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라도 사진을 모았거나 연애 편지를 썼거나 영화보고 울거나 멋있지를 연발한 남자들을 생각해 보면 그들은 거의 모두 젊어서 세상을 버린 사람들이었다. 제임스 딘. 장궈룽(장국영). 몽고메리 크리프트. 루돌프 발렌티노. 그리고 배우는 아니지만 이젠 세상에 없는 나의 전 남편. 요절. 젊어서의 죽음은 늙지 않고 영원히 사는 지름길이며, 남긴 자들에게는 감상주의란 싸구려 향수를 한 움큼씩 듬뿍듬뿍 남긴다. 나의 전 남편이라니…. 죽는 순간. 소유격이 붙는군.
그러나 내게 있어 리버 피닉스는 살아 있을 때도 좋은 배우였다. 제임스 딘이 첫 사랑이긴 하지만, 분명 <스탠 바이 미>의 꼬마 리버 피닉스는 보자마자 좋았다. 솔직히 살아만 있어 줬다면, 그 얼굴에 풀풀한 아웃 사이더의 기질과 고독하고 깊은 눈빛만 남아 있었다면, 살아서 그가 신용카드 선전을 하고 제니퍼 로페즈와 로맨틱 코미디에 출연했더라도 그를 좋아했을 것이다. 어떤 충성심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성형 수술로 괴물이 된 배우 미키 루크를 아직도 좋아하는 것처럼.
어떤 영화에서도 리버 피닉스는 ‘집’이란 곳에 머물러 본 적이 없는 ‘골수 떠돌이’라서 미치게 좋다. 데뷔작 <익스플로러>에서부터 우주로 여행을 가고, <스탠 바이 미>에서는 한 무리의 아이들을 이끌고 낯선 시체를 찾아 길을 떠난다. <허공에의 질주>에서는 반전 운동을 하다 아예 가족이 통째로 미 연방 경찰에게 쫓기고, 결국 구스반 산트의 <아이다 호>에 이르러러는 마침내 길의 감식가란 왕관을 쓴다.
그래. 당연하지…. 가수 톰 웨이츠처럼 그의 짧은 인생 자체가 거리의 운행자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히피인 부모 밑에서 구걸을 하면서 세상을 떠돌았고, 할리우드에 지독히도 적응하기 힘든 채식주의자이기도 했다. 리버 피닉스의 얼굴에는 아주 어리고 앳된 시절부터 이미 반항아라는 수식어로는 부족한, 무엇에도 초연할 수 있는 텅 빈 도화지 같은 매혹과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 버려 어깨조차 빌려 줄 수 없는 시린 투명함이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하룻밤>에서 친구들과 내기를 걸어 가장 못 생긴 여자를 데리고 오기로 했을 때 그의 표정을 당신이 보았더라면 싶다. 사람들이 정해 놓은 미와 추의 경계를 그저 넘어 버리는 무심함. 그래서 그를 영화에서 본다는 것은 특히 통째로 모두가 전부 리버 피닉스의 영화인 <아이다호>에서 그를 본다는 것은 영혼의 북쪽이란 표지판을 보고 멀리 멀리 길을 떠나는 ‘은밀한 도망’의 행위나 다름 없는 것이었다. (살아있었다면 디카프리오 대신 틀림없이 해냈을 <토탈 이클립스>의 랭보 역할을 맡은 그를 정말 보고 싶다.)
그리하여 죽기 전에 그가 음성 메시지에 남긴 말. ‘고통과 오해를 통해 내가 배운 것은 너무나 아름다웠어요’라는 말은 나의 말이기도 하다. 사라짐의 충동을 불러 일으키는 남자 리버 피닉스. 잊기에는 너무 숨막히는 남자 리버 피닉스. 미치도록 떠돌아 다니고 싶던 시절. 새벽길의 청소부가 살아있는 가로수처럼 보이던 시절. 내게 있어 리버는 아직도 내가 가지 못한 세상 모든 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가 있어 세상의 모든 로드 무비들은 아직도 나의 영화였다.
내 마음속 깊은 바다에는 아직도 한 마리 아름다운 불사조가 산다. 리버 피닉스란 멈추지 않는 강물이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