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자리에서 조금만 유치해지면 나는 영화 배우 얘기를 늘어놓는다. <킹콩>에서 나오미 와츠 죽이지 않든? 그래. 머홀랜드 드라이브 때부터 예사롭지 않더라. 아네트 베닝의 젊은 시절을 보는 것 같아. 에이, 아니다. <러브 어패어>에서의 그녀를 따라갈 수는 없지. <이터널 선샤인>의 케이트 윈슬렛은? 그렇게 팔뚝 굵고 매력적으로 보인 여배우는 처음이야. 맞아, 맞아. 주절 주절…. 마치 헤어진 여자 친구를 회상하듯이 이야기가 꼬리를 물고 계속되다보면, 궁극적으로 나는 세 명의 여배우를 거론하는 것으로 그 주제의 신선함을 떨어뜨리는 치기를 재탕한다. <카사블랑카>의 잉그리드 버그만.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의 셜리 맥클레인. 그리고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오드리 햅번. 이미 여러 번 들어온터라 지인들은 별 관심도 없는데 나 혼자 잔뜩 감상에 빠져 이 세 여배우 예찬론을 다시금 늘어놓고 집으로 돌아온다.
술기운이 잔뜩 오른 나는 늘 그랬듯이 손닿기 쉬운 곳에 놓아둔 디브이디를 플레이어에 넣고 텔레비전 앞에 늘어진다. 헨리 맨시니의 꿈결 같은 멜로디가 흘러나오고 지방시의 검은 드레스를 입은 고혹스런 미스 고라이틀리가 티파니 쇼윈도우 앞을 서성인다. 안녕, 미스 고라이틀리. 이젠 거의 나의 일상이 되어버린, 행복한 기분으로 잠을 청하는 방법.
오드리 햅번. 그녀가 헐리우드 역사의 아이콘인 것도, 패션 리더였으며 말년에 아름다운 일을 많이 했다는 것도 내겐 관심사가 아니다. 사실 오랜 세월 그녀의 영화들을 봐오면서도 전혀 여성적 매력을 느끼지 못했고 다른 배우들에 비해 더 특별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다. 그녀보다 예쁘고 섹시한 여배우들은 수없이 많았다. 단지 그녀가 나오는 영화들은 대부분 재미있었다, 는 정도였을 뿐.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그 많은 영화 중에서 <티파니에서…>는 무의식중에 늘 내 곁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 영화의 어떤 게 나를 끌어당기는 것일까. 헨리 맨시니의 음악? 블레이크 에드워즈의 경쾌한 연출? 그 해답은 나중에 의외의 영화를 통해 찾을 수 있었다. <사랑과 영혼> 이란 덜떨어진 흥행작 땜에 묻혀버렸던 스티븐 스필버그의 또다른 걸작 <영혼은 그대 곁에>(1989)에서 나는 노년의 햅번을 만나게 된다. 그녀는 영화에서 불의의 사고로 죽음을 맞은 드레이프스를 인도하는 천사 ‘햅’으로 깜짝 출연하며 자신의 필르모그래피의 마침표를 찍는다. 환갑의 나이로, 여전히 맵씨가 좋은 하얀색 옷으로도 미처 가릴 수 없는 주름살 가득한 얼굴로 환하게 웃으며 햇살을 받고 있는 그녀에게서 나는, 노년 여배우의 처량함이 아니라 신비로운 슬픔같은 걸 느꼈고, 곧 그 얼굴은 오래 전 젖은 눈으로 애처롭게 웃어보이던 미스 고라이틀리로 오버 랩되며 내 마음을 마구 뒤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