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을 불태울 신작을 기다린다
허문영 : 2006년을 내다보자면 전망은 잘 못하겠고, 궁금한 영화가 매우 많다. 임권택의 100번째 영화, 홍상수, 김기덕, 이창동의 신작을 기다리는 한해가 될 것 같다. 또한 봉준호가 한국 대중영화의 신경지를 개척할 지 매우 궁금하다. 이하의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이 스타 단편감독의 장편 데뷔 징크스를 깰 수 있을지도 궁금하다. 올해 부산영화제에서 프로젝트를 선보인 박은영의 데뷔작, 장편 데뷔를 오래 준비해온 정성일, 김소영의 작품을 볼 수 있는 한해가 되기를 기대한다.
김소영 : 첫째, <연애의 목적>에서 본 노골적 언어로 점철하는 성 유희 코메디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튀게 될 지 궁금하다. 둘째, 작가로서는 <활>로 제자리 뛰기를 한 김기덕 감독의 신작이 궁금하고 임권택 감독의 <천년학>이 <서편제>를 어떻게 다시 쓸 것인지 기대가 크다. 내년엔 <태풍태양>의 정재은 감독이 돌풍을 일으킬 무엇인가를 준비할 수 있기를 빈다. 셋째, 장르의 측면으로 볼 때 <분홍신>,<첼로> 등 공포 영화가 다수 만들어지나 공포의 핵심을 건드리지 못하고 있다. <괴물>이 그 역할을 해낼까? 올해는 <거칠마루>,<주먹이 운다> 등 액션 영화들이 비교적 호의적인 평을 끌어냈다. 70년대 액션 영화의 맥을 잇는 액션 영화들을 보고 싶다. 넷째, <태풍>,<청연>,<야수>의 흥행 결과에 따라 블록버스터들의 행방이 달라질 것이다. 흥행 결과야 어떻게 되건 <태풍>은 믿을 수 없이 경직된 서사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아시아 다국적 스탭들을 매끈하게 꾸렸고 기술력은 훌륭하다. 이것이 앞으로 보다 사려깊은 범 아시아 대작 영화를 만들어내는 인프라를 제공할 수 있었으면 한다.
정성일 : 나는 아직 신기가 오르지 않아 내년을 내다볼 만큼 작두 탈 솜씨가 되지는 못한다. 다만 내년에 꼭 보고 싶은 영화들이 있다. 임권택의 일백 번째 영화 <천년학>은 항상 궁금하다. 홍상수의 일곱 번째 영화, 김기덕의 열 세 번 째 영화(어쩌면 열네 번째까지!)는 그들이 얼마나 더 나아갈 수 있을 지 궁금하다. 물론 봉준호의 <괴물>은 모두가 기다린다. 나도 그들 중 하나이다. 내년 영화의 경향? 아마도 영웅전 시리즈가 되지 않을까. 구국의 영웅을 향한 맹목적인 지지와 어떤 의문도 잠재울 무조건적인 찬양, 여기에 더해 그 분을 위해 희생도 불사해야 한다는 맹렬한 충성심. 이보다 더 고마운 관객들이 어디 있겠는가. 만일 그런 영화를 발 빠른 누군가 만들어낸다면 관객운동과 더불어 한 번 더 보기 촛불시위가 단군 이래 최초 이벤트로 시도되지 않을까? 그러나 여름을 휘저을 것은 월드컵이다. 여름 내내 사람들은 영화관에 있는 대신 거리로 뛰쳐나올 것이다. 그러고 나면 겨울에는 대선 후보경쟁 레이스에 돌입할 것이다. 내년에는 구경거리가 많다. 그러한 구경거리들보다 한국 대중영화는 더 재미있을 자신이 있는가? 벌써 크리스마스이다.
2005년 한국영화 총평
괜찮은 만찬이나, 새로운 요리는 없었다
김소영 : 전반적으로 괜찮은 만찬이나 감각을 사로잡는 이채로운 요리는 없는 한정식 집에 다녀온 기분이다. 김기덕의 <활>과 홍상수의 <극장전> 등 역작을 만들어온 감독들의 영화가 돌아왔으나 제한된 상영에 그쳤다. 반면 저예산 장편 극영화 <다섯은 너무 많아> <용서받지 못한 자> 등을 지난해 <마이 제너레이션> 등에 이어 극장에서 만났다. 희망의 기운이 여전히 보이는 영화 문화다. <주먹이 운다> <달콤한 인생> <혈의 누>와 같은 장르영화들도 선방했다. <말아톤> <너는 내 운명>처럼 모진 시련 속의 착함을 견지하는 영화가 승격된 휴머니즘으로 많은 관객들과 만났다. 제작비가 100억원을 넘어서는 <태풍> <청연> <야수>에 대한 소문이 돌출되는 사이, <나의 결혼 원정기> <오로라 공주> 등 중저 예산에 사회문제를 의식하면서 대중친화력을 가지려는 영화가 극장에 비교적 오래 머물게 된 것은 반가운 일이다. 반면 <무영검>과 같은 무협액션 영화가 장르적·윤리적 반칙을 하는 것은 우려스럽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기용(매영옥)이 군화평(신현준)을 보호하려 둘 사이에 서 있다가 연소하(윤소이)에게 배에 칼이 찔린 뒤 다시 군화평이 그녀의 배를 관통해 연소하를 찌르는 장면은 무협 영화의 최소한의 ‘의’도 지키지 못하는 처사일 뿐만 아니라, 그것이 사회적으로 관객들에게 용인될 클라이맥스 코드라고 생각하는 점이 놀랍다. 사회적으로 소재 제한에 대한 터부는 없어졌으니 보다 자기 성찰적인 재현 윤리를 생각할 때다.
정성일 : 물론 올해의 영화는 이만희의 <휴일>이다. 그리고 이 영화의 발견은 사건이다. 이 영화는 유령의 시간을 건너뛰어 우리 앞에 돌아왔다. 그리고 그가 여전히 동시대 시네아스트임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한편으로 고마운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영화가 1960년대 한국영화에서 멀리 나아가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부끄러운 순간이다. 그는 우리를 회고에 잠기게 하기는커녕 그의 영화를 본 다음 동시대 한국영화를 보고 있으면 반대로 시사회 현장이 시네마테크에 와서 앉아 있는 것 같은 거의 절대적인 영화적 체험을 안겨준다. 그러므로 나는 이 영화 한 편으로 올해 한국영화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 다음. 나는 모든 영화제, 혹은 영화상에서 주는 상은 선물이며 그 영화의 평가와 아무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그러나 올 한 해 예외 없이 모든 국내의 영화상에서 홍상수의 <극장전>과 김기덕의 <활>이 후보에조차 언급되지 않은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역설적으로 그들은 고립되면서 점점 더 우리 시대의 예술가들이 되어가고 있다. 당신들의 무관심은 매우 슬프게도 훗날 당신들의 무능력으로 이야기되어질 것이다. 예술품이 눈앞에 있는데 왜 그것을 보지 않는가, 혹은 보지 못하는가? <씨네21>은 지난호에서 2005년 한국영화에 대한 네 가지 화두가 ‘이야기하기의 무능력-아버지의 부재-전시성-노인+코미디’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화두가 정확하게 대중들뿐만 아니라 비평적 담론도 (대부분) 침묵한 4편의 영화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보인 것은 상황의 위기를 보여주는 것과 다름없다. <사랑니>는 이야기하기의 새로운 화법을 찾아냈으며, <여자, 정혜>는 아버지의 부재는커녕 가족 전체가 너무 무거워서 문제가 된다. 전시성에 대해 홍상수의 <극장전>은 절대적 포기를 통해 그가 완전하게 새로운 자신만의 구조로 이루어진 세상의 형상을 만들어냈음을 보여주었으며, 노인을 내세운 코미디가 웃음을 끌어낼 때 김기덕은 <활>에서 소년 소녀를 위해 그 노인의 자살적 몸짓과 새롭게 태어나기를 통해 비극을 긍정한다. 문제는 화두에 대한 대답이 부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답을 한국영화의 담론 바깥, 질문에 대한 외재성의 자리에 위치시켜놓음으로써 대답의 부재 자체를 안심하면서 즐기고 있는 것이다. 같은 말이지만 문제는 왜 대답이 부재하느냐가 아니라 왜 그 대답을 피해야만 대중적·비평적으로 성공하느냐는 것이다.
허문영 : 충무로에선 중견이건 신인이건 장르에 몰두하는 영화들은 주춤거리고 있는 반면, 사적인 비전의 영화들은 예상을 뛰어넘는 기쁨을 주었다. 후자의 대표적인 사례가 정지우의 <사랑니>와 임상수의 <그때 그사람들>이다. 충무로의 대작 장르영화들은 다수가 퇴보했다는 느낌마저 든다. 반면 독립영화인 <용서받지 못한 자>와 <거칠마루>와 <다섯은 너무 많아>는 장르를 원용하는 새로운 방식을 개척했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할 성과다. 충무로의 새로운 수혈이 필요한 단계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