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추모기획] 비디오아트의 창시자 백남준을 추모하다
2006-02-08
글 : 정재숙 (중앙일보 기자)

한국이 낳은 비디오아트의 창시자 백남준이 지난 1월29일(한국시각 1월30일) 미국 마이애미에서 숨을 거뒀다. 예술가로서는 한창 나이라 할 수 있는 일흔네살에 ‘아리랑’과 ‘엄마’를 흥얼거리며 먼 이국에서 눈을 감았다. 십대 후반에 조국을 떠나 일본과 독일과 미국을 떠돌며 지구적 예술가(글로벌 아티스트)로 살았던 그는 말년에 고향을 그리워하며 한국에 돌아가기를 원했다. 경기도 용인에 자신을 위해 세워질 백남준 미술관이 일종의 종착역이었으나 아쉽게도 개관이 늦어지고 말았다.

백남준은 전세계에 통하는 브랜드를 지닌 거의 유일한 한국 출신 예술가였다. ‘비디오 예술의 선구자’, ‘전위 음악가’, ‘행위 예술가’라는 소개 뒤에 따라붙던 ‘동양에서 온 문화 테러리스트’라는 과격한 별명은 그에겐 훈장이자 별점이었다. 서구예술의 우월주의에 맞서 뚝심으로 ‘백남준표 예술’을 밀고 나간 그는 아시아 또는 한국 문화의 가능성을 낙관하고 있었다. 그가 1995년에 쓴 다음 글은 이런 믿음을 잘 보여준다. “우리는 비빔밥의 미학이란 큰 장점을 가지고 있다. 걸쭉하고 청탁병탄(淸濁倂呑)할 배짱을 갖고 있는, 헐렁헐렁 살 수 있는 유머도 갖고 있다. 우리의 민속음악, 싱코페이트된 3박자의 율동은 일본 중국을 떠나 카자흐스탄에 직결하고 한국 색시의 색동무늬는 무지개의 스펙트럼의 과학적 분석으로서, 몽골 티베트를 거쳐 또 어느 개방적 공간을 응시하고 있다.”

1996년 뇌졸중으로 반신마미가 온 뒤 휠체어 신세를 져온 그는 최근 당뇨병 후유증으로 한쪽 시력까지 잃은 상태였다. 걱정하는 친구에게 “일목요연, 외눈깔이라 더 잘 보인다”고 농담을 했다는 그다. “나는 가난한 나라에서 온 가난한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항상 유쾌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그답다. 죽는 순간까지도 그는 명랑했을 것 같다. 특유의 헐렁한 멜빵 바지에 손가락을 걸고 “2012년(그가 스승으로 모셨던 전위음악가 존 케이지 탄생 100주년 되는 해)까지는 살아야 내가 케이지를 추모하고 환생시키는 일을 해볼 텐데”라고 웃었을 것 같다. 빌 클린턴 대통령을 만났을 때 바지가 흘러내려가게 해서(물론 속에는 아무것도 안 입고) 클린턴의 섹스 스캔들을 풍자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던 그때처럼, 미국 기자가 평생 예술 동지로 작업했던 여성 첼리스트 샬럿 무어맨과 혹시 섬싱이 있었는지 묻자, ‘차 안에서 한번 있었던 것 같은데, 내 마누라한테는 비밀로 해주소’ 했다는 그때처럼, 그는 장난기 띤 얼굴로 잠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 제목을 빌려 이렇게 인사하고 싶다. ‘바이 바이 미스터 백.’

‘삼성’과도 바꿀 수 없는 ‘백남준’

2004년 10월 열린 마지막 공개 퍼포먼스 때의 백남준

‘백남준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큰 광대 하나가 한판 잘 놀다 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통 크고 야심만만하며 영리하고 치밀했던 꾀돌이이자 큰 무당이었다. 1969년 그는 자신이 앞으로 해나갈 작품의 설계도를 서구미술사 전체를 예의 그 비빔밥의 미학으로 비벼버린 다음과 같은 말로 설명했다. “레오나르도(다 빈치)처럼 정확하게/ 피카소처럼 자유롭게/ 르누아르처럼 화려하게/ 몬드리안처럼 심오하게/ 폴락처럼 격렬하게/ 그리고 제스퍼 존스처럼 서정적으로.” 도대체 어떤 미술가가 이렇게 우주적인 예술관을 꿈꿀 수 있단 말인가.

백남준의 야심과 희망은 웬만큼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콜라주(뜯어붙이기) 기법이 유화(물감)를 대체한 것처럼, (TV)브라운관이 캔버스를 대신할 것이다”라고 내다봤던 그의 예언이 대부분 들어맞았다. 그가 1960년대에 시작한 비디오아트는 불과 20여년 만에 세계 미술의 총아가 되었다. 지금 우리는 세계 미술사의 한장에 한국 출신 미술가의 이름을 올리는 역사적 순간을 보고 있다. 고인을 누구보다 앞서 이해하고 협력자로 나섰던 존 핸하르트(뉴욕 구겐하임미술관 수석 큐레이터)는 1970년대 초반에 백남준을 처음 만났을 때 다락방 작업실에서 그가 한 말을 잊지 못한다고 말한다. “존, 앞으로는 비디오 설치작품이 예술세계를 장악할 거야. 두고 봐, 우리가 해낼 거라고.” 존 핸하르트는 백남준을 ‘한국이 세계에 준 선물’이라고 불렀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셰익스피어는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고 말했다면 노무현 대통령도 이 한마디쯤은 할 수 있겠다. “백남준은 삼성과도 바꾸지 않겠다.”

“예술은 고등사기다”

백남준이란 이름과 작품세계가 정작 한국에 알려진 건 얼마 안 된다. 오히려 백남준의 죽음이 한국에서 그의 예술세계를 제대로 이해하기 시작하는 출발점이 되리라는 얘기까지 나온다. 1963년 최초의 비디오 아트전을 독일에서 열고, 70년대 이후 휘트니미술관의 회고전 등 미국에서 활발한 작품 활동을 했지만 조국은 그의 진가와 명성을 알아보지 못했다. 한국인에게 백남준이란 예술가가 각인된 건 1984년 정초에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된 <굿모닝 미스터 오웰> 덕이었다. 세계 주요 국가에서 동시 방영된 이 프로그램으로 그는 스타가 되었다. 전세계에 즉각적으로 동영상을 방송할 수 있는 힘과 잠재력이야말로 그가 추구한 ‘더 빠른 테크놀로지를 통해 움직이는 소통의 물결’이었다.

더구나 그해 6월 35년 만에 귀향하면서 연 기자회견에서 그는 길이길이 남을 명언을 던졌다. “전위 예술은 한마디로 신화를 파는 예술이지요. 자유를 위한 자유의 추구이며, 무목적한 실험이기도 합니다. 규칙이 없는 게임이기 때문에 객관적 평가란 힘들지요. 어느 시대건 예술가는 자동차로 달린다면 대중은 버스로 가는 속도입니다. 원래 예술이란 반이 사기입니다. 속이고 속는 거지요. 사기 중에서도 고등 사기입니다. 대중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것이 예술입니다.”

△<로봇 가족: 어머니>와 <로봇 가족: 아버지>(1986). ◁(1971)을 연주하는 샬롯 무어만.

‘예술은 고등사기’라는 백남준식 어법은 수없이 인용되고 독해되면서 여러 해석을 낳았다. 사람들이 무슨 말인가 싶어 난리를 치고 떠들썩한 바로 그 상황, 그 정경이야말로 백남준이 원한 사기였을지 모른다. 그는 “모든 상식과 틀은 사람을 ‘바보’로 만들기 때문에 수시로 파괴되고 변해야 마땅하다”고 말했다. 세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보고 이해하려는 노력으로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만들고 도전을 거듭했다. 우리 자신과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계에서 안전하게 보장된 재현 방식을 깨고 나와 이를 다르게 이해하고 더 나은 것으로 변화시키려는 의지의 화신이 그였다. 그 모든 노력과 장치와 구도가 ‘고등사기’가 아니겠는가. 그에게 삶이란 자신이 붙인 작품 제목처럼 ‘글로벌 그루브’(범지구적인 한판 놀이)였다.

백남준은 텔레비전을 자신의 행위예술이나 다각적 탐구와 연결해 낯설고 생소한 것으로 만들었다. TV는 의자가 되고, 젖가리개도 되고, 십자가도 되고 부처도 됐다. 백남준은 이미 결정되고 제한된 매체라는 텔레비전에 대한 고정관념에 반기를 들었다. 백남준에게 TV는 깊이 탐구해야 할 우리 시대의 중요 개념이었고 커뮤니케이션의 핵심 매체였으며 퍼포먼스의 대상이었다. 그는 한 예로 ‘침묵의 TV 방송국’을 제안했다. 이것은 일종의 지식인을 위한 TV 방송국으로 대부분의 방송 시간 동안 ‘무드 음악’과 같은 느낌의 아름다운 ‘무드 미술’만 내보내는 TV다. 그는 이 방송국을 “비발디의 TV판이랄까 혹은 전자 안정제로서 모든 시청자를 위로하는 빛의 미술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오늘날 환경의 본질은 영화나 회화보다는 TV를 통해 잘 드러난다고 봤다. “TV, 그 작은 전자들의 무질서한 움직임이 바로 오늘날의 환경인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88올림픽을 기념해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 세운 <다다익선>에 그는 이런 말을 달았다. “방송이란 것은 물고기 알과 같은 것입니다. 물고기 알은 수백만개씩 대량으로 생산되나, 그 가운데 대부분이 낭비되고 수정되는 것은 얼마 안 되죠. 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수억의 세계 인구를 상대로 발신한 것이었는데, 이 발신의 내용이 얼마나 수정되었는지는 그야말로 다다익선(많을수록 좋다)입니다.”

백남준 비디오아트의 핵심은 비디오테이프의 내용이다. 백남준은 텔레비전이 단순한 가전제품이 아니며 일방적으로 정보를 배포하는 형태로 그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어느 누구라도 집에서 점점 늘어가는 여가를 이용해 자신의 텔레비전 수상기를 수동적인 소일거리가 아니라 적극적인 창조의 매체, 의사소통을 위한 양 방향의 채널로 이용해 수많은 가능성을 지닌 매개체로 발전시킬 수 있다”고 부추겼다. 그가 창조한 획기적인 동영상 처리기법을 보면 백남준이 왜 독립영화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지 알 수 있다.

마지막 가는 길도 퍼포먼스

제12회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서 <길에 끌리는 바이올린>(1971)을 퍼포먼스 중인 백남준.

백남준은 죽음 이후까지도 한바탕 행위예술로 마무리해 그다운 풍모를 보였다. 2월3일 미국 맨해튼 매디슨 애버뉴의 프랭크 캠벨 장례식장에서 열린 장례식 뒤 화장된 유해가 한국, 미국, 독일 3개국에 나뉘어 안치되는 것이다. 자신에게 목숨을 주고 사상의 뿌리가 된 한국, 정신적 스승인 존 케이지와 요제프 보이스를 만났고 실험미술집단인 ‘플럭서스’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져 예술가의 길을 열어준 독일, 백남준 예술이 활짝 꽃필 수 있는 무대가 된 미국, 세곳에 이 세상에 왔다간 흔적인 한줌 유골을 분산하는 퍼포먼스가 이어진다. 감동과 신화를 기다리는 대중을 위해 그는 죽어서도 또 한편의 비디오아트를 펼쳤다. 예술의 역할이 사회적이어야 한다는 그의 신념이 사후에 더 빛을 발한다.

한국을 빛내고 간 백남준은 “나는 한국에 대한 애정을 절대로 발설하지 않고 참는다. 한국을 선전하는 길은 내가 잘되면 저절로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그가 우리에게 남긴 글을 읽으며 치열하게 타올랐던 그의 전위정신을 기린다. “한국에서는 말을 앞세우는 국수적인 애국자가 늘 이기는 것 같다. 세계주의자가 늘 패배하는 나라에서는 문화의 시야가 좁아진다. 이제는 군사독재도 사라졌으니 한번 모두가 뭉쳐 뛰어볼 만하지 않은가. 한민족은 기마민족의 뿌리를 갖고 있기 때문에 한곳에 정착하기보다는 자꾸 뻗어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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