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자유를 꿈꾼 여인의 초상, <청연> [1]
2006-01-03
글 : 이성욱 (<팝툰> 편집장)

‘마침내, <청연>이 날아오르는구나’라는 소회만큼 작품의 운명에 걸맞은 표현이 또 있을까. 윤종찬 감독이 일본, 중국, 미국 등으로 동분서주하며 유례가 없는 항공 촬영을 시도하고, 민간인 최초의 여성비행사 박경원의 삶이란 실존인물을 그린다는 소식은 그의 비상한 데뷔작 <소름>을 생각하면 낯설었다. 곧 흉흉한 소문이 나돌았다. 한없이 늘어나는 제작비에 영화가 엎어진다더니 제작사가 바뀌는 곡절을 겪었고, 제작 기한은 늘어났다. 데뷔작에 짙게 드리운 감독의 매서운 집념을 생각하면 ‘필연’으로 보이기도 했다. 예컨대 복엽기 사운드를 채취하기 위해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아슬아슬한 저공비행을 시켜가며 소리를 따게 만들었다는 예가 그런 증거다. 후반작업에선 전체 2천컷 가운데 절반가량을 CG로 처리한 것도 예사롭지 않다. 어쨌든 궁금증은 블록버스터의 외형이 아니라 도대체 그가 블록버스터로 다루려는 게 무엇인지에 있었다. 기획의 리뷰와 인터뷰는 거기에 맞춰져 있다.

미뤄지고 미뤄지던 <청연>의 첫 시사회를 앞두고 ‘박경원의 친일 행적과 <청연>의 미화 논란’이 인터넷에 불거졌다. 친일의 근거는 세 가지로 좁혀진다. 고려신사 참배, 일만친선 황군위문 비행의 시도와 이륙 직전 일장기를 흔드는 사진, 체신대신 고이즈미 마타지로와의 염문설. 윤종찬 감독은 “전쟁 전이니 고려신사 참배는 전범에 대한 추모는 아니다. 내선일체의 염원이란 뜻과 더불어 무사안전을 기원하는 비행사의 관행이 동시에 담긴 것이다. 염문설은 분분하나 확인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일만친선 비행과 일장기에 관한 팩트는 영화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 과정에 이르는 허구적 상상이 가미됐으니 <청연>의 영화적 의의는 여기에 있다. 허구적 상상으로 시작해 역사적 사실로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영화가 무엇에 열중하는지 읽는 것이 <청연>을 보는 법이라 믿는다.

거대한 돈으로 거대한 꿈을 제조하는 건 블록버스터의 숙명이다. 블록버스터 <청연>의 꿈은 식민시대라는 가혹한 조건을 이겨내는 여성비행사의 아름다운 영웅담 짓기에 있지 않(았)다. “제국주의의 치어걸, 누가 미화하는가”라는 선정적인 제목으로 <청연>을 미리 의심해버린 어떤 ‘진보’ 미디어의 추정은 물론 터무니없다.

한 사람이 있을 뿐, 영웅담은 없다

첫신은 선언에 가깝다. 빨간 일본 국기를 앞세워 보무도 당당히 행진하는 일본 군대와 망해버린 나라의 운명을 슬퍼하는 필부필녀들이 대비된다. 그 틈에서 어린 소녀가 즐겁게 히죽거리고 있다. “어른들은 입만 열면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다고 원통해했지만, 아이들은 모이기만 하면 닌자 얘기를 했다.” 소녀의 발칙한 상상력은 일본 군대를 닌자 특공대로 바꿔놓고야 만다. 소녀는 기와집 지붕 위로 날아드는 닌자들처럼 가뿐히 날아오를 수 있는 꿈을 꾼다. 조선의 아버지, 어머니를 배반하는 소녀의 꿈의 원천이 닌자라니.

꿈의 첫 번째 방해자는 아버지다. 어머니와 자매가 무심히 지켜보는 가운데 소녀는 아버지의 몽둥이와 흩날리는 눈 속에서 대결을 벌인다. “눈만 뜨면 밥하고 빨래하고 나무하고. 여자는 사람도 아닙니꺼?” 소녀는 닌자보다 더욱 거대한, 그러나 훨씬 현실적인 꿈을 꾸기 시작한다. 새처럼 날개를 달고 어디든 자유롭게 날아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꿈. 하필 1910년 한일합방 무렵에 소녀에게 싹튼 이 꿈은 원죄가 되고 만다. 시간과 사연들을 훌쩍 뛰어넘은 1920년대 중반, 박경원은 일본의 다치가와 비행학교에 입학한다.

<청연>은 <역도산>의 얼굴을 닮았다. 식민지 시대, 일본 내부로 걸어들어가 ‘거대한 패배’를 이루는 역도산처럼 민간인 최초의 여성비행사 박경원도 ‘거대한 패배’의 여정을 시작한다. “일본이고 조선이고 난 그런 거 모른다”며 자신만의 욕망을 불사르던 역도산처럼 박경원도 비행사라는 자신의 꿈만을 바라본다. <청연>의 드라마는 곧바로 최대의 모험을 시작한다. 이건 젊은 역도산(설경구)과 젊은 박경원(장진영)의 다른 얼굴이기도 하다. 돈도 배경도 없는 식민지의 아들 역도산은 얼굴을 몹시 일그러뜨리고 비열하게 현실을 이겨가야 했다. 돈도 배경도 없는 식민지의 딸 박경원은 구김없음은 물론이거니와 살포시 들떠 있다. 세간을 전당포에 맡겨 몇푼의 돈을 만들고, 택시회사 기름을 온몸에 발라가는 노동으로 주경야독하는 처지건만 희색이 만면이다. 그 명랑함이 조선의 내로라 하는 부호의 아들인 한지혁(김주혁)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림 같은 곳에서 그림 같은 연애가 흘러간다.

이 대목에서의 장진영과 김주혁의 연기는 과장스럽게 조율되고, 윤종찬 감독은 로맨스의 서두를 <소름>의 공포스런 미금아파트 장면처럼 찍는 ‘장난’을 서슴지 않는다. 돈 걱정 없는 한지혁은 일본 유흥가의 한량일 때나 일본군 장교복을 차려입었을 때나 이 풍진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지 무목적적이다. 한량일 때나 일본군 장교일 때나 채신머리 없게 끊임없이 토해내는 건 술이라기보다 그의 속을 느끼하게 만드는 시대의 무게처럼 보인다. 경원과 지혁은 이념과 국경을 불필요한 비곗덩어리로 여기는 일종의 무정부주의자들이다. 국가와 민족을 제거하고 개인의 꿈을 앞세우다

시대의 중력을 과감히 벗어버린 이 진공상태는 다분히 의도적이다. 닌자를 꿈꾸던 소녀와 비행학교 입학 사이에 있던 공장노동자 박경원의 파업 장면도 하필 편집에서 빠졌다. 그러니 식민의 고통을 이겨내는 역경 스토리를 기대한다면 온통 배반이다. 한지혁은 논픽션에서 출발한 픽션의 인물이다(박경원을 금쪽같은 선배로 따르는 비행학교 후배 이정희(한지민)의 수양오빠다. 실존 인물 이정희의 수양오빠가 일본으로 유학왔다는 사실을 모티브로 했다). 한지혁과 박경원의 로맨스는 픽션이지만, <청연> 최대의 ‘진짜’ 픽션은 조선 적색단의 등장과 더불어 시작된다. 드라마틱한 흥분은 이 최대의 픽션 대목에서 고조된다. 배반이 다시 배반된다는 얘기다. 묵직한 반전 혹은 소녀의 원죄에 대한 처벌이 전개된다(어쩐지 <소름>의 선영이 겪는 운명이 전이된 듯한 기운이 보인다). 아버지와 민족을 벗어내려 했으나 그 아버지와 민족은 박경원과 한지혁에게 끔찍스런 고문과 이별의 원인이 된다. 박경원이 좀더 큰 비행을 꿈꿀수록 친일의 수렁도 깊어진다.

3년간 95억원을 먹어치운 <청연>의 꿈은 친일 대 반일 같은 이분법으로 헤아릴 수 없는 인간형을 친일 대 반일의 논리만이 가능한 시대에 세워보는 것이다. 국가와 민족이라는 근대 이데올로기를 무화해 우리의 의식을 제로 베이스에서 출발시킬 수 있는지 가늠해보려는 꿈이다. 시대를 진공시킨 전반부 로맨스의 픽션과 시대의 중력이 갑자기 휘몰아치는 후반부 시대물의 픽션이 겨루는 구도는 그래서 필요했을 것이다. “조선, 일본, 남자, 여자(의 구분이) 없는” 신천지가 펼쳐지는 하늘에 오르는 꿈만 꾸던 그녀의 의기양양과 그녀가 피해갈 수 없는 난기류와의 조우 말이다.

<청연>의 꿈에는 몇 가지 도식이 작용한다. <소름>에서 선영(장진영)과 용현(김명민)을 무섭게 목조르던 아버지의 존재는 박경원과 한지혁의 아버지로 재림한다. 보호의 울타리도 못되는 것이 굴레만 되던 가족은 국가(민족)로 대체, 확대된다. 그리고 경원과 피를 걸고 경쟁하거나 애정을 놓고 질투할 만한 이정희와 기베(유민)는 그녀의 후원자가 된다. 한지혁의 사심없는 친구가 초래했던 결과에 비하면 이 여성들의 유대는 놀라울 지경이다.

블록버스터를 배반한 블록버스터의 쾌감

이런 도식도 <청연>의 꿈을 제조하기 위한 부품일 터, 이것은 블록버스터의 윤리에 맞는 꿈일까? 일제시대로 들어가 조선인의 꿈을 이야기할 때, 더구나 그것이 거대 예산이 들어간 블록버스터여야 할 때 민족주의라는 준령을 피해가기란 난감하다. 분단의 테마를 다루는 현대물이 국가주의의 산을 뛰어넘기보다 오히려 감상의 뻥튀기 노릇을 하는 것처럼. 하지만 <청연>은 불온한 꿈의 제조를 위해 블록버스터의 윤리를 위반한다. <청연>의 쾌감은 여기에 있다.

쾌감을 이야기할 때, 블록버스터로서 갖춰야 할 스펙터클을 빼놓을 수 없다. 3D애니매틱스 콘티로 치밀하게 준비해 찍은 비행의 스펙터클은 <청연>의 스케일에 결정적인 구실을 한다. 비행의 스펙터클이 아니더라도 <청연>은 블록버스터의 스케일을 비교적 튼실하게 유지한다. 그렇지만 <청연>의 쾌감이 불온한 꿈이 주는 묘미에 있다고 할 때, CG를 가미한 비행의 스펙터클은 극의 흐름을 불균질하게 만드는 훼방꾼처럼 느껴진다. 여기에는, 소름끼치겠지만, 우리가 아직 윤종찬에게서 <소름>을 떼어내지 못한다는 이유도 작용할 것이다. 그는 여전히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비극성에 매혹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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