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은 배우라는 꽃에 생명을 불어넣는 주문이다. 세상의 배우들은 누군가가 이름을 불러주어야만, 이름을 기억해주어야만, 비로소 숨을 간직한 채 피어난다. 그래서 누구도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 세상의 배우들은 그리도 쉽게 벚꽃처럼 진다. 현빈은 운을 타고난 꽃이다. 현빈, 강국이, 삼식이. 지난 3년의 짧은 연기 생활을 거치며 모두가 불러주고 기억하는 세개의 이름을 얻었으니 말이다. 첫 이름은 강국이었다. 드라마 <아일랜드>는 인정옥 작가가 직조한 마법 같은 경구들로 넘쳤지만, 말없는 보디가드 강국이 무심히 던지는 경구들은 특히나 음미할 만했다. “내 직업이 경호원이니까 내가 지켜줄게요.” “처음에는 불쌍해서 좋았는데 지금은 좋아서 불쌍합니다.” 사람들은 강국이의 입으로 뱉어지는 대사들을 외우고 또 외워댔다. 7개월 만에 다시 출연한 두 번째 드라마는 현빈에게 강국보다 더 큰 이름을 지어주었다. “당신이 5천만원보다 더 좋다”고 고백하는 남자, 삼식이었다.
현빈이 새롭게 얻게 될 이름은 <백만장자의 첫사랑>의 재경이다. 재경은 백만장자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는 조건으로 시골학교로 전입했다가 촌뜨기 소녀와 사랑에 빠지는 고등학생이다. 이 무례하고 차가운 가면을 쓴 로맨티스트는 어디선가 많이 본 듯도 하다.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재경이는 어쩌면 강국이와 삼식이를 하나로 합쳐놓은 남자는 아니냐고. “그런 질문 나올 것 같았다. (웃음) 사람들은 또 삼식이의 연장선 아니냐고들 한다. 삼식이의 연장선은 하지 말라고들 한다. 물론 스스로도 <백만장자의 첫사랑>을 설명하면서 손쉽게 ‘삼식이의 업그레이드판’이라고 말할 때가 있다. 하지만 삼식이와 재경이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 김태균 감독님, <파리의 연인>의 김은숙 작가. 항상 함께 일해보고 싶었던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있는 작품이다. 이 사람들과 작업한다면, 혹여나 내 캐릭터에 삼식이와 비슷한 점이 있다손 치더라도 전혀 다른 인물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나 역시도 다르게 연기하고 싶었고, 지금은 다르다고 확신한다.”
언젠가 현빈은 자신이 만든 분신들과 자신을 만든 이름들을 완벽하게 넘어서기로 마음먹을 것이다. “지금까지 연기했던 인물들. 강국이, 진헌이(삼식이), <논스톱4>의 현빈, 그리고 <백만장자의 첫사랑>의 재경이. 모두 내 안에 있는 것들을 끌어내고 깎아내서 만든 캐릭터다. 이제부터는 내 안에 있는 것들을 잊어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인물을 창조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 그러나 스크린과 TV 앞의 수줍은 연인들이 벌써부터 조급해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백만장자의 첫사랑>이 ‘모두의 연인’인 현빈을 볼 수 있는 마지막 영화가 되지는 않을 테니까. 현빈은 나이에 걸맞지 않을 정도로 느긋한 남자다. 빠르게 변하기보다는 서서히 허물을 벗어가려 한다. “급하게 변하고 싶지는 않다. 갑자기 전혀 다른 역할로 뛰어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연습하고 준비가 되기를 기다리면서 변하고 싶다. 물론 사람은 변한다. 나도 변한다. 하지만 느리게, 느리게, 조금 느리게 가고 싶다. 그래서 나보다 더 급히 변해가는 내 주변을 볼 때마다, 부모님과 싸우면서 연극을 시작했던 옛날을 돌아보곤 한다.”
온화하고 유해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현빈은 전쟁처럼 연기를 시작한 배우다. 그가 연극이라는 계시를 만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한번 뭔가에 빠지면 결코 헤어날 수 없는 질풍노도의 나이였고, 경찰대학교를 선망하던 아들이 연극을 시작하자 부모님은 전쟁을 선언했다. 학원에 간다고 속이고 연습실에 드나들기를 2년,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며 부모님은 끝내 현빈의 고집에 두손을 드셨다. “합의를 본 거다. (웃음) 그때부터 부모님은 중앙대 연영과가 좋다더라며, 거기에 가겠다는 목표를 세운다면 지원을 해주겠노라고 하셨다. 그래서 2년 내내 멀리하던 공부를 2학년 2학기가 되어서야 시작했다. 학교에 들어가야만 부모님의 축복을 받으며 연기할 수 있다면, 해야만 했다. 하게 되더라.” 그는 결국 운이 좋아서 여기까지 굴러왔노라 회고하지만, 세상에 운으로만 되는 것이 있을 리는 없다. 그가 사람들로부터 받은 이름들은 “다른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연기가 하고 싶어서” 모든 것을 시작한 소년의 고집으로부터 왔을 것이다.
“학교도 다니고 연기도 하고,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게 너무 힘들다. 학교에 다녀도 배우는 게 많을 것이고, 현장에서 배우는 것들도 많다. 솔직히 말하자면, 연기자가 되기 위해 들어간 곳이 학교니까 지금은 현장을 조금 더 우선시하고 싶다.” 지금 세상에서 가장 바쁜 배우 중 한명인 현빈은 “그래도 내 아이들을 위해서 졸업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넌지시 농담처럼 건네더니 “<백만장자의 첫사랑>을 마치자마자 어디론가 오랫동안 여행을 떠나고 싶다”고 말한다. 이런 태평한 남자가 있나. 그러고보니 현빈에게는 삼식이와 강국이와 재경이 말고도 또 하나의 이름이 있다. 부모님이 처음으로 불러주신 이름. ‘김태평’이다. 26살의 배우 현빈에게, 지금은 그저 태평하게 걸어가도 좋을 시절인 듯하다. 처음으로 불렸던 그 이름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