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음란서생>의 한석규·김민정·이범수
2006-02-10
글 : 김현정 (객원기자)
글 : 김수경
글 : 이다혜

앤티크 가구점이 모여 있는 보광동 거리는 한밤이 되어 인적도 없고 불빛도 없었다. 그러나 그중 한곳만은 밤늦도록 불을 밝히고 파티장을 찾은 듯 성장한 두 남자와 한 여자를 맞아들였으며 또 차례로 떠나보냈다. 제작보고회를 마치고 달려온 <음란서생>의 세 배우, 한석규와 이범수와 김민정이 오래된 가구와 벽을 메운 장미꽃 사이에 앉아 함께 그리고 혼자 카메라 앞에 서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이미지와 나이가 너무 다른 이들을 하나의 구도 안에 담을 수 있을까, 잠깐 의심도 했지만, 터울이 크게 지는 오누이처럼 혹은 서로를 두고 다투는 삼각관계의 연인처럼 다정한 긴장이 흘러나왔다.

한석규와 이범수와 김민정은 정작 영화 속에서는 거의 한자리에서 만나지 못했다. <음란서생>은 한석규가 이범수와 연기하고, 한석규가 김민정과 밀회하는 구도이기 때문이다. 2005년 마지막 날 새벽에야 촬영을 마친 <음란서생>은 평생을 샌님으로 지내온 사대부 윤서(한석규)가 음란소설의 은밀한 재미에 눈을 떠 스스로 ‘난잡한 책’을 쓰게 되는 이야기. 이범수는 윤서의 책에 삽화를 그려주는 의금부 도사 광헌을, 김민정은 윤서에게 연정을 품은 후궁 정빈을 연기했다. 그러므로 한석규와 김민정의 나이 차이 열여덟살이 화제로 오르는 걸 피할 수 없었지만, 한석규는 ‘복’이라며 웃어넘기고, 홀로 의자에 앉은 이범수에게 “민정씨가 없어서 그런지 쓸쓸해 보이네”라고 건네는 사진작가의 농담도 왠지 진담 같다. 나란히 앉은 자태만 보아선 그 실체를 짐작하기 힘든 오묘한 세 남녀의 관계. 그들을 보고 있으니 <음란서생>도 그처럼 오묘한 영화가 아닐까 싶다.

한석규: 샌님 선비 vs 음란작가

한석규는 사극을 하고 싶다고는 한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모던하고 도시적인 영화를 좋아하는 그는 한국영화가 당대를 비추어야 한다고 믿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음란서생>은 달랐다. <음란서생>은 조선 중기 즈음을 시대적인 배경으로 정하고 있지만, 그 이야기만은 어느 시대에 가져다놓아도 괜찮을 보편성을 지니고 있는 탓이었다. “사람은 하고 싶은 걸 해야 행복하다. <음란서생>이 말하려고 하는 건 사실 그게 전부예요. 굉장히 단순하고 누구나 아는 진리지만 그걸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로 풀어놓는 건 대단한 일이죠.” 곰곰이 생각하며 느릿하게 말을 풀어놓는 한석규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그답지 않게 “윤서는 내가 하면 가장 잘할 수 있다”면서 첫눈에 음란소설과 사랑에 빠지고 마는 사대부 윤서를 자청했다.

“원래 말투가 사극 같아서…. (웃음)” 윤서와 비슷하다는 평을 듣는 것 같다는 한석규는 농담 섞인 그 설명과 다르게 자신의 경험을 섞어가며 윤서를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윤서는 언뜻 한번 보고 음란소설을 쓰게 되는데, 그건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고, 지루하게 살다가 마침내 하고 싶은 걸 찾았기 때문이죠. 이해할 수 있어요. 내가 <혹성탈출>을 보고 그렇게 충격을 받았으니까.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있기도 하고. 다만 무언가 얻으면 잃기도 하는 법인데, 윤서는 좀 크게 잃었죠.” 무릇 사대부라면 목을 매고도 남았을 치욕을 겪고 나서도 행복하게 웃는 윤서. 그의 애욕과 환희와 절망을 두루 표현하며 즐겁지만 힘겨운 한때를 보냈던 한석규는 “작은 역이지만 꼭 그 영화가 만들어졌으면 싶고, 나와 잘 어울리는 역이기도 하여” 선택한 <구타유발자들>을 마치고 이제 멜로영화 <미열>을 준비하고 있다. 더이상 주연자리에 얽매이지 않는 한석규가, 다시 한번, 자신만의 영토를 발견하여 자유를 얻은 윤서와 겹쳐 보였다.

김민정: 왕의 여인 vs 당찬 연인

여인은 천하를 가진 왕의 사랑을 갖고도, 웃음을 주고 두려움을 쫓아주는 남자에게 마음을 주었다. 그 대가는 수치스러웠지만, 여인은 숨는 대신 앞으로 나선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문제라는 것을, <음란서생>의 정빈은 알고 있었을까. 김민정은 정빈의 매력이 양파 속살처럼 여러 겹 포개어진 마음을 가진 데 있다고 생각했다. “처음 시나리오를 읽을 때,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도 잊고 소설책 보듯 빠져들어 읽었다. 그래서 다 읽고 다시 읽기 시작했다. 정빈의 여러 가지 면이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읽을수록, 어렵겠구나 깨달았다. 하지만 결국, 복잡한 캐릭터를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은 영화에 뛰어들고 나서의 게임이다.”

<음란서생> 속 김민정은 한복을 입은 태가 더없이 곱다. 한복을 입고 태어났다고 해도 김민정만큼 한복이 잘 어울리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 한복 디자인을 응용한, 어깨를 훤히 드러낸 드레스를 입고 나타났을 때도, <음란서생> 포스터와 스틸 사진들에서도 김민정은 단아한 옷차림과 외유내강의 인상 뒤로 숨길 수 없는 요염함을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두르고 있었다. 비결은 다른 사극영화나 촬영 전 받은 예절교육에 있는 게 아니었다. 아역연기자 시절 경험한 사극을 다시 해보고 싶다고 생각하다가 <음란서생>을 만난 그녀는, 옛사람들이 한복을 입은 그때 그 모습을 보고 싶어서 오래된 사진집들을 찾아 꼼꼼히 보았다. 촬영 전에 분장을 하고 한복을 갖춰 입으면서, 옛사람들의 표정을, 사진으로만 남은 이들의 몸짓을 떠올렸다. 그리고 바라본 거울 속, 그곳에 정빈이 있었다.

이범수: 금부도사 vs 음화화가

낮에는 쇠좆매를 허리춤에 차고 중죄인을 잡으러 거리를 헤맨다. 밤이면 마른침을 삼키며 남의 눈을 피해 호롱불 아래서 음화를 그린다. 윤곽이 선명한 얼굴선과 소를 닮은 눈망울의 1970년생 배우 이범수는 의금부 도사이자, 음화를 그리는 삽화작가 광헌으로 <음란서생>에 발을 담갔다. 광헌은 “체구는 크지 않지만 기골이 장대한데다가 성품이 아주 잔인하다”고 소문났지만 사실은 “의외로 준수한 외모에 어려 보이는 눈빛”을 지닌 남자다. 처음 <음란서생>에 출연 제안을 받고 그는 <잘 살아 보세>의 선약과 스케줄 때문에 고사했다. 마침 <잘 살아 보세>가 지체되면서 재차 광헌 역을 의뢰받은 이범수는 직감적으로 “큰 인연을 가진 작품”이라고 느껴 배우인생 최초로 사극 출연을 결심한다.

그는 “<아나키스트>를 찍으며 총쏘는 법을 배웠듯이” 무관의 겉옷에 어울리도록 무술 연습에 두달간 비지땀을 쏟았다. 고통받는 윤서를 광헌이 눈물을 머금고 베려하는 장면에서는 “홈런타자가 홈런을 칠 때 손맛으로 알듯이 상대배우와 단둘만 느끼는 카타르시스를 느꼈다”고 말하는 이범수의 눈은 기대로 가득 차 있다. <음란서생>으로 올해를 시작하는 그는 촬영이 한창인 <잘 살아 보세>에서는 순진무구한 총각 변석구로 김정은과 함께 시골마을을 누빈다. “출연작의 종영이 가까워지면 꼭 혼자서 극장을 찾아간다. 왜냐하면 그때가 처음 시나리오를 받는 순간부터 느꼈던 수많은 감정과 노력에 손을 흔들며 헤어지는 순간이기 때문”이라는 이범수가 극장의자에 몸을 누이고 이중적인 금부도사로 화한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이 어떨지 상상해본다.

사진 오형근·장소협찬 브리타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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