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구정 무렵 찾아갔던 <청연>의 목포 촬영현장에는 붐마이크를 손에 쥐고 현장을 뛰어다니던 인상좋은 녹음기사가 있었다. 더욱 눈길을 끈 것은 녹음이 필요없던 밤 촬영에도 끝까지 남아서 조명부를 도와주던 따뜻한 그의 손길이었다. 그러한 적극적인 태도 때문에 “기사면 기사답게 행동하라”는 핀잔도 많이 들었던 이 남자는 <청연>의 현장녹음기사 은희수씨다. “<청연>은 여러 가지 새로운 시도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직접 붐마이크를 잡고 작업하기로 결심했다. 고민 끝에 윤종찬 감독님께 상의하자, ‘은 기사가 제일 나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하라’고 흔쾌히 수락했다”며 속사정을 설명했다. 1970년생 은희수씨는 대학입시에 거듭 낙방하고 친척의 회유와 부탁으로 전문대 환경관리학과에 입학했다. 졸업 뒤 환경기사로 1년간 직장 생활을 했지만 그는 영화에 대한 짝사랑을 떨치지 못했다. 결국 1999년 3월 한겨레 영화제작학교 9기로 수강했고, 이후 영화아카데미 진학을 고민하던 은희수에게 재수 시절 단짝이던 사운드퍼퓸 나상인 대표가 녹음 작업을 권했다. 당시 사운드퍼퓸은 독립영화들의 녹음을 도맡다시피 했다. 그가 “붐마이크를 처음 잡은 영화는 김경형 감독의 <숲>”이다. 강원도 산간에서 겨울에 촬영한 <숲>에서 그는 허리까지 차는 눈 속에 맨발로 들어가 머리 위에 녹음기를 얹고 작업했다. 그럼에도 “고기를 구워먹고 별을 보며 호사했다”는 소감은 그의 소탈하고 낙천적인 성격을 짐작하도록 한다. 당시 은희수씨는 스튜디오에서 먹고 자면서 눈만 뜨면 붐마이크를 쥐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단편의 제작환경상 녹음기사를 유난히 구하기 어려웠던 요소는 그가 신나게 뛰어놀 수 있는 좋은 무대가 됐다. 그는 “2년 반 동안 족히 100편 이상”을 작업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는 노동석 감독의 단편 <10번 타자>였다. 그가 처음으로 혼자 믹싱까지 마무리한 <10번 타자>는 “시간을 쪼개 밤을 새워 믹싱을 마치면 우유배달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들른 노 감독이 슬그머니 내밀던 우유를 마시던 추억”으로 남았다. 은희수는 지금도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강조한다.
이러한 독립영화계의 인연은 그를 충무로로 인도했다. 단편을 함께 작업한 윤홍식 촬영기사의 추천으로 그는 도제시스템을 거치지 않고 <집으로…>의 녹음기사로 입봉한다. 데뷔작 <집으로…>에 대해서는 “장비를 조금 보강했을 뿐 단편 현장에서 하던 대로 준비했다. 작품 성격이 일반 상업영화와는 다른 면이 많아서 자연스럽게 작업했다”고 말했다. 겨울이 배경인 영화를 여름에 찍는 바람에 아쉬움이 많이 남은 <해피 에로 크리스마스>와 교보빌딩 앞, 부산 남포동, 해운대 CGV처럼 구경꾼이 1천명 단위로 몰려오는 공간에서 작업한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를 거쳐 그는 대장정 <청연>에 몸을 싣는다. 붐마이크를 직접 잡는 상황을 고려해 ‘인이어 모니터’라는 장비를 준비했다. ‘인이어 모니터’는 붐마이크를 든 상태로 녹음 상태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세트 촬영 때마다 사운드 블랭킷(소리 이불, 흡음제)을 앵글에 걸리지 않는 범위에서 꼼꼼히 부착했던 노력은 취조실과 고문실에서의 만족할 만한 녹음으로 보답받았다. 볏짚을 몇 트럭이나 조달해서 새끼를 꼬으며 빗소리를 최소화했던 노력도 관제탑 내에서 이정희(한지민)가 모스를 보내고 기베(유민)가 화를 내는 장면에서 또렷한 여성들의 목소리로 빛을 발했다. 술집에서 들리는 주변음도 평범한 라이브러리의 소리를 쓰지 않고 연출부가 별도의 대사를 준비하여 일본인 단역들을 동원해서 개별적으로 녹음했다. 촬영 후 시간이 오래 지나면 일본 배우들이 감정선을 회복하기 어려운 프로덕션 상황을 감안해 현지촬영 도중에 틈틈이 중국 호텔방에서 후시녹음도 진행했다. <청연>은 그에게 “다양한 시도와 가장 많은 교훈을 남긴 프로젝트”이며 동시에 “거대한 독립영화를 한다는 자유로운 마음으로 내 방식의 녹음을 찾아갔던 영화”로 기억될 것이다.
은희수씨는 “붐맨은 현장에서 배우와 가장 가까이 있는 존재다. 화면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유일하게 앵글 안에 들어서는 사람”이라 칭하며 “현장에서 비주얼이 우선할수록 녹음은 기술적인 측면으로 흐르기 쉽다. 그럴수록 혼자 반복해서 작품을 다각도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한다. “동시녹음이 무조건 최선이며, 후시녹음은 무조건 차선이라는 사고는 잘못된 고정관념”이라거나 “동시녹음이라는 통념적인 명칭보다 현장녹음이라는 광범위한 용어가 적합하다”고 조용히 지적하는 은희수 녹음기사는 임상수 감독의 신작 <오래된 정원>에 참여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