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잭슨의 <킹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작품이 팬보이의 헌사라는 점을 먼저 인식해야 한다.
팬보이는 누구인가? 특별한 대중 예술장르나 그 장르에 속해 있는 특정 작품에 연인과 같은 헌신을 바치는 팬이다. 그 팬이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을 만들 때 가장 먼저 신경을 쓰는 것은 무엇일까? 그건 그가 지금까지 품고 있던 비전을 현실화시키고 원작에 대한 애정을 토해내는 것이다. 자기 작품이 좋으면 좋겠지만, 자기 작품의 자체 완결성이나 완성도는 부차적이다.
원작의 거의 2배나 되는 러닝타임은 어떤 의도?
<킹콩>을 피터 잭슨의 ‘에고’가 지나치게 부푼 결과라고 믿는 게 잘못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앞으로 <킹콩>과 종종 비교될 제임스 카메론의 <타이타닉>이야말로 감독의 에고로 똘똘 뭉친 영화다. 잭슨은 카메론보다 훨씬 겸손하다. 원작을 그대로 흉내낸 오프닝 크레딧에서부터 마지막에 나오는 정중한 헌사에 이르기까지, 그는 자기가 해골섬과 킹콩의 이야기를 처음으로 하는 이야기꾼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3시간이 넘는 괴물 같은 러닝타임도 그의 에고가 부풀었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그건 영화가 제작자들을 설득할 수 있을 만큼 재미있었다는 증거일 뿐이다. 아마 그는 제작사에서 3시간 버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조용히 2시간30분 분량의 극장판을 만들고 나중에 DVD로 감독판을 풀었을 것이다. 엄청난 제작비 역시 잭슨의 전작인 <반지의 제왕> 시리즈가 얼마나 히트작이었는지 증명해주는 증거 이상은 아니다. 그렇다면 피터 잭슨은 이 괴물 같은 영화로 무얼 하려 했던 걸까?
원작영화의 거의 2배나 되는 장황한 러닝타임부터 힌트가 된다. 90여분이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원작의 이야기에 무엇이 추가되었는가? 일단 앤의 과거사가 드러난다. 이 금발 아가씨는 롱아일랜드에서 몇번 엑스트라를 한 적 있는 아마추어가 아니라 연극배우를 꿈꾸는 보드빌 연예인이다. 잭 드리스콜은 무뚝뚝한 선원이 아니라 칼 덴햄의 영화 각본을 써주는 극작가다. 칼 덴햄은 세실 드 밀과 같은 요란한 할리우드 타이쿤이 아니라 자신의 비전을 이해하지 못하는 제작자들에게 쫓기는 오슨 웰스 비슷한 아웃사이더다(몇몇 장면에서 덴햄 역의 잭 블랙은 오슨 웰스와 아주 비슷한 자세를 취하기도 한다). 심지어 잭슨은 헤이즈 항해사와 지미 같은 선원들에게도 상세한 뒷이야기를 달아주기도 한다.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했을까?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실용적인 이유는 균형 때문이다. 극적 긴장감을 최대한으로 살리려면 킹콩은 아무리 빨라도 영화가 3분의 1 이상 흐른 뒤에 나오는 게 효과적이다. 어느 정도 앞에 빈 부분이 있어야 관객의 조바심과 호기심이 달아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원작과는 달리 원주민들의 비중이 줄고 이야기 진행도 원작보다 훨씬 빠르니 아무 이야기라도 넣어 빈자리를 채워야 할 판이다. 이건 여러분이 지금 생각하고 있는 만큼 어처구니없는 이유는 아니다. 종종 이야기의 내용보다는 전체적인 균형이 더 중요할 때가 있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잭슨이 정말로 이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33년에 나온 오리지널 <킹콩>은 무척 경제적인 영화다. 이 영화는 주인공들과 킹콩에 대해 꼭 할 말만 한다. 예술적으로 그건 올바른 선택이다. 하지만 팬보이 입장에서는 주는 대로 받아먹기만 할 순 없다. <엑스 파일> 팬들이라면 일주일에 한번씩 방영되는 에피소드를 보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스컬리와 멀더의 사생활을 상상하고 과거사를 재구성할 것이며, 그걸로 팬픽을 쓸 것이다(심지어 쿠엔틴 타란티노처럼 잘나가는 감독도 그 짓을 한다. 최근 그가 <CSI 과학수사대>를 위해 쓴 2부작 각본은 말 그대로 팬픽이다. 다른 팬픽들과는 달리 시즌 피날레로 방영될 기회를 잡은 게 다를 뿐이지). 잭슨도 마찬가지 짓을 했다. 이 영화는 그의 팬픽이다. 9살 때 처음으로 <킹콩>을 본 뒤로 그의 머릿속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들끓었을지 누가 알랴? 아마 그에겐 앤과 드리스콜과 덴햄 그리고 결정적으로 킹콩에 대해 할 이야기가 엄청나게 많을 것이다. 실제로 영화에 반영된 건 그중 반의 반의 반도 안 될 거라는 데 내기를 걸어도 좋다.
피터 잭슨의 <킹콩>은 미지의 개척지를 탐사하는 탐험과도 같다. 그에겐 주정뱅이 노르웨이 선장에게서 사들인 조악한 지도 대신 투박한 특수효과와 거칠거칠한 각본으로 쓴 33년 버전 <킹콩>이 있다. 거칠고 종종 조악하며 구제불능일 정도로 캠피하긴 해도 33년 버전은 예술적으로 거의 완벽하다. 하지만 몇 십년째 해골섬을 꿈꿔왔던 사람은 그 지도의 아름다움에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직접 가서 해골섬의 자잘한 디테일을 뽑아와야 한다. 그것이 예술적인 완결성과 연결되느냐는 다음 문제다. 아마 그가 극적으로 별 필요가 없는 지미 캐릭터를 넣었던 것도 주인공들을 방해하지 않고 자신의 관점을 담을 수 있는 소년 캐릭터가 하나 필요했기 때문일 게다. 지미가 9살짜리 소년이면 이상적이겠지만, 그것까지 바랄 수는 없는 노릇이고….
어느 순간부터 <킹콩>의 이야기는 실제 역사가 된다. 33년 버전에서 메리언 쿠퍼와 어니스트 쇼드색은 동시대의 입장에서 그들의 눈앞에 막 벌어진 엄청난 일들을 영화로 기록했다. 9살 때부터 그 영화를 보고 킹콩에 대한 꿈을 꾸었던 피터 잭슨은 21세기인의 시선으로 33년이라는 과거에 뉴욕 맨해튼에서 일어났던 엄청난 일들을 재검토한다. 당사자들을 인터뷰해 왜곡된 사건들을 정리하고 디테일을 추가하며 지금까지 부당하게 무시되었던 킹콩의 내면 세계에 접근한다. 그렇다고 잭슨의 목표가 이데아 세계 어딘가에 존재하는 원형 <킹콩>을 그대로 재현하려는 것은 아니다. 쿠퍼와 쇼드색의 버전이 그런 것처럼 피터 잭슨의 영화도 또 다른 버전에 불과하다.
진짜 알맹이는 킹콩 캐릭터 자체의 묘사
그렇다고 해서 잭슨이 원작과의 연관관계를 끊어 던지는 건 아니다. 그건 팬보이로서 불가능한 행동이다. 반대로 잭슨은 자기 영화에 엄청나게 많은 원작의 조각들을 던져넣는다. 그건 킹콩이 죽은 V-렉스의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작은 행동이나 원작의 페이 레이가 썼던 모자를 그대로 쓰고 나온 나오미 왓츠의 모습, 원작에서 쿠퍼가 잘라낸 부분을 자기 식으로 재구성한 거미 구덩이 장면처럼 정중한 오마주이기도 하고, ‘쿠퍼가 만든다는 RKO 영화에 출연하는 페이 레이’, 원작의 주연배우 브루스 캐봇을 뻔뻔스럽게 캐리커처한 브루스 박스터 캐릭터, 원작의 로맨틱한 장면이나 해골섬 원주민 댄스를 각색한 극중 패러디처럼 노골적인 농담이기도 하다. 따라서 난 여러분에게 원작영화를 일단 한번 보고 잭슨의 영화를 보길 권한다. 잭슨의 영화는 처음부터 원작을 알고 있는 관객이 더 즐길 수 있게 짜여져 있다. 적어도 원작을 본다면 킹콩이 등장하지 않는 도입부 1시간은 훨씬 흥미진진해질 것이다.
이 모든 건 애정의 표현이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자잘한 인용이나 패러디가 연인 사이의 전희나 농담이라면, 진짜 알맹이는 킹콩 캐릭터 자체의 묘사에 있다.
여기서 발전된 특수효과는 조금 아이로니컬한 역할을 한다. 여러분이 오리지널 <킹콩>을 본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특수효과밖에 안 보일 것이다. 윌리스 오브라이언의 특수효과는 지금 봐도 재미있다. 아니,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 재미있어지는 것 같다.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의 거친 동작, 애니메이터의 손가락에 의해 조금씩 흐트러지는 콩 인형의 토끼털 모피, 흐릿하고 비현실적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일종의 시적 환상성까지 느껴지는 배경…. 이 모든 것들은 그 투박함과 인공성 때문에 더욱 근사한 구경거리다.
잭슨이 도입한 최첨단 특수효과는 그 구경거리의 요소를 지워버린다. 물론 잭슨이 만든 <킹콩>이란 영화는 대단한 구경거리다. 이 영화는 정말로 SF영화에 진력이 난 현대 관객의 얼을 빼놓을 정도로 엄청난 스펙터클을 제공한다. 컴퓨터그래픽으로 창조된 킹콩도 그런 스펙터클의 일부다. 하지만 조금 더 자세히 보시길. 이 영화의 킹콩은 너무나도 사실적이기 때문에 관객은 어느 순간부터 킹콩이 특수효과의 창조물이라는 것을 잊어버린다. 원작에서 관객이 본 건 괴상하게 움직이는 재미있는 토끼털 인형이었다. 하지만 피터 잭슨의 영화에서 관객은 상처받고 사랑에 빠지고 오해받고 고통받는 한 영혼을 본다. 특수효과가 어느 선을 넘어서면 캐릭터는 그 효과에서 해방된다. 이제 그는 그냥 하나의 캐릭터다. 영화 중반에 접어들면 우린 그 컴퓨터그래픽 오브젝트를 나오미 왓츠나 잭 블랙 같은 하나의 독립된 배우로 본다. 덕택에 원작에서는 단순한 개념으로만 존재했던 <미녀와 야수> 테마가 생명력을 얻는다.
원작과 피터 잭슨의 <킹콩>은 상호보완적 관계
그렇다면 이건 진화인가? 아니, 피터 잭슨이 쿠퍼와 쇼드색의 33년 버전을 넘어선 것은 아니다. 피터 잭슨이 원작에서 하지 못한 많은 걸 이룩한 건 사실이다. 캐릭터들은 더 입체적이고 이들의 행동은 더 이치에 맞으며, 배우들은 더 훌륭하고 영화의 스케일도 더 크며, 킹콩은 원작보다 훨씬 감동적인 캐릭터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피터 잭슨 버전은 원작이 아주 손쉽게 해치웠던 많은 것들을 포기해버린다. 야만적인 자연의 힘과 현대 기계문명의 충돌이라는 주제는 원작이 잭슨 버전을 한참 능가한다.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밟고 입으로 물어뜯고 집어던지는 킹콩의 무자비한 모습이 만들어내는 광폭하고 도착적인 쾌감도 잭슨 버전엔 없다. 결정적으로 윌리스 오브라이언의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은 컴퓨터그래픽으로 결코 ‘능가’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그 둘은 전혀 다른 목적을 가진 다른 종류의 예술이다.
잭슨이 택했던 건 페어플레이다. 쿠퍼와 쇼어드색의 <킹콩>과 잭슨의 <킹콩>은 같은 출발점에서 시작하는 영화다. 하지만 이 두 영화는 서로를 능가하려는 경쟁자가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존재들이다. 해골섬과 킹콩에 대한 비전을 완성하려면 두 영화를 모두 봐야 한다.
현대 관객에게는 더 날렵하고 세련된 잭슨 버전이 아마 구미에 맞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기회에 쿠퍼와 쇼드색의 영화를 한번 시도해보시길…. 전혀 새로운 세계와 초상이 펼쳐지는 걸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잭슨도 그걸 원할 것이다. 제시카 랭이 나왔던 존 길러민의 70년대 버전은 어떻게 하느냐고? 글쎄, 그 영화도 떠도는 소문만큼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걸 건너뛴다고 특별히 손해볼 일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