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가 만난 사람]
<대장금> <마파도> <안녕, 프란체스카>의 배우 여운계
2006-02-17
글 : 김혜리

거울 속의 나를 본다. 빈집 문간에서 울먹이던 3살의 나는 입꼬리에 숨어 있고, 선배들의 술잔을 오기로 털어넣던 19살의 나는 콧날에 남아 있다. 얼굴이 새기는 시간은 과거만이 아니어서 어머니의 그것을 닮아가는 양미간에는 아직 오지 않은 나이가 깃들 자리를 가늠하고 있다. 사람의 얼굴은, 기록한다. 다만 은닉에 능한 얼굴이 있고, 내보이기를 기꺼워하는 얼굴이 있을 따름이다. 50년 동안 숱한 분장을 얹고 지우며 살아온 배우 여운계는 삶의 기억을 무람없이 드러내는 얼굴을 가지고 있다. 여운계의 얼굴은 탁 트인 한옥 마루처럼 우리가 퍼질러 앉아 그녀가 거쳐온 세월을 상상하도록 충동한다. 말괄량이 소녀, 대범한 실용주의자, 아름다움과 젊음을 부지런히 시샘하는 할머니, 난센스를 용납지 않는 어르신이 모두 거기 있다. 또한 그들은, 에둘러 가는 법 없는 배우 여운계가 연기한 극중 인물의 모습이기도 하다. 요컨대 여운계는 갖은 풍상을 삭이고 ‘마침내’ 돌아와 앉은 여인이 아니라 옆구리를 간질이면 16살, 25살, 37살이 그때 그 모습대로 불쑥 튀어나올 듯한 여자다. KBS <아침마당> 제작진이, 잃어버린 친지를 찾는 사람들이 출연하는 코너의 초대 손님으로 여운계를 선택한 까닭도 그녀의 담백함 때문이었나보다. “출연자에게 공감하는 면모가 돋보일 게스트라고 생각했다”고 <아침마당>의 공동 진행자 이금희 아나운서는 들려주었다.

1940년생인 여운계는 대학극 1세대 중에서도 희소한 여배우였고 이낙훈, 이순재, 오현경 등과 더불어 실험극장을 창립했다. 그래도 ‘공주 대접’은 한번도 그녀의 몫인 적이 없었다. TV로 주무대를 옮긴 이후 조연과 노역으로 공든 탑을 쌓아올렸지만, 캐릭터 너머 배우 자신에게 시선을 끌어들이는 역할은 거의 맡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얼마 전 MBC 드라마 <대장금>의 최고상궁 정말금은 속 시원한 배역이었다. 분기 없는 얼굴로 “예끼 이년아! 수라간 최고상궁? 너나 하거라”라고 일갈하는 숨은 고수, “나는 궁에서만 산 것이 억울하다. 그러니 구름 위에 뿌려다오”라고 당부하는 풍류객 정 상궁은 배우 여운계의 초상과 은근슬쩍 포개졌기 때문이다. <자매바다>의 종방 잔치가 있던 수요일 밤, 이따금 그녀의 쉼터가 되어준다는 여의도의 한 사무실로 갔다. 구름처럼 살기를 꿈꾼 소녀와 더이상 당신을 놀라게 하지 못하는 세상을 향해 득의양양한 미소를 보내는 할머니를 한꺼번에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녹차 한잔이 식었을 무렵 야무진 매무새의 투피스를 입은 여운계가 들어섰다. 목에 감은 검붉은 스카프가 맨드라미 꽃 같았다. 카메라를 발견한 여배우는 콧등을 분첩으로 두드렸다.

-오늘 아침에도 <아침마당> 생방송을 하셨죠? 요일별 구성이 다른 프로그램인데 선생님은 잃어버린 가족을 찾는 ‘그 사람이 보고 싶다’ 코너의 게스트로 출연하신 지 2년쯤 되셨습니다.
=처음 제안을 받고는 매주 정해진 시각에 방송하는 일이 부담스럽고 딱히 할 말도 없을 것 같아서 사양했다가 지인들이 그렇게 좋은 프로를 왜 안 하느냐고 해서 시작했어요. 결국 나는 프로그램에 별 도움이 안 되지만, 프로그램을 통해 배우는 것은 많아요.

-그게 뭘까요?
=이 세상에는 너무도 큰 슬픔을 가슴에 담고 태연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사실이요. 키워주신 분들께 고마워해야겠다는 생각도 해요. 낳은 부모 품에서 못 자랐다는 건 거꾸로 누군가, 시설이건 양부모건 키워줬다는 뜻이잖아요. 그런데 가끔은 그런 감사의 표현이 상대적으로 약하구나 싶기도 해요.

-성격상 절절한 사연도 많고 감정 폭발이 잦은 프로그램이잖아요. 저는 가끔 봐도 무겁게 느끼는데 선생님은 매주 한번씩 직접 그런 광경을 보시잖아요. 정서적인 스트레스랄까, 감정적인 부담은 없으세요? (사정이 어려운 출연자를 그냥 못 보낸 여운계가 그날 가진 돈을 몽땅 털어주는 모습을 봤다는 목격담을 인터뷰 전 두 차례 들었다.)
=굉장히 스트레스가 돼요. 하지만 그 부담을 배움이나 깨달음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이죠. 인간은 10억이면 10억명 모두 다른 개체라 볼 것도 배울 것도 무궁무진해요.

고1 때부터 내가 할머니 역할을 했어요

-선생님 성함이 매우 독특합니다. 동명이인을 한번도 본 적이 없으니까요. 처음에는 성함이 구름과 시냇물을 뜻하는 한자인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라 운(運)과 계(計)로 쓰시더군요. 어떤 의미를 담아 부모님이 딸에게 지어주신 이름인가요?
=운자는 집안 돌림자예요. 그러니까 운자에 붙일 글자를 정해야 하는데, 여자아이에게 붙이는 글자가 숙자니 순자, 영자 등 뻔하잖아요? 그런데 내가 친척 중에서도 늦게 태어난 편이라 남은 글자가 없는 거라. 그런 상황에서 아버지께서 날 낳을 즈음 꿈에서 우연히 벽시계를 보셨대요. 고민할 것도 없이 계자를 붙이셨죠.

-조금 외람되지만 <LA 아리랑>의 운계 여사나 <대장금>의 정 상궁이나, 초기에 출연한 <말띠 며느리> 같은 영화를 보면 짓궂은 개구쟁이의 인상이 배어나요. 어린 시절 사내아이처럼 자라지 않았을까 상상해 보았습니다.
=굉장히 짓궂었어요. 위로 있던 언니들은 돌아가셨고, 남자 삼형제와 딸 하나인 제가 같이 자랐어요. 사내아이들처럼 놀았고 내가 좀 다혈질이었어요. 어리고 여리고 연약했으면 보호와 귀여움을 받았겠지만 워낙 말괄량이에다 못생겼으니, 그리 인간적인 대접을 못 받았죠. (웃음) 엄마도 나는 공주처럼 안 키웠어요. 내깔려뒀어요. (폭소)

-당시 여자로서는 상당히 큰 키 아니셨습니까? 어쩐지 여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을 것 같습니다.
=만담도 하고 선생님 말과 제스처도 똑같이 흉내내고 노는 시간에 즐겁게 해준다고 인기가 있었죠. 반장, 부반장, 규율부장 다 해봤지만 주로 부반장을 했어요. 반장은 하기 싫었거든요. 책임이 너무 무겁잖아요. 공부에는 전연 집착 안 했어요. 원래가 난 집착이라는 게 안 돼.

-중·고등학교 시절이 1950년대니까 영화가 유일한 오락 아니었을까요?
=중학교 2학년까지 수원에서 다니다가 서울의 무학여중으로 전학을 왔는데 규율이 엄해서 그것을 어기고 영화를 보러가는 일이 많지는 않았어요. 내가 최초로 본 영화는 중2 때 단체 관람한 이념 대립에 관한 반공영화였어요. 38선을 넘어서인가, 지평선을 넘어서인가 하는 제목이었는데…. 40대, 50대까지만 해도 이건 내가 처음 본 영화니 제목을 잊지 말자 다짐했었는데 마지막 기억한 게 10년 넘어버리니 그만 잊어버렸네! 아무튼 메시지는 차치하고 그 커다란 스크린에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고 연기를 하는 인상이 깊이 남아 있어요. 그리고 큰 감동을 받은 예술작품은 무학여중 3학년 때 명동 시공관에서 단체 관람한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였어요. “아, 오페라라는 것이 저렇게 좋은 거구나!” 했죠. 그건 마치 뭐랄까, 산속에 맑은 샘이 있잖아요? 가느다란 줄기지만 마르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서 누구나 마실 수 있는 생명수를 주잖아요. 오페라가 그렇게 보였어요.

-국문학 전공으로 대학 입학할 때부터 극회에 가입할 뜻이 서 있었나요?
=그보다 먼저 무학여고 1학년 때 학교에 새로 방송반을 모집했는데 거기에 제가 응했어요.

-전교의 재주꾼들은 모두 모여들었겠네요.
=음, 그렇죠. 아니, 재주없는 애들도 왔어요. 원, 뭘 믿고 왔는지. (좌중 웃음) 300명쯤 왔는데 10명을 뽑으니 이렇게 많이 왔는데 될 리가 있나 했죠. 시험은 할머니 역과 여학생 역의 대사를 주고 그중 하고 싶은 것을 골라 선생님 앞에서 성우 연기를 하는 것이었는데 가만 보니 애들이 전부 소녀 역할만 연습하는 거야. 그런데 여학생 대사는 “얘, 영자야 너 시험 끝나고 어디 가니? 나하고 보령극장에서 만나자” 이런 식이니 대사에 어떤 굴곡이 없더라고. 그런데 할머니의 대사는 애들을 야단쳤다가 울다가 웃다가 그래요. 아, 이게 재밌다, 감정변화가 좋다 싶어 그걸 연기했죠. 그랬더니 심사위원 선생님들이 배를 잡고 웃으며 기뻐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때부터 내가 할머니 역할을 한 거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1학년이라니 노역의 시작이 제가 짐작한 것보다도 훨씬 이르네요. 그럼 고교 3년 내내 방송반 활동을 하셨군요.
=음악 트는 건 아나운서 애들이 하고 우리는 방송극을 녹음했죠. 근데 뭐 고등학교 방송반이니까 아주 열악했죠. 선생님이 직접 쓴 시나리오로 라디오 드라마를 한 셈인데 방음시설이 없으니 애들이 모두 하교하길 기다려 문 꽉꽉 잠그고 녹음을 했어요. 학교에 혼자 남은 계집애가 “누구야, 같이 가자!” 소리지르면 처음부터 다시 녹음해야 했죠. 그러니까 녹음하는 날은 밤 11시가 돼야 끝나요. 한여름엔 얼마나 더운지 완전 찜통에서 작품 하나를 난산했지.

대학 연극부에 여자는 선배와 나, 딱 둘이었죠

-입시 공부도 점차 부담이 됐을 텐데 힘들게 특별활동을 하면서도 그만둘 생각은 안 하셨나봐요?
=(시큰둥하게) 응, 난 공부가 부담이 전혀 안 됐어요. 열심히 안 했거든. 그러다 대학에 들어갔더니 연극부를 모집한다고 써 있기에 이게 웬 떡이냐 여기서 연극하면 재밌겠다 싶어서 찾아들어갔죠. 여자는 선배 하나와 나, 그렇게 딱 둘이었어요.

-아무래도 당시 여학생들에겐 무대에 서는 일이 부담이었나봅니다.
=그렇죠. 더군다나 남녀공학이니까 여학생들이 무척 수줍어해서 선뜻 연극부에 오지 않았어요. 워낙 여자가 없으니 오디션은 따로 없고 치마만 두르면 배역을 주는 거예요.

-그렇다면 주연은 따놓고 선생님이 하셨겠네요.
=“따놓고”가 다 뭐예요. 내가 따놓고 할머니 역을 했죠. 젊은 여자 역은 선배가 연기하고. (웃음) 항의 안 했냐고? 항의는 무슨 항의를 해요. 우선 작품을 살려야지. (웃음)

-고려대는 워낙 여학생도 적은데다가 연극까지 하셨으니 교내에서 유명인사 아니셨나요?
=구석의 쪼그만 강당에서 연극한다고 유명인사가 되진 않았어요. 정식으로 연극을 배운 것은 극회가 처음인데, 특별히 어떤 배우를 동경했다거나 모델이 있었다기보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표현하는 창작 그 자체가 재미있었어요. 연기를 계속하게 된 이유는 아주 간단해. 여배우가 없었기 때문이죠. 그만 두겠다고 해도 이번 한번만 해달라고 부탁해서 한 것이 4년 동안 8번의 공연을 했죠. 힘들기도 했고 남자가 많은 학교이다 보니 눈에 띄는 것도 싫어서 강력하게 안 하겠다고 한 적도 있는데, 나만한 배우가 없는 거야. (웃음)

-<전북일보>에 박근형 선생이 연재하신 회고록을 보았습니다. 1959년 당시 서강대의 이근삼 교수님이 대학극의 2인으로 박근형 선생님과 여운계 선생님을 뽑으셨다고요. 소속 대학을 막론하고 당시에는 대학극 배우들이 연극에 관심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잘 알려져 있었나봅니다.
=당시는 번역극이 주였지만 이근삼 선생님 희곡은 우리도 무대에 많이 올렸죠. 그맘때는 기성 극단이 신협 하나뿐이었기 때문에 일반인이나 희곡, 영문학 하는 교수님들이 달리 연극을 볼 기회도 무대도 없었어요. 그래서 모두들 대학극을 보러 다녔죠. 대표적인 곳이 서울대, 연고대 극회였는데 방음도 안 되는 열악한 강당에 일반 관객이나 연극, 문학 연구하시는 분들이 구경하러 왔죠.

-<무대 뒤에 남은 이야기들>을 쓴 유용환 선생님의 회고에 따르면 여운계 선생님은 4학년 졸업반이 되자 교사나 다른 취직자리를 알아보신다고 극회를 아예 피해 다니셨다고요. 그런데 이낙훈, 이순재, 오현경 선생님 등과 실험극장 창립에 동참하셨다니 조금 의아합니다.
=사실 교사자격증도 있고 학교로 가려고 했는데 취직이 안 됐어요. 그런데 드라마센터가 실험극장보다 1년 늦게 연극만 하는 극장으로 설립되면서, 관람료를 받으면 월급을 준다고 해서 연극을 계속 했죠. 졸업했는데 용돈을 타 쓸 수는 없잖아요. 결국 월급은 한번도 못 받았지만. (웃음) 4학년 때 실험극장이 생겼고 졸업하면서 드라마센터가 생기니 배우들이 자연적으로 그쪽으로 흡수가 됐어요. 월급을 못 받아 다들 가난했는데 다행히도 가장은 아무도 없었어요. 결혼할 형편들이 못 됐던 거죠.

-실험극장은 기성 극단과는 다른 연극을 해보자는 취지가 가장 컸나요? 논쟁하느라 밤들도 많이 새셨다는 회고담을 들었는데, 뭘 갖고 싸웠는지 기억나시나요?
=선배들과 다르게 해보자는 뜻이 컸죠. 기존 극장에는 조금은 남아 있던 신파조를 완전히 탈피해서 참신한 호흡을 찾으려 했죠. 유학 다녀온 사람도 없고 전범도 없으니 서로 이야기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어요. 논쟁을 하면 저는 이론이 좀 약해서 듣는 입장이었고 남자들이 그렇게 싸워댔어요. 주로 연극의 길은 스타니슬라프스키 식이어야 한다 아니다를 놓고 싸웠죠. 왜 아니다라고 했는지는 모르겠고. (웃음) 난 관심이 없었어요. 연기자는 자기가 설정한 이미지를 충분히 제대로 표출해야지, 이론이 아무리 강해도 표현을 못하면 소용없잖아요. 우리는 액션을 하는 사람이니까. 대학 시절에는 학교 근처 빈 사무실을 얻어 거의 합숙하면서 열심히 했어요. 그 시간을 다 연기하는데 썼는지 어쨌는지는 지금 기억이 없지만…. (좌중 폭소) 오로지 그것밖에 할 일이 없는 사람들처럼 살았죠.

-그맘때 대학을 졸업해 교사자격증도 있는 딸이 그렇게 생활하는 모습에 다른 말씀 안 하신 부모님도 흔치 않았을 것 같은데요.
=지금도 내 판단을 존중해주신 아버지한테 굉장히 고마워요. 내가 뭘 해도 그걸 왜 했냐, 이게 더 낫지 않냐는 말씀이 없으셨어요. 간섭하면 어떤 길을 가다가도 다시 돌아와 의지하게 되는 법인데, 내버려두시니까 오로지 내가 길을 가야만 했죠. 그래서 홀로서기를 더 빨리 했는지도 몰라요.

TV가 나를 선호하지 않은 것이죠

-TV 방송국이 개국하면서 실험극장 주연급 배우들이 방송으로 많이 옮아갔지요?
=주연급이 대다수 옮겼죠. 시작은 KBS에서 하고 동양방송이 개국하면서 그리로 들어갔어요. 그런데 저는 영광스럽게 발탁된 것이 아니고 그냥 스닉 인(sneak in)해버린 경우예요. 왜 이런 표현을 쓰냐면 정말 예쁘고 잘생긴 신데렐라들은 등장도 떠들썩하게 화려하게 했는데 나는 언제 어디서 주모가 필요하다고 부르면 그리로 가고 다방 마담이 필요하다면 가고, 그렇게 흐지부지 시작한 거예요.

-좀 의아하네요. 그래도 대학극에서 기성극으로 진출한 1세대 여배우였는데요.
=그걸 몰라서 물으세요? (웃음) 그때 나이가 스물대여섯인데 다들 꽃처럼 아름다울 때잖아요. 더구나 배우들이니 얼마나 예쁘겠어. 그런데 난 워낙 못생겼으니까 어디를 봐도 멀찌감치서 볼 무대용이지 1, 2m 앞에서 카메라에 비추는 드라마용이 아닌 거예요. 그래서 TV가 나를 선호하지 않은 것이죠. 그러나 주인공만으로 드라마를 찍을 수 없으니 특채로 뽑아서 두루 쓴 거였죠.

-말씀대로 TV 활동을 하신 이후로 여배우로서 외모에 대해 더 민감하게 의식하셨겠습니다.
=난 내 자신을 너무 잘 알았어요. 지금은 우리 또래가 다 노역을 하니 노역층이 든든하지만 당시는 노역 배우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난 20대에 주름을 그리고 노역을 한 거예요. 스물네살 무렵부터 오늘날까지 노인 연기를 한 세대인 거죠. 속상하지 않았냐고요? 많이 분했죠. (웃음) 그 뒤에도 연극무대에서는 주인공을 했어요. 그렇지만 연극은 끝까지 돈이 전혀 안 됐고 점점 TV 일이 많아졌죠.

-1969년 <썬데이 서울> 기사를 보니 <시거든 떫지나 말지>라는 드라마에 선생님을 포함해서 당대 여배우들이 한꺼번에 많이 출연했더군요. 어떤 작품이었나요?
=지금으로 말하자면 시트콤 같은 작품이었죠. 유호 선생님 작품인데 그분이 제목도 늘 기발하게 붙이셨어요. <짚새기 신고 왔네> <정두고 가지 마오> 등등. 그전에는 제목하면 <낙화유수> <한강은 흐른다> 이런 풍이었거든. <시거든 떫지나 말지>, 얼마나 기발해요? 유 선생님 작품은 전부 성공했는데 제가 그 분 작품 80%는 출연했어요. 미모를 별로 안 따지는 분이라, 오호호.

-같은 <썬데이 서울>의 기사에 따르면 선생님의 취미가 ‘연예인 본명 알아보기’와 ‘남의 머리 빗겨주기’로 돼 있더군요. 아무래도 설명이 필요한 취미 같은데요.
=본명들이 아주 희한한 게 많아서 어느 시점에 꼭 들통이 나요. 비행기 탈 때라든가, 방송국 출연료 받을 때 보면 이숙자로 알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이언년이야. 아유, 얼마나 재밌어요? (폭소) 남의 머리 빗겨주는 취미는 지금도 있어요. 미용이든, 뜨개질이든 양재든 손으로 하는 일을 잘하거든요. 당시엔 방송국에 미용 담당 부서가 없었어요. 다들 미장원에서 각자 하고 왔죠. 그러다 1970년 들어서 머리하느라 방송이 늦어지고 중간에 스타일을 바꾸기도 어려워 연기자들의 요구로 상주 미용사가 생긴 거예요. 나는 다른 배우들 머리도 가끔 해줬어요. 이 역할은 머리를 이렇게 디자인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도 하고, 양공주 역이면 내가 어려서 본 양공주는 이랬다고 참견도 하고.

할머니라도 똑같은 인물을 한 적이 한번도 없어요

-TV 출연작 중 다수의 작품에서 가족 내에서의 역할이 그 인물의 가장 중요한 코드가 되는 시어머니, 할머니 캐릭터를 연기하셨습니다. 그래서인지 <대장금>이나 <내 이름은 김삼순>처럼 오히려 그런 가족의 끈에 매이지 않은 인물로 분할 때 돋보입니다.
=가족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 차이를 느끼고 연기하진 않아요. 가령 할머니라 해도 <LA 아리랑>의 장모 역은 집안의 실세는 아니면서도 좀 두드러지지 않았나요? <내 사랑 누굴까>에서는 몇 십년 주부 노하우로 다져진 철두철미한 시할머니 역이었지만 굉장히 강하지 않던가요? 참, 거기선 이순재 선배님과 부부로 나왔죠. 이순재 선배님이 제 아들 역은 무척 많이 했지만 부부로는 처음 나온 작품이었어요. (좌중 웃음)

-이순재 선생님과 모자로 더 많이 분하셨다니 의외네요. 그러고보니 <청춘의 덫>의 할머니 역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역은 연기를 아예 안 할 생각이었어요. 시선도 돌리지 않고 흔들지도 않으면서 굉장히 표정을 아꼈죠. 그런데 보는 분들께 강한 이미지가 남았나봐요.

-<대장금>의 정 상궁도 사극에서 본 적이 없는 캐릭터였어요. 거의 메이크업도 안 하셨죠?
=나는 옛날 아녀자들에겐 화장도구가 많지 않았을 거라 보고 메이크업을 거의 안 한다고 설정했어요. 다른 여배우들과 상의는 안 했죠. 그런데 처음 화면을 보니까 너무 흉하게 나와 시청자에게 미안한 노릇이라 나중에는 조금 추한 면을 가렸죠.

-그러고 보면 의외로 사극은 별로 출연하지 않으셨습니다.
=얼굴이 시대극에 맞지 않아서 그래요. 난 모든 게 다 얼굴로 귀결돼요. (웃음) 이병훈 감독이 <대장금>을 제의했을 때도, 사극이면 머리를 뒤로 다 넘겨야 하는데 커버할 도리가 없다고 거절했죠. 그런데 쪽은 안 질 거라면서 “도대체 이 역을 왜 안 합니까?” 하고 깜짝 놀라더라고요. 지금도 왜 나여야 했는지는 이해 못하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정말 좋은 역할이라서 좋은 반응을 얻어 다행이었어요. 작가가 대사를 의롭게 써주셨어요.

-<안녕, 프란체스카> 출연을 마치셨습니다. 카사노바에게 정기를 빨려 겉모습이 늙어버린 24살 운계가 그간의 온순한 모습이 위장이었다면서 이사벨(김수미)을 배신하고 떠났지요. 출연 제의를 어떤 식으로 받으셨고 무엇을 기대하면서 승낙하셨나요?
=김수미씨가 권했어요. 또래 중에 티격태격 주고받을 수 있는 인물이 하나 옆에 있어주면 작품의 균형이 맞고 더욱 재미있겠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처음에는 정극이 아니라고 생각해 망설였어요. 그런데 막상 가보니 그렇지도 않더군요. 작가가 얼마든지 상상력을 동원해 자기 기량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 묘미가 있고, 연기자도 연기 폭을 많이 넓힐 수 있는 작품이에요. 좀 색다른 냄새가 <안녕, 프란체스카>에서 나지 않습니까? 예전 시즌도 가끔 봤는데, 연기자들이 다 제멋대로 하고 있더라고요. (웃음) 그런데 그 와중에 눈길을 끄는 뭔가가 있었어요.

-극중 마음의 나이가 스물네살인데 그보다 좀더 어린 연기를 보여주신 것 같아요.
=그건 좀 지적받은 부분인데 어려 보여야 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과장하다보니 그렇게 됐어요. 내 실수죠.

-다니엘 오빠(강두)를 운계가 좋아했는데, 짝사랑하는 연기도 참 오랜만이셨죠?
=억지로 했죠. 사랑하는 마음이… 참 실감 안 나대요. 속상했어요.

-극중 운계가 자신감 없는 성격이잖아요. 그 모습이 무척 생소했어요. 선생님이 표현 크기는 달라도 스스로 신뢰가 약한 인물을 연기하시는 걸 거의 보지 못했다는 점을 역으로 깨달았습니다.
=(걱정스레) 제가 연기가 굉장히 서툴렀나요? 몸은 늙었지만 마음은 젊은 이중성을 표현하기 힘들었어요. 게다가 이 여자는 갑자기 늙어버리니 매사 자신이 없는 거예요. 아무도 스물넷으로 안 봐주고 모든 자신감을 잃은 거죠. 사는 게 사는 게 아니고 어디서 밥 한끼 주는 곳 없고 친엄마도 내 딸 아니라고 내치는데 프란체스카 가족이 거둬주니 그저 고마운 거예요. 그래서 눈치껏 생활하는 걸 나름대로 설정해서 표현했는데 서툴렀나봐요. 호호.

-그렇다면 막판 반전은 전혀 모르고 내내 연기하신 셈인데 배우로서 서운하지 않으세요?
=아뇨. 내가 팔을 다쳐서 깁스를 했거든요. 그런데 그 작품에선 붙는 옷을 입어야 하니까 깁스를 감출 길이 없었어요. 그래서 이야기가 바뀌고 날 떠나보낸 거예요. 하지만 어차피 내가 남아서 할 일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응접실에서도 식탁에서도 내가 여기 앉아 있을 위치가 아닌데 감독이 왜 여길 앉혔나 하면서 한회를 때운 적이 많거든요.

-극중 운계에게 다른 인물들이 말할 때 노년이 일종의 재앙인 것처럼 묘사하는 대사들이 저는 약간 마음에 걸렸어요. 나이 든다는 것이 은연중에 자꾸 끔찍한 일로 인식되는 것 같아서요.
=실제로 나야 겪을 것 겪고 거를 것 거르면서 나이에 적응해왔지만, 극중에서는 24살에 갑자기 눈떠보니 파파 할머니가 된 것인데 기절하지 않겠어요? 재앙이죠.

-<마파도>의 추창민 감독님은 여러 할머니 캐릭터 중에 회장댁으로 선생님을 캐스팅하신 것은 ‘대장’의 느낌 때문이라고 하시더군요.
=아마 <대장금> 끝나고 정 상궁 캐릭터의 여운이 있던 때라 그랬을 거예요. 그리고 내가 원래 딱딱한 느낌이 있어요.

-학창 시절처럼 지금도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는 이끌어가는 역을 맡는 편이세요?
=이제 귀찮아서 그런 거 안 해요. 내깔려둬요. 후배들이 미처 경험이 없어서, 훈련이 부족해서 생기는 기술적 미숙함은 가르쳐주기도 하지만, 인생 코치는 안 해요.

-현재 출연 중이신 드라마들은 마무리 단계인 것 같습니다. 새 작품에 들어갈 때마다 여전히 긴장하세요?
=지금껏 나는 명칭은 같은 할머니라도 똑같은 인물을 한 적이 한번도 없어요. 즉 전혀 다른 인물로 6개월, 1년을 살아야 하니 긴장을 안 할 도리가 없지요. 다음 작품은 SBS 수목 미니시리즈예요.

-지금까지 많은 장소를 거쳐 오셨습니다. 세트나 무대, 로케이션 등 어떤 이유에서든 지워지지 않는 장소가 있으신가요?
=<아우와의 만남>이라는 특집극을 찍으러 백두산에 간 적이 있어요. 이데올로기 때문에 아버지가 월북해 이산가족이 된 사람이, 북으로 가 아버지가 낳은 배다른 아우를 만나는 내용이었지요. 그때 본 백두산 천지가 지금도 눈에 선해요.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무서워서요. 몹시 빠른 속도로 구름이 움직이는 사이로 아주 잠깐 동안 시퍼런 물이 보였는데, 그것이 너무도 깊고 컴컴했어요. 아버지와 헤어져 원망하며 살아야 하는 인물의 상황이 그 이미지와 어울려 만든 두려움의 느낌을 못 잊겠어요.

사진 최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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