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국이 없어졌네.” 12월10일 오후, 서울 신림동의 한 주택가. <손님은 왕이다>의 막바지 촬영이 이뤄지고 있다. 꼬마들만 웅성이는 건 아니다. 한파에도 불구하고 나들이에 나섰다 돌아온 노인들도 고개를 갸우뚱하긴 매한가지다. 땅으로 꺼졌나, 하늘로 솟았나. 하루 아침에 은하약국 대신 명이발관이라는 새 간판이 달렸으니 이상할 법도 하다. 게다가 스탭들이 삼삼오오 모여 여기저기 얼어붙은 얼음을 녹인다고 화염 튀는 토치까지 들고 나서자 살벌한 분위기까지 감돈다. 주민들의 궁금증은 그러나, 오래지 않아 스르르 풀렸다. ‘딸랑∼.’ 오기현 감독의 슛 지시와 함께 성지루가 명이발관에서 튀어나오자, 열린 문틈 사이로 흰 가운을 입은 약사가 보인다. 제작진은 적지 않은 대여비와 리모델링 값을 치르겠다고 했지만, 약사는 기어코 촬영이 진행되는 동안 영업을 해야 한다고 우겼다 한다. 이유야 어찌됐든 “손님은 왕이다”라는 투철한 직업정신을 가진 약사는 극중 안창진(성지루)과 닮았다. 안창진은 이발사는 “깍새가 아니라 예술가”라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그러고보니 극중 인물들도 모두 겉은 이발소요, 속은 약국인 저 건물을 닮았다. 추악한 과거를 폭로하겠다며 거금을 내놓으라고 안창진을 협박하는 김양길(명계남), 남편 안창진에게 애교를 부리면서도 딴맘을 품고 있는 전연옥(성현아), 프로해결사를 자처하지만 정작 사건을 더 꼬이게 만드는 이장길(이선균)까지. 미스터리 스릴러의 외양을 빌려온 <손님은 왕이다>는 “어느 누구를 주인공이라 부를 수 없다”는 오기현 감독의 말을 참고해 호명하자면, 집단 가면극이라고 부를 법하다. 내년 2월 개봉 때까지 제작진이 품고 있을 마지막 반전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렇다. 이날 촬영은 안창진이 명이발소를 어슬렁거리며 동태를 살피던 김양길을 눈치채고 뒤쫓아 나서는 장면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서울예대 광고창작과를 졸업한 뒤, 캘리포니아 주립대에서 영화를 전공한 오기현 감독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한 수많은 인생 조연들과 엑스트라들에 애정을 담은 영화”라고 데뷔작을 설명한다. “세트에서 한달 넘게 머무는 동안 촬영이 없을 때는 심심해서 죽는 줄 알았다”는 성지루는 간만에 바깥 바람을 쐬서 그런지 전보다 한결 나은 표정이다. “54년 만에 첫 주연을 맡았다”는 명계남은 몰려든 아이들의 사인 요청에 선뜻 응하면서도, 주연의 ‘괴로움’을 만끽할 촬영이 얼마남지 않은(12월13일 모든 촬영이 끝났다) 아쉬움 탓인지 얼굴 주름 켠켠에 그늘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