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피아니스트>(2002) 이후 처음 내놓은 영화는 찰스 디킨스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 한 <올리버 트위스트>다. 소설에서 처럼 영화 속 올리버 트위스트도 고아이며, 어린 나이에 강제노역에 시달리다가 장의사에게 팔려간다. 그리고 무작정 도망나와 발길이 닿은 런던에서 소매치기 소년 다저의 호의에 넘어가 악당 페긴의 소매치기단에 합류하게 된다. 하지만 천성이 착한 소년에게는 신의 가호와 이웃의 도움이 따르는 법. 올리버 트위스트는 페긴 일당 중 마음이 여린 낸시의 희생 덕분에, 부유한 서점 주인 브라운로우의 푸근한 품에 안겨 행복한 미래를 보장받는다.
29일 필름포럼에서 개봉하는 이 영화를 언론 시사회에서 처음 본 뒤 무심코 들었던 생각은 이랬다. 일단, 너무 낡은 얘기 같았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19세기 유럽얘기냐, 버림받은 아이들이 지천에 널려있고 그 아이들이 노동을 착취당하던 200년 전 얘기가 왕자·공주님들로 가득한 요즘 세상에 먹히겠느냐’는 짧은 생각이 스쳐갔다. 버려진 아이들이기는 마찬가지인데, 천성이 고운 올리버 트위스트는 착한 부자의 도움으로 잘 먹고 잘 살고, 디저를 포함한 ‘못된’ 아이들은 감옥에 가는 것이 해피앤딩이라는 식의 부당한 결말도 짜증스러웠다.
하지만 <올리버 트위스트> 시사회 다음날인 21일부터 다섯 차례에 걸쳐 <한겨레>(의 다른 기자들)가 연재한 <우리의 아이들 사회가 키우자> 제1부를 읽고 나니, 그 ‘무심코 들었던 짧은 생각’이 정말 얼마나 무심하고 짧은 생각이었는지 새삼 죽비를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가출한 부모 대신 할아버지와 함께 사는 연희네 삼남매는 시커먼 비닐봉지에 담아 온 남은 음식으로 끼니를 때운다고 했다. 경기도 의왕시에서 홀로 지내던 아홉살 영인이는 굶주린 개에 물려 숨졌다. ‘소년소녀가장’이라는 말이 ‘소년소녀가정’으로 바뀌긴 했지만, ‘ㅏ’다르고 ‘ㅓ’다르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곤경에 처한 소년소녀가정 아이들이 전국에 4386명이나 된단다. 그래서 위탁가정에 맡겨진 일곱살 현수는 위탁모의 친딸과 사이가 안 좋아 다른 위탁가정으로 거처를 옮기며 또한번 큰 상처를 입었다고 했다.
시리즈의 1부는 27일에 끝났다. 그날, 우리 사회의 양지를 둘러싸고 있던 포근하고 두터운 울타리의 빗장이 잠시나마 풀리자 <올리버 트위스트> 속의 암울하고 고통스럽던 풍경이 내가 살고 있는 시대의 일부로 보였다. 남은 음식도 못먹는다는 북쪽의 아이들, 마약·매매춘에 연루된 범죄 집단에 팔려간다는 제3세계 아이들한테까지 범주를 넓힐 필요조차 없었다. 왕자·공주님으로 길러지는 우리의 아이들과 같은 또래, 또다른 우리의 아이들이 ‘브라운로우’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여, 천성이 고운 아이든 인물이 고운 아이든 가릴 것 없이 누구든, 가급적 빨리, 많이 ‘브라운로우’의 보살핌을 받게 되길 바라는 마음이 생겼다. 21세기 ‘브라운로우’라면, 사회복지가 될 수도, 자선사업가가 될 수도, 평범한 이웃이 될 수도 있겠지. 유독 세밑에만 차고 넘치는 ‘이웃 사랑’ 구호가 마뜩찮지만, 평범한 이웃인 나도 생각난 김에 이때나마 솔선수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