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영화]
그 절묘한 득도의 순간, <피라미드의 공포>
2001-08-08

사람이 어느 한순간 도를 얻는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수영중에 갑자기 ‘리듬을 탄다’가 무엇인지 알게 될 때, 늘 말로만 듣던 수학공식을 몸으로 체험하며 풀어낼 때. 그 짧은 득도의 순간은 번뜩이고는 아쉽게도 사라진다. 아마도 그 득도가 남과 공유하기엔 너무나 사적이거나 어쩌면 찰나적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본래 코넌 도일의 셜록 홈즈 이야기를 무척 좋아했다. 추리소설을 좋아해서 애거사 크리스티나 엘러리 퀸도 읽기는 했지만 역시 나한테는 셜록 홈즈가 최고였다. 수십번 골백번 읽으면서 ‘정말 추리소설이라고 하기에 너무 허술하구만’ 했지만 그래도 역시 홈즈와 왓슨이 더 좋았다. 마치 에서 이야기가 아무리 허술해도 멀더와 스컬리가 툭탁거리는 것이 더 재미있듯이, 나한테 재미있던 것은 이야기보다는 홈즈와 왓슨의 찌리리한 교감이었다. 홈즈가 의뢰인한테 담배 피워도 되겠느냐며 하는 말, “고마워 왓슨, 성냥도 줘!” 늘 이런 식이다. 얘들은.

그랬기에 내가 <피라미드의 공포>(Young Sherlock Holmes)라는 영화를 본 건 거의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었을 것이다. 아직도 그 가격이 기억난다. 조조 2천원 혹은 2500원이었다(사실 성당 선생님이 보여줘서 정확하게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영어 제목 ‘소년 셜록 홈즈’. 말 그대로 ‘셜록 홈즈가 소년이었을 때 왓슨을 만났다면?’이라는 가정 아래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참으로 말도 안 되는, 어불성설이다. 첫 셜록 홈즈 이야기 <주홍빛 연구>를 달달 외우는 나로서는 왓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폭탄 맞고 돌아와 저금이 떨어지자 방 친구를 구하다가 어쩌다 코 꿰였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웬 딴소리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거의 턱이 바닥에 떨어진 채 무아지경에 빠져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그렇다. 대한극장 화면은 참 크다. 요즘은 화면이 너무 작아 몰입하기도 쉽지 않다.) 소년 셜록 홈즈 역을 맡은 배우가 참 다리 길구나, 하면서 보던 와중 한순간 퍼뜩 찬물을 끼얹듯이 정신이 들었다. 이야기 중후반, 유일한 생존자 크렉와치가 과거 이야기를 하는 부분이었다. 그 순간 나는 왜 말도 안 되는 설정하에 있는 이 이야기에 그렇게 빨려들어갔는지 깨달아버린 것이었다.

이야기 구조가 똑같았던 것이다. 코넌 도일이 늘 쓰는 스타일이었다. 약간씩 다른 듯하지만 늘 고수하는 왓슨과 홈즈의 밀고 당기기. 불가해해 보이는 사건의 매듭을 꼬았다가 놓는 스타일. 그리고 중간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과거 서술장면 등등. 늘 내가 보며 흥분했던 그 모습이 그대로 살아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이 나에겐 정말로 득도의 순간이었다. 바로 이거구나. 각색을 한다면 바로 이런 것을 살려야 하는구나. 설정을 같게 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 ‘진행하는 스타일’을 그대로 살려내는 것이구나! 크리스 콜럼버스가 일곱달 걸려 썼다는 <피라미드의 공포>는 정말로 대본의 승리였다. 그리고 나에게는 각색은 이렇게 해라, 하는 교과서와도 다름이 없었다. 그 영화를 보고서 대본이 영화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달았고, 시나리오 작가가 되고 싶은 열망에 들떴다. 그때부터 영화 관련 책을 뒤지기 시작했고, 특히 시나리오에 관한 책은 무조건 보기 시작했다. 그것이 내가 영화에 빠져들게 된 계기였다. 이것이 내가 영화라는 매체를 사랑하게 된 첫발자국이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극장에서 단 한번밖에 안 보았지만(나중에 다시 보려고 돈 모아 갔더니 간판 내렸다)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세세하게 머리에 남아 있었다. 어느 부분에서 인물소개를 하고, 어느 부분에서 이야기가 전환이 되고, 어느 부분에서 홈즈와 왓슨이 갈등을 하다가도 서로 의견일치를 보는가 등등. 그리고 시나리오가 영화에 어떻게 생기를 불어넣는가를 느낀 그 순간. 그 득도의 순간을 머리가 아니라 온몸으로 느꼈던 그 순간은, 지금 눈을 감아도 떠올릴 수 있다. 한니발 렉터 박사가 세상만사 귀찮아지면 피렌체를 떠올리듯이, 이야기나 그림이 잘 나가지 않아 답답해질 때마다 심호흡을 하고 눈을 감는다. 그러면 지금은 없는 그 대한극장의 큰 화면과 어둠 속에서 홈즈가 왓슨을 무시하고 성큼성큼 걷는 장면을 떠올릴 수 있다.

아참. 이 영화가 최초의 비주얼 액터, 백터(Vactor)가 등장한 영화였다. 픽사(Pixa)의 역작 ‘스테인드 글라스 기사’가 정말 압권이다. 이 스테인드 글라스 기사는 1분 정도 등장하지만 그 파장은 거의 T-1000이나 쥬라기공원의 랩터에 못지않았다. 기사가 움직일 때마다 으르렁 공룡소리가 나는 것은 좀 깼지만, 유리의 뒷면이 나오는 장면은 정말 쇼킹했다!

후속 에피소드. 이 홈즈 역을 맡은 배우를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에서 지나가는 역으로 봤다. 거기선 너무 멍청하게 나와 그만 눈물을 흘려버렸다. 다리는 여전히 길군….

글: 남명희/ 일러스트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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