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리라>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영화의 지루한 반복 같았다. 그러나 그건 오판이었다. 장례의식을 찍으러 시골 마을을 찾은 주인공에게 기대했던 죽음은 일어나지 않는데, 하릴없이 몇주를 보낸 뒤 그는 죽음 대신 삶을 발견했음을 깨닫는다. 주인공과 대화를 나누는 대부분의 상대방과 죽음에 임한 할머니의 얼굴을 볼 수 없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는 눈은 있으나 보질 못하는 맹인과 다름없다. 그러니 주인공과 관객에게 주어지는 몇주와 2시간은 삶에 눈뜨기 위한 시간이다. <바람이…>는 노인의 지혜가 나이에서 오는 게 아니라 삶을 대하는 자세에서 나온다고 말하는 듯하다. 키아로스타미는 사진집 <바람이 또 나를 데려가리>에 ‘나 여기 왔네 바람에 실려. 여름의 첫날. 바람이 또 나를 데려가리. 가을의 마지막 날’이라고 써놓았다. 영화는 그에 더해 할머니가 태어나기 전, 마을이 세워지기 전, 거목이 싹을 틔우기 전, 시가 흘러나오고 바람이 불던 시원의 공간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영화가 100살을 맞은 1990년대를 기억하면 <펄프 픽션>과 <타이타닉>을 떠올리곤 한다. 그러나 영화 속 삶이 갈수록 뻔뻔해지고 죽음은 쉽게 다루어지는 이 시대에, 낯선 방식으로 삶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바람이…>야말로 1990년대의 진정한 대표작이자 새로운 영화세기의 시작이란 생각이다(장 루이 뢰트라와 수잔 리앙드라 기그는 <영화를 생각하다>에서 오아시스로 데려갈 20명의 감독과 30편의 영화에 <바람이…>를 포함시켰다). DVD는 부록으로 포토 갤러리(사진)를 이어붙인 예고편을 수록했다.
씨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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