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목구멍에 걸린 성…되훑어본 미국의 속살, <인사이드 딥 스로트>
2006-01-12
글 : 임인택
30여년 전에 미국 전역을 최초 극장 상영 포르노 <딥 스로트>의 한 장면. 남녀 주연을 맡은 해리 림스와 린다 러브페이스.

아내와 함께 뉴욕에서 미용실을 꾸리던 미용사 제라드 다미아노는 아줌마 고객들의 남편과 성생활 따위에 대한 불만을 날것 그대로 듣는다. 결국 그는 1969년 하드코어 영화 감독으로 나서고, 72년 희대의 <목구멍 깊숙이(딥 스로트)>를 찍는다. 미국 최초로 극장 개봉한 포르노 영화다.

흥행 돌풍이 이어질수록 미국 사회의 미성숙한 담론들이 고구마 줄기처럼 엮여 나왔다. 영화는 포르노 논쟁을 극단으로 모는 도화선이었다. 주류 보수들에겐 재앙, 금기 본위의 사회에 질린 이들에겐 혁명이었다.

12일 개봉하는 <인사이드 딥 스로트>는 <딥 스로트>의 문화적 파급력을 되짚고 30여년을 아우르는 영화적 의미의 전말을 숙고하는 다큐멘터리다.

반대와 옹호 사이=성적 에너지가 가득한 여성, 린다는 도무지 ‘만족’이란 걸 맛볼 수 없다. 의사를 찾았더니 음핵(클리토리스)이 목구멍에 있단다. “없는 것보단 낫다”며 시답지 않게 진단하는 의사에게 “당신 고환이 귀에 달리면 좋겠냐”고 따져묻지만, 린다는 곧 의사의 훌륭한 처방(?)으로 무기력한 삶에서 벗어난다.

이런 소재와 음란성을 두고, 당시 남자 주연 배우 해리 림스에게 5년형을 구형한 래리 패리쉬 검사처럼 “가장 말초적인 인간의 감정을 공략”하는 너절한 포르노란 인식과 ‘반항’의 고갱이,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란 인식이 팽팽히 맞섰다. “집에 헛간이 있거든, 우리 쇼하자(포르노 영화 찍자)”는 말이 있을 만큼 포르노 영화 제작이 흔하던 70년대 초, 영화는 좀더 자극적이고 기발한 것에 대한 욕망을 반영했고, 남성의 오르가슴만큼이나 여성의 오르가슴도 중요하고 질 쾌감보다 음핵 쾌감이 더 유효하다는 또 다른 욕망을 자극하며 폭발적 호응을 샀다.

당시 감독 제라드 다미아노

<딥 스로트> 대 ‘딥 스로트’=<딥 스로트>는 무엇보다 시의적절했다. 베트남 전쟁으로 급격히 지쳐가던 미국. 반전이나 인권 신장에 대한 기운, 기성 세대의 부패와 위선에 대한 환멸 따위가 뒤섞이던 때였다. 68년 포르노의 유해성을 과학적으로 검증하겠다며 미국은 과학위원회를 발족시켰지만 오랜 연구 결과는 반대였다. 닉슨 당시 미 대통령은 보고서 발표를 막는다. 그러곤 중산층의 오락으로 포르노를 업그레이드시킨 <딥 스로트>가 출현했다. 닉슨은 “내가 백악관에 있는 한 악을 뿌리뽑겠다는 국가적 노력은 계속될 것”이라며 마침내 73년 음란규제법을 통과시키지만, 그해 그는 영화 이름을 딴 내부 고발자, ‘딥 스로트’에 의해 워터게이트 사건이 폭로되어 함께 파멸한다. 일면 정부가 계속 뉴스를 만들거나 사고를 치며 <딥 스로트>를 홍보해준 셈인데 결국 ‘딥 스로트’에 의해 나락으로 떨어진 것이다.

<인사이드 딥 스로트> 대 <딥 스로트>=<딥 스로트>의 사회적 파장은 수치로도 충분히 가늠된다. 6일 동안 2만5천달러를 들여 만든 속성 영화는 2002년까지 6억 달러를 벌어들였다. <타이타닉> 수익률의 2500배에 이르는, 영화 사상 가장 성공적인 작품이다. 그 시대를 관통했던 다미아노 감독, 주연 배우였던 린다, 해리를 포함, 주변 인물과 명사들을 <인사이드…>는 바지런히 취재해 모은 800시간의 방대한 양 가운데 92분만 솎아냈다. 속도감 있게 시대를 거슬러 올라간다. 익살스럽고도 긴장감 있는 배치로 <딥 스로트>를 배회했던 담론들을 맞세운다. 존 린지 뉴욕 시장이 선거 운동용으로 <딥 스로트>를 타겟화(영화가 처음 공론화된 결정적 배경이다)한 것이나 정부가 본보기 삼아 해리를 잡아들인 것, 포르노에 반대하는 여성주의자들이 린다를 주구로 이용한 것, 지하 폭력조직이 영화 수익을 위해 살인까지 저질렀던 것에 견주면 영화 속 욕망이 차라리 순수하고 정직하다. 에이치비오(HBO) 다큐멘터리가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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