도 않는다. 그의 유머를 생각해 보라. 얼마나 미니멀리즘적인가. 스티브 지쏘우는 영화에서 한번도 웃지 않지만 우리를 내내 웃긴다. 아내인 안젤리카 휴스턴이 오언 윌슨의 죽음에 눈물 흘리는 걸 보면서 ‘기중기에 팔 끼었을 때 말고 우는 걸 처음 본다’고 투정을 부리는데, 그 한마디에 아내에 대한 깊은 사랑이 알알이 박혀 있다. 오쟁이진 남편으로 나온 <로얄 테넌바움>에서 자신의 환자인 더들리에게 보낸 웅숭 깊은 우정도 기억할 만하지 않은가. 가장 적은 표정과 가장 적은 대사로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 배우를 뽑으라면 응당 그가 뽑혀야 할 것이다. 겨우 눈 한번 깜빡이는데도, 묘비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는 장면(<브로큰 플라워>) 하나로 마음을 사로잡는다.
물론 그가 처음부터 이런 지적인 배우는 아니었다. 골프장을 폭파해 골프대회 결과를 뒤바꾸는 멍청한 캐디로 나왔던 데뷔 시절 무렵의 <캐디 섁>(1980)은 여느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 출신 코미디언과 다를 게 없다. <고스트 버스터즈>의 1980년대와 <사랑의 블랙홀>의 1990년대를 거쳐 그는 무심하지만 친구 삼고 싶은 아버지로 살아남았다. 나이가 들어서 더욱 로맨틱해지고 매력적이 된다는 건 희귀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