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보다 더 인기 있는 예고 영화들이 있다. 최근 <싸움의 기술>이 그랬다. 드물게 7천만원을 들여 만든 <싸움의 기술> 티저 예고편은 리바이스 청바지 광고와 영화 <트레인스포팅>을 패러디해 폭발적인 웃음을 이끌어냈다. 티저편만 무려 300여개관에 내걸렸다. 더 드문 일이었다. 예고 영화를 전문으로 만드는 최승원 감독(29·하하하 필름프로덕션 대표)의 작품이다. 한참 주가가 오르는 그가 올 상반기 손 묶인 작품만도 5편. <구타유발자> <짝패>를 만들고 있고, <청춘만화> <다세포소녀> <아치와씨팍>도 계약된 숙제다.
예고 영화 감독만큼 기만적인 직업이 있을까. 최 감독은 감독인데 마케터라 하고, 한 영화를 수십 차례 보면서도 극장은 좀체 가지 않는다. 심지어 영화는 개봉도 안 했는데, 영화 관계자들은 자신이 만든 예고 영화를 통해 관객수 견적을 뽑는다. “<싸움의 기술> 티저 광고에 대한 반응을 보고서 100만, 본 예고편 때는 50만, 도합 150만명을 예상하더라고요. 거의 맞아 떨어졌죠.”
<접속>(1997년)의 예고 영화(황우현 튜브픽쳐스 대표가 제작)를 1호로, 올해 한국 영화판에 연출 예고 영화가 나온 지 햇수로 10년째가 된다. 90년대 중후반 우리 영화 산업이 폭발할 즈음이었다. 광고를 꽃으로 삼는 자본주의국의 강령 따라, 예고 영화도 맞물린 듯 발전했다.
최 감독이 동국대 연극영화학과 재학 시절 아르바이트로 예고편 제작을 도우며 발을 들인 때다. 잠깐의 외도를 합쳐 이 바닥에서만 뼈를 삭힌 기간이 8~9년이니, 지금 영화업자들 가운데 그를 모르는 이가 드물다.
<카라>를 시작으로 <스캔들> <가족> <썸> <달콤한 인생> <오로라공주> <싸움의 기술> 등 그의 이름이 오른 작품이 숱하다. <러브레터> <밀리언달러 베이비> 등 외화 예고편에도 올라 있다. “마케팅 컨셉을 잡아 기발하게 알리는 게 제일 중요해요.” 대개 작품당 소요되는 2~3달의 대부분이 기획 회의다. 관객 뿐만 아니라 배급자까지 유혹할 수 있는 전략이 쉬이 구해질리 없다.
“안 되는 영화까지 되게 한다”는 이 직업의 본령에서 ‘기만’은 정점에 이른다. 분식은 예사다. 그리고 과학적이다. “누가 재희의 ‘성장 드라마’를 궁금해하겠어요, 작정하고 코믹으로 밀고 나갔죠.”
창작이 가능한 티저편과 달리, 본 예고편 제작은 편집에 의한 재구성에 불과하다. 그러나 최 감독은 이마저도 “연출 같은 편집”이라고 재해석한다. “한 영화로도 수십개의 버전이 나올 수 있다.” <가족>은 예고편 버전만 50여개에 달했고, 대부분 관객들 하마터면 <가족>을 누아르 영화인 줄 알고 볼 뻔했다. 비장하게 그려진 불량 소녀 수애를 강조한 대신, “감정의 흐름에 따라 아버지와 딸이 마치 대화하는 듯한 예고편”으로 바꿨다. 완성된 예고편은 오롯이 사랑을 얘기하는 시가 됐다.
제작사에겐 애초 계획에도 없던 <손님은 왕이다>의 티저편도 얼마 전 완성했다. 최 감독이 제안한 ‘콘티’에 제작사가 매료된 것. 명계남, 성지루, 성현아 등이 주인공인데 “배우는 다 가리고 캐릭터를 살리”면서 영화의 매력을 극대화했다. ‘가려진’ 배우까지 이를 반겼다.
유쾌한 ‘기만’이 거듭될수록 드러나는 건 진실의 힘이다. “영화에 감동이 있다면 코믹 버전으로 소개될지언정 문제가 안되요. 그게 아닐 때 달라지죠.” 그는 영화 감독 데뷔를 목표로 삼는다. 4~5년을 내다보고 있다. 감독보다 더한 “흥행에 대한 부담감”으로 매번 피 마르는 수업을 치르고서, 진실에 가닿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