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이지, 나도 이런 스승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는 걸레짜기, 애들 싸움 구경하기 등 소소한 일상 속에 존재하는 엄연한 싸움의 기술, 삶의 기술을 농담처럼 건넨다. 그러나 그와 함께 술을 마시고, 물총놀이를 하다보면 지옥 같은 일상을 살아갈 힘이 생긴다. 신한솔 감독의 데뷔작 <싸움의 기술>은 학원폭력에 시달리는 병태(재희)가 독서실에 은둔한 미스터리한 싸움 고수 판수로부터 한수 배워나가는 과정을 그린 성장영화. 여타의 고수들과 마찬가지로 제자를 들이는 것이 영 마뜩잖고, 그럼에도 자꾸만 불쌍한 청춘에게 마음이 가는 이 매력적인 스승 판수로, 백윤식이 아닌 다른 사람을 떠올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백윤식의, 백윤식을 위한, 백윤식에 의한 캐릭터라 불러도 좋겠다. 캐스팅 뒤 백윤식을 생각하며 시나리오를 모두 다시 썼다는 감독의 이야기 때문만은 아니다. 백윤식은 <지구를 지켜라!> 이후, 충무로의 패기만만한 젊은 감독이라면 누구나 탐내는 캐스팅 1순위가 됐다. 감독들은 그를 필요로 하고, 그는 그 기대를 저버리는 법이 없었다. 감독들과 작업 중에는 언제나 농담처럼 진심을 건네고, 영화를 향한 열정이 바탕이 되는 논쟁이라면 피하지 않는다는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싸움의 고수, 오판수다. 스크린 안에서도 밖에서도, 그는 “닮고 싶고 가까워지고 싶은” 배우다.
-인터뷰를 위해 편집본을 미리 봤다. 판수가 너무 멋진 인물로 나와서, 연기한 배우 입장에서는 굉장히 좋을 것 같더라. 아무래도 이번 영화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멋지게 나와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나.
=멋있게 보인다니 다행이고 감사한다. 하지만 일부러 멋있게 보이려 했던 건 아니다. 어차피 판수라는 인물은 책(시나리오)에 묘사되어 있고, 난 그걸 표현하는 거니까. 원래 판수는 남녀를 불문하고 누구든지 닮고 싶고, 가까워지고 싶고, 교감하고 싶은 인물이다. 일종의 판타지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처음 책을 접했을 때부터 요거요거, 완성도 있게만 만들면 참 괜찮을 것 같았다. 누아르에 홈드라마, 학원물이 가미되어 있고, 남자들 사이의 멘토 개념도 있고.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촬영기간 3개월 내내 군산과 전주 촬영장에 계속 있었던 것도 영화에 대한 애착 때문이었다. 크랭크인 직전 준비기간에 <그때 그사람들> 때문에 칸영화제에 갈 수도 있었는데 포기할 정도였다. 그런데 신한솔 감독은 “아, 왜 안 가셨어요?”라더라. (웃음) 그래서 웃으면서, “내가 이 작품을 대하는 자세가 이 정도야”라고 말했다. (웃음) 촬영 전 한달 반 정도는 절권도 도장에 다니기도 했다.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주인공이 병태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보고 나니 주인공이 판수더라.
=주인공인 병태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사람이니까 판수 역시 주인공이다. (웃음) 병태는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많은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청소년이다. 그처럼 모든 면에서 부정적인 그가, 판수에 의해 긍정적인 삶의 방식을 가지게 된다. 판수가 가르치는 싸움의 기술은 결국 육체적인 테크닉이 아니라 인생의 기술이다. 사회도 자신도 부정적으로 보니까 자신감이 없던 그가 판수를 통해 스텝 바이 스텝으로 긍정적인 사고와 자신감과 배짱을 배운다. 그는 병태에게 친구이자, 형이고, 아저씨이며, 아버지다.
-그러고보니 영화 속에서 명백하게 성장한 병태에 비해 판수는 병태를 통해 얻는 게 별로 없다.
=그는 평생 자신의 연령에 맞게 살아왔던 사람이다. 그렇게 살아왔던 인생을 이제 정리하려는 순간, 병태를 만나 본의 아니게 또 다른 운명에 휩쓸린다. 뭘 얻었다기보다는 병태 덕분에 정리하려 했던 자신의 과거로 회귀한 셈이다. 얻은 건 별로 없다. (웃음) 그러나 판수 역시, 스스로를 컨트롤할 수 있는 인생 실력을 가졌다뿐이지 외롭다면 외로운 사람이다. 아마 그 역시 병태를 통해서 인간적인 면을 얻었을 것이다.
-그간 맡았던 캐릭터를 통틀어 이번이 가장 반전이 큰 것 같다. 중반까지는 판수가 진짜 싸우의 고수인지 아니면 사기꾼인지, 병태를 정말 위하는지 혹은 이용하는 건지 헷갈리는 데서 오는 긴장감이 크다.
=사람들은 그걸 일종의 트릭이라고 보는 것 같은데 사실 일부러 그런 효과를 의도한 건 아니다. (웃음) 잘 보면 그런 효과는 책에서 이미 설명이 되어 있다. 그래서 책을 자꾸 보면, 그렇게 연기할 수밖에 없다. 항상 하는 말이지만 난 정공법이다.
-이를테면 판수가 싸움을 가르쳐달라는 병태에게, “너, 집에 돈 좀 있냐?”고 묻는 부분. 기술을 가르쳐줄 테니 돈을 달라는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다.
=그것도 마찬가지다. 나는 그냥 시나리오대로 말한 것뿐이다. 싸움을 하려면 남의 이빨도 부러뜨릴 수 있고, 그러다보면 돈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뒤에 나온다. 그런데 그걸 내 뉘앙스로 표현하니까 보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하는 모양이다. 그런 효과를 책에 묘사하는 건 감독의 몫이고, 거기에 맞는 뉘앙스로 표현하는 것은 나의 몫이다. 평소 대사의 톤을 어떻게 해야 그 맛이 극대화하는지에 대해 부단히 연구한다. 현장에서 모니터를 할 때도, 화면 못지않게 대사의 억양도 중요하게 본다. 일단 기계를 통해서 보는 거니까 직접 연기를 할 때보다는 훨씬 객관적이 된다. 리허설 뒤 모니터를 해보고 거기서 완전히 굳히기에 들어간다.
-사전에 많은 준비를 하는 걸로 유명하다. 그러다보면 현장에서 대사나 상황의 디테일이 자주 바뀌는 것을 별로 선호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렇지도 않다. 현장에선 어쨌든 릴렉스가 중요하니까. 내가 하는 준비 역시 항상 열려 있기 위한 준비지 무슨 장면은 딱 이렇게 해야만 한다고 정하는 건 아니다. 큰 선과 줄기를 가지고 현장에서 조금씩 콩고물을 붙이는 건데, 그 콩고물이 어떤 때는 원작 이상의 효과를 낼 때도 있다. 그게 영화의 묘미 아니겠나. (웃음)
-그런데 싸움을 실제로 좀 하는 편인가.
=뭐, 청소년 때는 잘 모르니까 다들 겁도 없고 벤처 정신, 의협심이 있잖나. 젊은 혈기에 부당한 걸 보면 끼어든 적도 있다. 결과는… 뭐, 그래도 그렇게 맞아본 적은 없다. (웃음) 한번은 흉기를 든 손을 잡았다가 팔뚝을 꿰매기도 했다.
-<지구를 지켜라!> 이후 재능있고 젊은 감독들과 작업을 계속해왔다. 개성있고 고집 센 젊은 감독과의 작업에 이젠 노하우가 생겼을 것 같다.
=그렇다고 달라진 건 없다. 처음부터 내 스타일이 있으니까. 신인감독이라고 내가 월권을 하는 것도 아니고. 존중하는 게 중요하다. 내가 존중하면 그쪽도 나를 존중해주니까 그런 데서 시너지 효과가 일어난다. 나는 원래 삶 자체가 그렇지만 연기 역시 테크니컬하기보다는 내추럴하게 가는 편이다. 원래 현장에서도 늘 웃으면서 농담을 주고받고, 그러니까 젊은 친구들도 편하게 생각한다. 물론 일에 대한 완성도 때문에 간혹 의견 차이가 있을 수는 있지만.
-<지구를 지켜라!> 때만 해도 오랜만에 영화를 찍으면서 낯선 부분도 많았을 텐데, 이제는 이렇게 찍으면 나중에 어떻게 편집될 것인지에 대한 감도 생겼을 것 같다.
=감은 옛날부터 있었지. (웃음) 하지만 아직도 그건 확신할 수 없다. 모든 건 감독 손에 달려 있기 때문에. 찍으면서, “이거, 나중에 편집되는 거 아냐?”라면서 장난처럼 말할 때, 물론 감독은 절대 아니라고 하지. 하지만 그건 감독의 울타리니까 편집을 의식하고 작업하진 않는다. 배우라면 누구나 필(feel)도 있고, 대강 알 수는 있다. 찍으면서 ‘이건 킵(keep)용 아닌가?’ 싶을 때도 있고. 왜 모르겠나.
-<싸움의 기술> 기자시사가 오는 12월27일이다. 혹시 편집실에서 영화를 미리 보진 않았나.
=습관이 돼서 그런지, 중간에 편집실에는 안 들른다. 괜히 가서 보자고 하면 여러 가지로 말도 새고 그럴 것 같아서. 편집실을 가지 않는 대신 프로듀서 등한테 얘기를 듣는다. 감독과 제작자가 아닌 배우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작품을 보면 들어내지 않는 것이 좋은 장면이 편집에서 어떻게 됐는지. 겉으로 티는 안 내지만 나름대로 정보를 수집해서(웃음) 항상 귀를 열어놓고 어떻게 돌아가는지 들어보고, 다시 내 생각을 전달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병태 아버지가 판수의 과거를 찾아다니는 장면. 판수를 적나라하게 설명해주는 부분이었는데 다 들어냈다더라. 그런 건 배우 입장에서 아무래도 좋지 않다. 물론 극장이나 투자·배급 상황 등 여러 측면에서 내린 결정이라는 걸 이해는 하지만, 좀 안타깝다. 하지만 사실 감독들은 다 똑똑하잖나. 자기 작품이 손해를 볼 수 있다고 하면 배우 말은 안 듣는다. 하지만 현장에서 모니터링할 때는 객관적으로도 괜찮은 테이크가 있으면 감독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갑자기 낮은 목소리로) 이거 이거 안 집어넣어주면…(말을 흘리며, 웃음). 그 다음은 땡땡땡으로 가는 거지. 그렇게 웃으면서 각인을 시키는 거야, 재밌게. 조크 같지만 농담 속에 진담이 있다고. (웃음) 난 심각하게 얘기 안 해. 하지만 배우가 자신의 감정이 언제 최고였다는 걸 알리는 게 감독에게도 좋은 것 같다. 서로 손해가 될 건 없다. 그리고 그런 식의 의견은 대부분 감독들이 들어주는 것 같고.
-백윤식을 캐스팅하지 못하면 찍을 수 없는 영화, 백윤식이 아닌 배우가 맡는 걸 생각할 수 없는 캐릭터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일단, 작품을 잘 선택해야겠지. 주는 떡이라고 다 먹을 순 없는 거니까. 그 방법밖에 없는 것 같다. 그게 결국 자기 관리고.
-매니저가 없다던데.
=혼자 다니는 게 편하다. 출연료 협상? 그런 거야 또 우린 아주 냉정하지. (웃음) 매니저는 한석규씨도 없다. <그때 그사람들> 할 때는 영화사에서, 메인 배우들이 모두 매니저가 없다며 신기해하더라. (웃음)
-인터뷰 기사 등을 보면 언론을 의식해서인지 늘 말을 조심하는 게 느껴진다.
=단어 한마디로 구설수에 오르는 건 싫으니까. 나도 할 말은 하며 살고, 특히 창작 활동을 하는 아티스트로서 그런 데 구애받으면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조금만 신경쓰면 되는데 남을 불쾌하게 하거나 불편을 주는 건 좋은 게 아니다. 아주 옛날부터 그랬다. 물론 영화를 이렇게 하기 전에는 인터뷰를 할 일도 없었지만. 그런데 얼마 전 내가 예전에 인터뷰한 기사 모아놓은 것을 봤는데, 10년 전 얘기나 지금 얘기나 마찬가지더라. 했던 얘기 또 하고, 또 하고. 이래선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작품 편수 하나 늘어서, 전작 소개를 조금 더 하는 것만 달라졌지, 계속 쳇바퀴다. 이제 또 개봉하고 나서 일간지들에, 또 똑같은 얘기를 하겠지. (웃음) 올해 초 <그때 그사람들> 관련해 인터뷰할 때는 아예 호텔 스위트룸을 잡아서 이틀 동안 연달아 계속하니까, 그것도 미치겠더라. (웃음) 같은 얘기를 30분 만에 반복하는. 그래도 그게 좋은 면이 있다. 여기저기 다닐 필요없이 이틀 만에 끝낼 수 있어서.
-개봉을 앞두고 긴장이 될 법도 한데.
=관객의 반응은 하늘도 모른다고 하잖나. 사실 나는 그간 관객의 평가에서 별로 순탄하지 못했다. 극과 극으로 갈리기도 했고, 별의별 일이 다 있었다. 이제는 그냥 겸허하게 기다린다.
-관객의 반응과 영화계 지인들의 평가 중 무엇이 더 중요한가.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사실은 평가가 중요하다. 하지만 현실을 무시할 순 없다. 흥행은 결국 경제적으로 투자하는 분들, 이 영화에 종사하는 분들의 의식주가 달린 문제인데. 그분들이 또 재투자해서 영화를 계속 활성화해야 하지 않나. 하지만 작품성 역시, 세계 각국의 영화제에서 인정을 받으면 현찰로 따질 수 없는 부가가치가 어마어마하다고 생각한다. 결국은 작품성이 없으면 흥행도 안되는 것 아닌가 싶다. 물론 특수한 예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건 건드리지 말자. (웃음)
-차기작은 무엇이 있나.
=<범죄의 재구성> 최동훈 감독의 다음 작품에 출연하게 될 것 같다. 자세히 말할 순 없지만 거기서도 또 다른 고수 역할이다. 나는 원래 고수 아니면 안 한다. (웃음) 내년 4월 정도 촬영에 들어갈 것 같다.
-이제는 좀 평범한 역할, 평범한 가장이나 평범한 연인 역할을 맡을 때도 되지 않았나.
=관건은 책이다. 아무리 새로운 역할이라도 시나리오를 어떻게 풀어가느냐에 따라 출연할지 말지를 결정하니까. 캐릭터뿐 아니라 전체적인 완성도가 중요하다. 음, 여배우와 함께하는 영화는… 뭐 조만간 그런 소재들도 나오지 않겠나?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