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지강혁과 교도소 부소장의 대립 - 영화를 위해 창조한 허구의 ‘공권력’
“니가 아무리 날뛰어도 내 손바닥 안이야! 너희는 나라가 인정한 쓰레기들이구, 난 대한민국 국가 공무원이거든. 공권력은 언제나 신성하고 존중받아야 하는 거란 말야, 새끼야!(김안석의 대사)”
지강혁(이성재)은 빈 차나 털어 겨우 먹고 사는 잡범이다. 그가 사는 곳은 판자촌이다. 그런데 올림픽이 열리면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마을은 강제 철거되기 직전이다. 용역 깡패와 주민들의 대치 중에 강혁을 따르는 마을 동생이 깡패 우두머리 김안석(최민수)의 총에 죽자, 강혁은 김안석에게 덤벼들다 도리어 교도소에 가는 신세가 된다. 게다가 강혁이 갇혀 있는 교도소에 어느 날 부소장이 부임하는데 그가 바로 김안석이다. 안석을 죽이려는 강혁의 계획은 번번이 실패하고, 안석은 더욱더 강혁을 괴롭힌다. 결국 강혁은 같은 감방 동료들과 탈주 계획을 세워 이감 도중 실행하지만, 마침내 탈주의 끝에서 경찰과 대치하게 되고, “죄 지어도 돈 있으면 무죄! 죄 없어도 돈 없으면 유죄! 그게 우리 대한민국의 좆 같은 법이다”라고 외친다.
실제 사건을 영화로 옮기며 <홀리데이>가 추가한 허구의 방점 또는 사회체계와의 중요한 접점을 요약하자면, 올림픽 게임, 보호감호법, 그리고 가공의 인물 김안석 이 세 가지다. 지강헌 사건이 올림픽 직후 일어났다는 사실을 감안하여 주인공 지강혁의 거처를 강제 철거당하는 판자촌으로 설정했으며, 죄질에 비해 터무니없이 가혹한 형량을 부여했던 보호감호법에 대해서는 무리하게 영화적 리듬을 깨면서까지 영화 속 인물들이 수시로 그 악용을 한탄한다. 그리고 탈주범들의 인간적 면모를 부각시키기 위해 악법보다 더 사악한 가공의 인간 김안석을 등장시켜 지강혁-김안석의 대립 관계로 드라마의 축을 새로 짠다.
올림픽 게임, 보호감호법, 김안석. 영화의 논리를 따를 경우 이것을 묶는 하나의 이름은 ‘국가의 공권력’이다. 때문에 지강혁 일당과 김안석의 대립은 힘없는 민초와 슈퍼 공권력의 대립으로, 피해받은 국민과 나쁜 국가의 의인화로 그려진다. 그럼으로써 영화는 건국 이래 최대의 인질극이라고 기억됐던 희대의 범죄자들을 시대가 낳은 슬픈 희생양으로 수정해 구제하려고 한다. 곧잘 인물들이 “대머리 아저씨” 운운하거나, 연희동을 찾아가 전두환에게 호소하는 강혁의 장면을 넣은 것도 이 탈주극보다 더한 범죄가 무엇이었는지 묻고 싶다는 무리한 제스처에 기인한 것이다. 이 영화의 진심은 오히려 그런 영화적 무리수에서 엿보인다. 한마디로 영화는 지강혁을 통해 지강헌 사건을 구제하고 재해석하려는 구석이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안타깝게도 다른 차원의 문제가 있다.
4. <실미도>와 <홀리데이>가 비슷해보이는 이유 - 영화가 말하려 한 것 혹은 놓친 것
“누구나 행복해질 권리가 있고, 다 인간답게 살아야 하는데, 사회가 그 사람들을 어떻게 봤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폭이 넓은 사회가 되었으면 하고, 개인의 행복이 짓밟히지 않는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양윤호)”
양윤호 감독은 “사건을 해석하거나 정의하기보다 인물들 속에서 그 사건을 이해하려 애썼다”고 밝힌다. 그러나 <홀리데이>는 이미 몇 가지를 통해 지강헌 사건에 대해 일정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영화의 논리대로라면, 그들은 국가가 망쳐놓은 사람들이고, 죄인이 아닐 수도 있었던 죄인들이다. 그런 재평가는 이미 기존의 평가와 질서에 반대하는 의견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 해석이 없다거나 정의가 내려져 있지 않다는 감독의 말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홀리데이>는 이미 벌어진 실제의 악몽을 가정법으로 되쫓는 영화다. 사회의 기준이 평등했다면 그들은 가혹한 수인이 되지 않았을 것이고, 탈주도 없었을 것이며, 유혈극도 없었을 것이라는 일종의 연쇄 가정법이 영화에는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가 실미도 사건을 영화화한 <실미도>를 상기시킨다고 말한다면 과연 몇이나 그 연관을 부인할 수 있을 것인가. 또는 이 영화의 전개 방식이 <실미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틀린 말이 될 것인가. 실미도의 대원들과 지강헌 일파는 유사한 처지에 놓인 인간들이다. 두 영화 모두 국가의 논리에 의해 가혹한 상황에 몰렸던 자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에 초점을 맞춰 만들어졌다. ‘끌려들어가 감금당하기, 탈주하여 자폭하기’라는 플롯을 이 두 영화가 동일하게 공유한다는 것은 그런 점에서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물론 이것은 사회가 요구한 영화의 플롯이다. 그러나 이 플롯을 통해 영화가 기존의 사회에 대해 다시 어떤 부당함을 제기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다. <실미도>가 그랬듯이 <홀리데이>도 마찬가지 지점에서 착오를 겪는데, 나쁘고 힘센 공동체(국가권력)에 불쌍하고 힘없는 공동체(탈주범들)를 대립시켜 그 나쁜 공동체의 잘못을 부각시키고, 불쌍한 공동체에 대한 인식을 바꾸려고 할 때 벌어진다. 더러는 불쌍한 희생양의 공동체에 감정의 결을 내어주는 그 방식 때문에 생긴다. <홀리데이>는 탈주범들의 동료애를 소중하게 다룬다. 그것이 물론 탈주범들의 애환을 다루는 방식일 수는 있다. 이게 지강헌 사건이 아니라면 성향에 따라 취사선택할 수도 있는 문제다. 그러나 그 지나친 동료애가 애초 영화가 선언했던 사회의 공평성을 환기시키는 작업을 희석했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때문에 완성된 <홀리데이>는 지강헌 사건을 지금 여기에서 다시 영화화한 계기를 설득시키기보다, 다소 낡은 방식의 인간적 드라마에 더 치중되어 있다. 탈주범들이 하나 둘씩 죽어갈 때 우는 것은 사회의 잘못에 대해서 우는 게 아니라 사나이들의 최후에 대해서 우는 것처럼 보인다. 1988년, <상계동 올림픽>이라는 한편의 짧은 다큐멘터리가 있었고, 사람들은 그걸 보고 울었는데, 그 이유는 좀 달랐다.
김안석 역의 최민수, 그 시대를 말하다
“얼마나 아이러니한 시대였겠어요? 그 시절이”
<홀리데이>에서 최민수는 ‘공권력’으로 대변되는 악랄한 교도소 부소장 역할을 자임했다. 더 악한처럼 보이려고 사전 예고도 없이 생니에 금을 갈아 끼워넣고 현장에 나타나기까지 했다. 그가 지금 영화 속 지강헌의 시대에 대해 말한다. 이하는 <홀리데이> 메이킹 인터뷰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노태우 정권 때는 냄새나는 근원이 있으면 그걸 맨홀 뚜껑 덮듯이 했어요. 가난한 사람들, 판자촌 사람들의 권리나 권한은 전혀 보장받을 수 없었던 시대였죠. 단지 이유는 하나. 외국인이 볼 때 거슬린다는 거죠. 한국은 아름답게 보여야 하고, 항상 깨끗하게 보여야 하고, 선진국으로 도약해야 할 그런 나라이기 때문에 너희 같은 애들은 이 나라에 있을 수 없다. 얼마나 아이러니한 시대였겠어요? 그 시절이 얼마나 웃기는…. 그런데 그게 너무 자연스러웠던 거예요. 그때 지강헌이라는 인물이 그 시대의 아픔을 많이 갖고 있었겠죠. 그냥 돌출된 사건이었다면 별로 관심이 없었겠만 그 시대의 아픔을 직접 공감했던 거죠. 아, 우리 그때 시대에 살았구나. 그때 지강헌 사건이 사회적으로 굉장히 큰 이슈가 됐어요. 그래서 거의 17년이 지난 후에 그때 표현하지 못했던 부분이 무엇이었을까, 다시 한번 역사를 재평가하고 재조명해서 영화로 표현되는 거죠.
제가 볼 때 지강헌(극중 지강혁)이라는 인물은 절대 영웅이 아닙니다. 절대 아니에요. 나쁜 애예요. 강도짓도 했고. 단지 정체성이 뭔지 알고 싶었던 거겠죠. 이건 아니다 라고 소리지르고 싶었을 테니까. 우리는 그 사건현장에서 그가 했던 말들을 기억하고 있지 않습니까? 본인이 원하든 원치 않든간에 표현을 했단 말이죠. 더 깊이 들어가자면 안석이라는 인물은 지강혁과 거의 동질성의 인물이라고 봅니다. 한쪽은 줄을 잘 서서 권력층으로 갔고, 한쪽은 줄을 못 서서 시대 낙오자가 된 거죠. 왜? 너무 비슷하기 때문에 서로 약점을 잘 알아서 “너는 좀 없어졌으면 좋겠다”라고 하는 거. 뭐 좀 다른 각도로 얘기했지만, 한쪽은 이랬고, 또 한쪽은 이랬구나. 그 인물들이 만난 거구나. 나름대로 그런 청사진을 깔아놓고 영화를 대한다면 보는 재미가 좀더 있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