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리포트]
[현지보고] 리처드 론크레인 감독의 <파이어월> LA 시사기
2006-02-09
글 : 옥혜령 (LA 통신원)

참으로 오랜만에 해리슨 포드 영화를 본다 싶었다. <파이어월>의 정킷 시사회를 다녀와서 천상 해리슨 포드의 영화다,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왜 리처드 론크레인 감독의 영화가 아니라 해리슨 포드의 영화라고 의심의 여지없이 생각했을까에 대해 또 생각했다. 굳이 해리슨 포드가 영화의 기획에서부터 편집까지 참여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정킷을 다니며 감독, 배우, 제작자들과 인터뷰를 하다보면, 사전 정보없이도 이른바 영화의 ‘실세’가 누구인지 눈에 들어온다. ‘누구누구의’ 영화라고 꼬리표가 붙는 대부분의 경우, 감독의 이름이 앞서기 마련이다. 가끔 겉으로 드러내지 않아도 제작자의 포스가 강하게 느껴지는 영화도 있지만, 그만큼의 포스를 지닌 배우는 지금껏 만나지 못했다. 작품 전면에 자신의 아우라를 드리우는 그런 배우. 한때 이소룡이 있었고, 성룡도 건재한데, 톰 크루즈는 아직 약한, 그 정도의 스타 페르소나를 이야기하자면 해리슨 포드를 빠뜨릴 수가 없다. 적어도 <인디아나 존스>를 보며 자란 내 세대에게는 그렇다. <파이어월>은 2006년으로 데뷔 40주년을 맞이하는 해리슨 포드의 39번째 영화다. 그중 11편이 넘는 영화를 1천억달러 이상의 박스오피스 기록에 올린 이 아메리칸 히어로의 전형이 어느새 예순셋의 노신사가 되었다. <파이어월>은 해리슨 포드의 영화이긴 하되 ‘나이 든’ 해리슨 포드의 영화다.

금융보안 전문가와 해커의 죽음의 대결

그래서 해리슨 포드가 맡은 잭 스탠필드, 은행 컴퓨터 시스템의 보안 책임자로서 안정된 직장과 단란한 가족을 지닌 전형적인 미국 중산층 가장의 모험담은 더 이상 젊은 시절 인디아나 존스의 모험담처럼 신나고 흥미진진하기만한 롤러코스터가 아니다. 온라인 뱅킹과 은행 거래를 모두 총괄하는 컴퓨터 시스템의 보안 시스템을 직접 설치하고 감독해 은행을 보호하는 직업을 가진 잭에게, 어느 날 은행이 아닌 가족을 보호해야 하는 상황에 빠진다. 해리슨 포드가 밝히듯 “처음부터 영웅이라기보다는 평범한 사람이 뜻하지 않은 위기에 몰리게 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필사의 액션을 취하는” 낯익은 해리슨 포드 영화의 캐릭터다. 잭을 평범하지 않은 ‘어느 날’로 몰아넣는 것은 그를 이용해 은행 컴퓨터의 보안 시스템을 해킹해 거액을 훔치고자 하는 이른바 전자 범죄단. <마스터 앤 커맨더스>의 폴 비트니가 냉정하고 깐깐한 최첨단의 범죄자, 빌 콕스로 노회한 해리슨 포드와 대적한다.

<파이어월>이 흥미로운 지점은 감시 카메라, 온라인 뱅킹, 보안 시스템, 아이팟에 이르는 컴퓨터 테크놀로지를 영화의 화두로 삼고 있는 부분. 우리가 철석같이 의지하는 이 시대의 테크놀로지가 어느 순간 종이 조각처럼 부서져 내릴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해 그 자신 테크놀로지광이기도 한 리처드 론크레인 감독은 “영화 작업 동안 전자 범죄를 너무 열심히 공부한 나머지 실제로 마음만 먹으면 은행을 터는 게 그렇게 어렵지 않겠더라”며 “만약 이후에 다른 작품 섭외가 안 들어오면 나부터 한번 해볼까 할 정도”였다고 말한다. 결국 아이덴티티 도용, 몰래 카메라를 통한 사행활 노출, 컴퓨터 해킹 등 이 시대의 범죄 앞에 ‘방어막’을 구축하는 것은 평범한 아버지의 힘 혹은 나이 든 해리슨 포드의 몸이다. 현란한 액션과 눈길을 끄는 화려한 특수효과는 없지만 <파이어월>은 스릴러와 누아르 장르에 방점을 두고 만들어진 영화답게 방어막이 무너지고 다시 쌓이는 과정을 시애틀의 추적거리는 빗속에 밟아간다. 기대하는 마지막 액션신에서 해리슨 포드의 몸이 너무 연약하게 느껴진다면, 그건 배우의 탓이 아니다. 방어막이 무너진 잭에게 해리슨 포드의 싸움 실력은 너무 지나치게 뛰어나다고 판단한 스턴트 코디네이터 팀의 조율 탓이다. 잭의 아내를 연기한 버지니아 메드슨도 해리슨 포드의 눈부시게 빠른 몸놀림에 감탄했음을 거듭 강조하는 걸 보면, 포드가 늘 주장하듯 ‘나이가 아니라 마일리지’임은 분명한 사실인가보다.

해리슨 포드 인터뷰

“몸으로 하는 연기를 좋아한다”

해리슨 포드는 예상보다 훨씬 키가 크고, 나이가 들었으며, 수줍다 싶을 정도로 말수가 적고, 군더더기없는 짧고 간결한 대답을 무심히 하는 점잖은 초로의 신사였다.

-영화의 기획 단계부터 다방면으로 참여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당신의 역할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나.
=흠. (약간의 한숨). 프로듀서가 이번 프로젝트를 가져왔고 내가 시작한 건 아니다. 내가 관여하기 시작했을 때 스크립트가 이미 있었고, 이건 쓸 만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도 역시 괜찮은 스크립트라 생각했고, 그냥 그렇게 일이 됐다. 감독과 배우 섭외 같은 것도 함께했고. 이번 영화는 특히 길어서 일년 반 정도 작업했다.

-스크립트를 처음 봤을 때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나.
=괜찮은 스크립트이며, 관객이 즐길 수 있는 스토리라고 생각했다. 드라마틱하고 정서적인 효과가 있고 엔터네이닝하다.

-영화 작업의 어떤 부분을 좋아하는가.
=과정. 나는 뭔가를 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I’d like to do things). 종이 위의 활자를 스크린의 이미지로 완성하는 그 과정을 좋아한다. 영화를 완성하기 위해 필요한 아이디어를 구상해내고 실현하는 것. 그 모든 노력의 결과인 작품 그 자체도 물론이고.

-스턴트를 직접 했다고 하던데, 몸놀림이 상당히 빨라서 다들 놀랐다는 말을 들었다.
=지금까지 내가 해오던 일이니까 특별할 건 없다. 몸으로 하는 연기를 좋아한다. 또 댄스처럼 액션신도 미리 안무할 수 있으니까 내 나이에 맞게 안전하고 ‘효과적인’ 액션신을 만든 뒤 실행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내가 모든 스턴트를 다 하는 건 아니다. 내가 ‘육체적 연기’라고 부르는 달리기, 점프, 낙하, 때리기, 맞기, 정도만 한다. 말에서 탱크로 뛰어 탄다든지 하는 위험한 스턴트를 도박삼아 직접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안전장치와 전문가가 준비되었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한다.

-컴퓨터 전문가역을 맡았는데, 실제로 테크놀로지에 관심이 많은가. 또 그 역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것이 있는지.
=컴퓨터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간단한 이메일 정도. 론크레인 감독은 전문가다. 단 영화 속의 캐릭터가 처한 위기와 상황 등이 믿을 만해야 하니까 리서치도 하고, 전문가들로부터 조언도 구했다. 특히 실제 컴퓨터 프로그래머들에게 물었는데, 처음에는 뭐, 기술적으로 이렇게 대처하고 저렇게 하고 하는 식으로들 이야기하더라. 그런데 만약 아내와 아이들이 인질로 잡혀 있다면,하고 물었더니 모두들 음… 하고 말문을 닫더군. (웃음) 이 질문이 결국 테크놀로지를 이긴다. 그리고 이게 스토리의 핵심이다. 은행을 보호할 수 있는 모든 최상의 테크놀로지가 있지만, 결국 가족의 생명이 걸려 있다면 그 테크놀로지를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인격없는 은행을 보호하기 위해 테크놀로지를 사용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테크놀로지를 버리는 것. 이게 바로 주인공의 첫 번째 정서적 포인트다.

-중년 배우로서의 당신의 실제 이미지가 가족을 보호하고자 하는 아버지의 캐릭터에 설득력을 보태는 것 같다. 배우로서 나이를 먹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한동안 침묵) 한 개인에게나 배우에게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분명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면, 요즘 극장을 찾는 관람층은 주로 젊은이들인데 또래의 젊은 배우들을 보고 싶어한다. 이건 괜찮다. 현실이니까. 문제는 젊은 사람들뿐 아니라 좀더 나이 든 세대와 가족 전체를 위한 영화가 드물다는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내가 할 만한 흥미있는 역할을 찾기가 더욱 어려워지고, 찾았다 하더라도 육체적으로 감당하지 못하는 역할도 있으니까 포기해야 될 때가 있고. 물론 이것도 괜찮다.

-<인디아나 존스 4>가 만들어진다는 이야기가 들리는데, 사실인가.
=때가 되서 작품이 준비되면, 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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