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출신의 유대인이었던 막스 오퓔스(Max Ophuls)가 주로 창조한 인물들은 사회적 환경에 속박된 인간 군상이었다. 멜로드라마를 즐겨 다루었던 오퓔스의 로맨티시즘이 ‘달콤하지만 쓰디쓴’ 열매 같은 느낌을 주는 이유는 이러한 사회적 제약 속에서 인물들의 사랑과 욕망이 엇박자를 그리는 부조화로 가득한 세계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세계에서 비극적 결말은 여성의 몫이었고, 그것이 오퓔스를 미조구치 겐지와 비교하도록 한다. 실제로 오퓔스의 많은 작품들은 멜로드라마의 형식 속에 좌절하고 희생당하는 여성의 삶과 그들의 뒤틀린 욕망을 담고 있다. 그의 여성에 대한 관심은 그가 독일에서 연출한 작품으로 1930년대 영화 중 최고작으로 평가받는 <리벨라이>(1933)와 <만인의 여인>(1934) 등의 초기작부터 할리우드 시절 연출한 <미지의 여인으로부터 온 편지>(1948, 이하 <미지의 여인>)와 <무모한 순간>(1949), 그리고 그가 다시 유럽으로 돌아가 작업했던 <윤무>(1950)와 <마담 드>(1953), <로라 몽떼>(1955)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이었다.
희생자로서의 여성의 삶은 멜로드라마의 장르적 특징이기도 하지만, 오퓔스는 여성의 욕망이 전통적이고 엄격한 사회윤리에 의해 좌절할 때 발생하는 비극적 순간을 가장 극적으로 묘사할 줄 아는 감독이었다. 오퓔스의 여성들은 그것이 자신들의 삶을 비극적으로 몰고 간다 하더라도, 전통적인 윤리와 계급적인 한계에 가로막힌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오퓔스가 여성들의 욕망을 이상화한 것은 아니다. 여성의 욕망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사회적 힘에 의해 왜곡되어 있으며, 그것이 여성들의 뒤틀린 심리적 세계를 형성한다. 이는 딸의 죄를 뒤집어쓰려는 어머니의 모습을 통해 미 중산층 중년 여성의 심리를 해부학적으로 파고든 <무모한 순간>에 적절하게 드러난다. 또한 남성 응시의 대상이 됨으로써만, 달리 말해 한 남성에게 미지(未知)의 여인에서 기지(旣知)의 여인으로 인정받은 이후에야 완전한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는 여주인공(이러한 면에서 남성에 종속되기를 바라는 여성 욕망이라고 비판받기도 한다)을 그리는 <미지의 여인>이나 이에 더해 결코 충족되지 못한 채로 기표만을 떠돌아야 하는 여주인공의 욕망을 담는 <로라 몽떼> 등의 작품은 부조화된 세계에 대한 오퓔스의 인식이 어떠했는지를 적절하게 보여준다. 오퓔스의 주인공들이 경험하는 세계는, 마치 <쾌락>(1951)의 대사처럼, ‘행복도 그저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었다’.
문자언어의 영역 너머에 있는 영상의 힘
오퓔스가 55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전 그의 침대 옆에는 괴테의 <파우스트>가 놓여 있었다. <파우스트>가 영화가 도달할 수 없는 문자의 힘을 보여주는 작품이라면, 막스 오퓔스의 영화는 비평의 언어가 도달할 수 있는 영역 너머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그의 많은 작품들이 원작을 바탕으로 했지만 그 속에는 오퓔스의 서명만이 남아 있곤 했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미지의 여인>에서 남성 인물의 직업을 소설가에서 피아니스트로 바꾼 것이 단적인 예이다. 오퓔스는 뒤늦게 찾아오는 ‘덧없는 인식’의 순간을 영화 엔딩에 새겨넣곤 했는데, 현재의 시간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음악의 시간성이야말로 막스 오퓔스의 이러한 세계관과 어울리는 것이었다. <윤무>에서 드러나듯, 그는 덧없는 현재보다는 과거를 찬양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이 문학의 언어 혹은 비평의 언어를 뛰어넘을 수 있는 궁극적인 힘은 문자로 형용할 수 없는 우아하면서도 아름다운 카메라 움직임에서 기인한다. 오퓔스가 할리우드에서 연출한 네편의 작품이 자신의 카메라 스타일을 할리우드의 고전적 스타일 속에 녹아낸 작품이라면, 할리우드 진출 이전과 이후에 유럽에서 연출한 작품들에 등장하는 허공을 부유하는 듯한 카메라 움직임은 문자로 번역하는 순간 이미지의 풍요로움이 황량한 문자의 사막으로 변질되어버릴 정도로 미려하다. 오퓔스의 연출력은 특히 실내 공간에서 빛을 발하곤 하는데, 이는 그의 카메라 움직임이 공간의 미장센과 조응하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도저히 움직임이 불가능한 지점으로 보일 때조차 길을 잃지 않고 나아가는 카메라 움직임이 실내 장면에서 더욱 도드라지기 때문이다(특히 오퓔스의 영화에서 결코 빠지지 않는 계단 장면을 보라). 숨결을 지닌 생명체처럼 공간을 움직이던 그의 카메라는 자의식적인 움직임을 지녔지만, 인물을 구속하기보다는 그를 조용히 뒤따르며 지켜보는 미덕을 잃지 않았고, 그것이 그의 카메라로부터 잘난 척하는 속물 근성이 느껴지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오퓔스의 카메라 움직임이 브레히트적인 소격 효과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흔히 지적되는 것이지만, 이와 관련한 또 다른 방식은 ‘반복’이었다. 이는 한 작품에서 등장하는 서사적, 시각적 요소의 반복(<미지의 여인>을 보라)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여러 작품을 관통하는 동일한 상황의 반복(<리벨라이> <미지의 여인> <마담 드> 등에서 반복되는 결투)까지도 포함된다. 하지만 소격 효과 이전에 먼저 언급해야 하는 것은 오퓔스만큼 관객을 매혹시키는 풍요로운 이미지의 힘을 적절히 이해한 감독도 드물었다는 점이다. 그가 자신의 비극적 세계관을 로맨스에 투영한 것도, 부르주아의 부유한 삶과 화려한 의상, 그리고 아름다움에 집착했던 것도 영화적 판타지가 현실보다 더 강력하고 진짜처럼 느껴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양한 실내 공간 속에 부르주아 삶의 ‘화려한 공허함’을 미장센하는 <윤무>는 그 단적인 예이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 2월18일(토)부터 26일(일)까지 열리는 ‘막스 오퓔스 회고전’은 총 7편의 작품이 상영된다. 그의 초기작인 <만인의 여인>에서부터 할리우드에서 연출한 네편 중 세편의 작품(<미지의 여인>, <포획>(1949), <무모한 순간>)과 이후 다시 프랑스로 건너가 작업했던 <윤무> <쾌락> <마담 드> 등의 작품은 막스 오퓔스의 작가적 서명을 확인하는 데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추천상영작
<만인의 여인>(La Signora di tutti | Everybody’s Woman/ 97분/ 1934년)
<만인의 여인>은 이후 오퓔스 영화에서 반복되는 여러 특징을 고루 지닌 작품이다. 자살한 한 여인의 모습에서 시작하는 이 작품은 오퓔스가 즐겨 사용했던 회고적인 방식으로 서사를 진행한다. 여주인공 개비와 그녀의 여동생인 안나 사이에 서로 어긋나는 사랑과 욕망을 통해 여성의 비극적 삶을 제시함으로써 오퓔스 특유의 ‘실패한 여성’의 전형을 보여준다. 오퓔스는 이 작품에서 독일 표현주의보다는 프랑스 인상주의에 더 가까이 있는데, 특히 정교한 트래킹 숏, 다양한 이중 인화와 디졸브 등의 시각적 효과는 1934년과 어울리지 않는 기술적 성과를 보여주었고, 베니스영화제는 이에 기술상으로 응답했다.
<미지의 여인으로부터 온 편지>(Letter from unknown woman/ 86분/ 1948년)
오퓔스의 할리우드 최고작인 <미지의 여인>은 여러 서사적, 시각적 요소들을 ‘반복’시킴으로써 멜로드라마 특유의 운명적 힘을 강화한다. 특히 오퓔스가 깊은 애정을 가졌던 음악(그리고 배경인 비엔나까지도)의 역할이 두드러지게 강조되는데, 음악은 극의 분위기만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여주인공 리사(조안 폰타인)의 욕망이나 스테판(루이 주르당)의 캐릭터와 공명하면서 ‘덧없는 깨달음의 순간’을 강화한다. 리사가 스테판의 응시의 대상이 됨으로써만 만족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암시하는 영화 도입부의 ‘리사 얼굴/연주하는 스테판 손’의 교차편집과 둘의 첫만남 장면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무모한 순간>(The Reckless Moment/ 82분/ 1949년)
<무모한 순간>은 오퓔스가 어두운 시각적 양식 속에서 공간이 갖는 편집증적인 불안과 강박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여타의 작품과 구별된다. <무모한 순간>의 이러한 특징은 이 작품 바로 이전에 자신의 유일한 필름 누아르 영화인 <포획>을 연출했다는 사실에서 이해될 수 있다. <무모한 순간>의 폐쇄적 공간미는 딸의 죄를 자신에게 전가함으로써 스스로를 구속하는 하퍼 부인의 심리 세계를 외재화한 것으로, 필림 누아르의 악몽 같은 세계를 질식 직전의 여성 심리로 시각화한 결과이다. 전통적 삶에 억눌려 있는 여성의 뒤틀린 심리를 해부학적 시선으로 담아낸 보기 드문 수작이다.
<윤무>(La Ronde/ 95분/ 1950년)
<윤무>는 할리우드 생활을 정리하고 프랑스로 되돌아간 오퓔스의 첫 작품이다. 이 시기에 오퓔스는 할리우드 진출 이전에 함께했던 스탭들과 다시 작업함으로써, 할리우드 시절과 구분되는 여러 스타일을 구현할 수 있었다. 오퓔스가 즐겨 사용하던 내레이터가 등장하고 좀더 자유로운 카메라 움직임이 후기 오퓔스의 특징을 예고하기도 하지만, 여러 사랑에 얽힌 에피소드가 연쇄되어 진행되다, 그것이 하나의 원처럼 되돌아오는 내러티브 구조가 무엇보다 매혹적이다. 현재보다는 과거를 예찬하고자 했던 오퓔스의 세계관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