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익 감독의 책상 위에는 <실증 한단고기>가 놓여 있었다. 평가가 엇갈리고 실제 역사인지도 불분명한 이 책이며 예전에 읽었다는 신채호의 <조선상고사>가 재미있는지 묻자 대뜸 “재미없지”라는 답이 돌아왔다. 재미없기 때문에 자신이 영화로 재미있게 만들어야 한다면서. 어느 날엔가 세상을 보는 관점을 얻었더니 바랄 것이 없더라는 이준익 감독. 역사적 사실을 영화로 재구성함에 있어 확고한 기준을 가진 그는 인터뷰 내내 열을 띠며 역사와 사회를 논했고 가끔은 영화 이야기도 했다.
-<황산벌> 이후 또다시 사극이다. 동성애의 감정을 가진 광대 이야기라는 점에서 <패왕별희>와 비슷하다는 오해를 살 법도 한데 부담을 갖진 않았는가.
=영화를 보고 나서도 <왕의 남자>가 <패왕별희>와 비슷했나? (부정하는 답을 듣고) <패왕별희>와는 출발점이 다른 영화다. <패왕별희>는 광대 이야기이긴 해도 문화혁명을 전후한 시대의 아픔을 담고 있다. 하지만 <왕의 남자>는 어느 사회나 품고 있는 계급을 지적한다. 광대는 서자나 백정의 아들처럼 가장 천대받던 존재가 모여 패를 이룬 집단이다. 현대사회에는 그런 계급적 구분은 없지만 재산이나 지식으로 계급이 나누어지고, 갖지 못한 자의 설움이 분신자살처럼 가장 극명한 형태로 드러나기도 한다. 그들은 장생처럼 가진 게 없으니 잃을 게 없어 몸뚱이를 던지는 거다.
-원작과 달리 무오와 갑자사화가 영화 도중 몇달 사이에 일어난다. 역사적인 사실과는 다르지 않은가.
=연극은 일단 설정을 하면 그 안에서 디테일을 발전시킬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스펙트럼을 넓히지 않으면 만들기가 불가능하다. <왕의 남자>는 광대를 중심으로 하여 그들이 보는 세상과 권력과 왕으로 넓혀야 했다. 그렇더라도 시간 차이만 제외하면 실제 역사와 꽤 비슷하게 들어맞는 면이 많다. <황산벌>도 그랬다. 당 태종과 삼국의 왕이 모여 다투는 첫 장면을 유심히 보면 그 당시 정세를 짐작할 수 있다. 김유신도 정말 쌀배달하러 다녔고. 지루해지니까 구구절절 설명하진 못했지만.
-장혁이 장생으로 캐스팅됐지만 병역기피 문제가 얽혀 갑자기 군대에 가게 됐다. 배우가 바뀌면서 장생에게도 변화가 있었을 듯하다.
=배우마다 패턴이 다른데, 대사를 뱉는 배우가 있고 먹는 배우가 있다. 감우성은 먹으면서 뱉는, 그러니까 내적 갈등을 씹고나서 뱉는 배우다. 외적 갈등을 드러내는 장혁이 캐스팅됐을 때와는 달라질 수밖에 없었고, 감우성이 장생을 한다면 층위가 깊어지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감우성도 시나리오가 마음에 든다고 했지만 왜 자신이 이 역에 맞는지 설득해달라고 했다. 그래서 이메일을 보냈는데 그게 좀 절박했나 보더라. (웃음)
-인물의 성격이 원작과 많이 다르고 처선이라는 새로운 인물도 있다.
=자, 내가 이 영화에서 감독이라는 역을 맡았다. 그러니까 나와 내적 갈등이 유사한 인물이 주인공이어야 관객이 그를 쫓아갈 수 있을 거다. 권력과 신분을 강하게 부정하는 장생이 그런 인물이었다. 처선은 실제 연산의 측근이었던 내시인데, 전지적 시점으로 사건을 보는 인물이 필요해 삽입하게 됐다. <왕의 남자>는 누구의 시선으로 보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영화다. 10대라면 공길의 시선을, 20대 중·후반이라면 장생의 시선을 택하기 쉬울 거다. 하지만 처선의 시선으로 보면 전체가 정확하게 보일 것이다. <왕의 남자>는 소극이 중극에 영향을 끼치고 그것이 다시 대극으로 이어지는 시나리오였다. 나는 그런 플롯을 미리 세팅해두고 시작한다.
-그렇게 시나리오를 쓰다보면 영화가 지나치게 도식적이 될 수도 있을 텐데.
=플롯이 보이지 않도록 캐릭터로 덮어야 한다. 플롯이 뼈대라면 캐릭터는 살이다. 2시간30분 버전으로 보면 그런 플롯이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까지 자세하게 넣으면 관객이 싫어할 것이다.
-원작보다 동성애의 암시를 희미하게 처리하겠다고 말했고 그렇게 했다. 하지만 장생의 대사나 사설에서 공길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오기도 한다.
=애매하게 상업적인 줄타기를 한 거다. 하지만 이 영화는 동성애 멜로영화로만 볼 수는 없고, 그렇게 보자고 들면, 뭔가 다른 요소가 끼어들어 그걸 방해할 거다. 장생에게 공길은 사랑의 대상만이 아니다. 세상에 대한 태도이기도 하다. 그래서 장생이 연산에게 하는 사설은 자기 설움이 들어 있는데, 그것이 곧 장생의 철학이다. 영화 처음에도 나오지 않나. 밥만 주면 뭐든 다 파냐고. 장생은 광대는 자기 재주만 팔아야 한다고 믿는다.
-시나리오를 쓰기 전부터 정진영을 연산군 역으로 정했다고 들었다. 그렇게 일찍 결정한 이유가 무엇인가.
=친해서. (웃음) 친하다는 말은 그를 매우 잘 안다는 의미이고, 믿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떤 재주도 믿음이 없으면 빛이 나지 않는다. 마틴 스코시즈한테 왜 로버트 드 니로하고 그렇게 영화를 많이 찍었냐고 물어보면 친해서 그랬다고 할걸? (웃음) 새로움이란 것도 친한 사람끼리 가본 적 없는 길로 가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연산군이 말 타고 활 쏘는 사냥놀이를 굳이 집어넣었다. <황산벌>에서도 그런 장면은 공을 들였던데, 집착하는 소재인가.
=<아나키스트>를 찍으면서 중국과 접촉을 했는데 중국인들은 동이족의 존재를 중요하게 보더라. 이(夷)가 무슨 뜻인가. 글자를 해석하면 큰 활을 쏜다는 뜻이다. 동북아는 지형에 따라 문화가 다르다. 중국은 평원이어서 창을 쓰고 일본은 협곡이 많아 검을 쓴다. 한국은 언덕이 많기 때문에 활을 쏘고, 고구려 고분에서도 그런 벽화가 나온다.
-사극인데도 제작비가 44억원이 채 되지 않는다. 요즘 기준으로는 적게 든 편이다.
=44억원만 준다니까 그 안에서 찍었지. (웃음) 나는 시나리오를 쓰면서 제작비를 정확하게 맞출 수 있도록 쓴다. 과도한 의욕으로 찍지 못할 장면을 쓰는 건 진짜 무책임한 일이다. 건물을 짓더라도 정해진 건평과 층수가 있어 설계대로 한다면 돈이 더 들어갈 일이 없지 않나. 내 돈으로 영화를 찍는다면 지금보다 더 싸게도 비싸게도 할 수 있지만, 이건 남의 돈으로 찍은 영화이고 약속을 지켜야 한다. 나는 그 약속이 예술을 하는 것보다 더 소중하다고 본다.
-제작비가 저렴하여 찍지 못한 아쉬운 장면이 있는가.
=허가를 받지 못했지만 장생과 공길이 마지막으로 줄을 타는 장면은 부용정에서 찍고 싶었다. 물 위에 줄을 매고 광대들이 놀고 있으면 부용정을 병풍처럼 둘러싼 산자락 위에서 반군이 쏟아져내리는 거지. <성스러운 피>에 비슷한 장면이 나오는데 정말 인상적이었다. 성조기 무늬를 달고 다니는 서커스단이 코끼리 시체를 쓰레기장에 버리니까 주위에서 난민이 쏟아져나와 고기를 뜯어간다. 그 장면 하나로 멕시코는 미국의 쓰레기 하치장이라는 현실을 보여주는 거지. 어찌나 인상적이었는지 돈 주고 사기까지 했는데 한 3천만원 손해봤다. 그 당시 3천만원이면…. (웃음)
-내년 3월에 <라디오 스타> 촬영을 시작한다고 했다. 93년 <키드캅>을 찍고 10년 넘게 연출을 하지 않았는데 행보가 무척 빨라졌다.
=<왕의 남자>가 안 되면 빨리 다른 영화 찍어서 빚 갚아야 하니까. (웃음) 내가 영화를 찍는 원동력은 빚이다. 빚이 굉장히 많은데, 인터뷰하면서 갚아야 된다, 이런 이야기 안 하면 돈을 빌려준 사람들이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그건 빚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