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한참 전 얘기가 되었지만, 지난 12월3일 베를린에서 열린 제18회 유럽영화상 시상식은 여러 가지로 썰렁한 행사였다. 첫째, 가뜩이나 썰렁한 한겨울, 베를린에서도 더욱 썰렁한 트렙토우라는 지역에 있는, 엄청 썰렁한 경기장에서 행사를 개최한 데다 영화 관련 행사에 빠질 수 없는 ‘스타’들의 광채라곤 찾을 수 없었다. 국제급 스타라면 숀 코너리가 유일했는데, 이날 평생공로상을 수상하기 위해 베를린을 찾은 코너리는(다니엘 오테이유, 조지 클루니 등 다른 수상자들은 불참) 시종일관 마지못해 이곳에 앉아 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코너리의 표정을 십분 이해가고도 남는 것이, 올해로 18회를 맞는 행사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넘쳐나는 진행 사고와 김빠진 개그, 그런 분위기로 3시간 이상을 버티다가 17개 부문 시상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날의 스타, 아니 영웅은 탄생했다. 오스트리아 감독 미카엘 하네케. 하네케는 올해 칸 감독상 수상작인 심리극 <히든>으로 한때 ‘펠릭스’라고 불렸던, 그러나 지금은 무명인 트로피 5개를 거머쥐었다(물론 유럽영화상을 수여하는 유럽영화아카데미는 이 트로피가 ‘유럽의 오스카’라는 닉네임으로 불리기를 내심 희망하고 있다). <히든>이 챙긴 부문은 최고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편집상에 비평가상이다. 사실 이 작품은 칸에서 황금종려상 수상이 확실시되었지만, 다르덴 형제에게 이를 빼앗기는 바람에 하네케 감독의 심기가 매우 불편했다는 말이 있었다.
독일인들이 수상 결과를 두고 “칸의 오류가 베를린에서 정정되었다”고 자화자찬하는 반면, 무대에 오른 하네케 감독의 반응은 쿨하다 못해 ‘썰렁’했다. “물론 기쁘지 않을 리 없지만, 이미 칸에서 감독상과 비평가 상을 받아서 그런지 꼭 리바이벌하는 기분”이라는 수상 소감.
올해 <히든>의 싹쓸이로 유럽영화상에서 독일 퍼레이드는 끝났다는 말도 있다. 독일은 <굿바이 레닌>으로, 지난해에는 파티 아킨의 <미치고 싶을 때>로 2년 연속 최고작품상과 주요 부문상을 독점해왔다. 그러나 올해는 빔 벤더스 감독의 <돈 컴 노킹>으로 촬영상, 마크 로테문트 감독의 <소피 숄-마지막 날들>로 여우주연상(율리아 옌치)에 만족해야 했다.
이날 썰렁함의 하이라이트는 빔 벤더스 감독 등 아카데미 회원들이 직접 요리해 손님들을 대접했다는 사실이다. 빈약한 예산으로 인한 고육지책이었는지, 보통 사람들은 따라 웃기 힘든 그들만의 개그였는지는 몰라도, 벤더스 & Co. 주방팀의 활약으로 행사진행은 더욱더 늘어지고 말았다.
폴커 슐뢴도르프 감독, 디이터 코슬릭 베를린영화제 위원장, 정치인 등 독일 인사가 대거 참석했지만, 결국 ‘유럽영화상’이라는 타이틀에 미치지 못한 채 독일영화 집안잔치로 끝나버린 행사였다. 내년에는 타이틀에 걸맞은 국제성을 갖출지도 모르겠다. 2006년 유럽영화상은 폴란드의 바르샤바에서 개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