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연기에 집착하지 않겠다, <섬>의 서원
2001-08-15
글 : 최수임
사진 : 오계옥

“이야기하는 데 신경쓰이니까 좀 떨어져 있어 주실래요?” 한두 질문이 이어지고, 점점 이야기가 깊어지려 하자 서원(21)이 동행한 매니저와 영화사 직원에게 당당히 요구를 했다. 말소리가 안 들릴 만큼 그들이 자리를 옮기자, 그제서야 기자쪽으로 아예 틀어 앉아 속닥속닥 이야기를 재개하는 서원. 딱히 비밀일 것도 없는 이야기지만, 서원은 뭐랄까 매니지먼트사에 소속된 연예인으로서, 혹은 영화사 작품의 출연배우로서보다는 그냥 편한 자기 자신 그대로 ‘기자언니’와 얘기하고 싶었던 거다. 충무로 영화판에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순수한 그녀의 태도는 이제껏 만난 어느 배우에게도 없는 새로운 것이었다.

<사춘기> <섬> <나쁜 남자>. 서원의 필모그래피라면 필모그래피랄 수 있는 목록은 아직 단출하다. 열일곱 때 드라마 <사춘기>에서 정준의 여자친구 ‘성희’로 연기를 처음 한 이후, <섬>에 출연하기까지 ‘성희’는 그냥 학생으로 살았다. 고등학교에서는 연극부원으로 활동하고, 서울예대 방송연예과에서는 연기를 공부하며. ‘박성희’라는 조금은 흔한 이름을 서원으로 바꾼 것도 지난해 겨울이니, 박성희로 살며 쌓은 내공을 서원이 내보이는 첫 작품이 <나쁜 남자>인 셈이다. <나쁜 남자>에서 첫 주연을 맡으며 서원은, 운명인 듯 여대생에서 창녀로 하강해가는 선화를, 배우로서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성희야, 너 이거 할래?” 하며 감독이 <나쁜 남자> 시나리오를 건넸을 때, “아, 이건 날 생각하며 쓴 배역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래서 “나 아니면 이건 아무도 못하겠다”는 판단에 이를 정도로, 그녀는 작품에 빨려들어갔던 것이다.

서원과 김기덕 감독은 4년 전 <파란 대문> 오디션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 서원은 <파란 대문>에서는 배역을 맡지 않았지만, <섬>에서 유일하게 밝은 캐릭터인 다방 ‘레지’를 연기했고, <나쁜 남자>에서는 반대로 가장 어두운 선화가 되어 홍등가에 발을 들여놓았다. <섬>에서 서원이 보여준 이미지들, 오토바이와 함께 물 속으로 빠지는 모습 같은 데서 어쩌면 조금 먼저 선화의 인상을 받을 수도 있다. 그렇게, 밝기도 어둡기도 한 상반된 이미지를 가진 서원은 촬영장에서도 다른 사람이 되곤 했다. <섬> 때는 “어머, 안녕하세요?” 하며 애교스러운 수다를 떨었지만, <나쁜 남자> 때는 사람들이 이상히 여길 정도로 말도 없이 혼자 지내는 식으로. “여대생에서 창녀로 변해가는 과정에서 감정선을 이어가기가 힘들었어요. 그래서 계속 선화의 감정을 유지해야만 했죠. 간혹, 눈물을 흘려야 하는데 잘 안 될 때는 조재현씨로부터 ‘기’를 받기도 했어요. 한기가 제게 기를 넣어주면, 마법처럼 눈물이 철철 흘렀죠.”

서원에게, 창녀라는 캐릭터 자체가 힘들었던 건 아니었던가보다. 그런 ‘운명’으로 흘러들어가는 한 여자의 마음 한구석에 오랫동안 웅크리고 있기가 힘들었던 것이지. 스튜디오에서 만난 서원은 촬영장에서와는 딴판으로 제 또래의 밝은 기운을 내뿜었다. “내가 입고 온 옷이 제일 예쁘지?” 하며 코디네이터에게 장난을 걸고, 영화 후반작업이 끝나면 고모가 있는 유럽에 여행갈 거라고 신나하고. 하지만 정말 진지하게 “배우라는 말에, 인간을 초월한다는 속뜻이 있대요”라고 하는 그녀에게선 뭔가 여느 어린 배우들에게서 보기 힘든 집착 같은 게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그는 “연기를 하고는 싶지만 연기에 집착하고 싶지는 않아요”라며, 애써 깊이로 빠져드는 스스로의 집착성향을 조절하는 듯했다. 다음 작품은 아직 정해진 바가 없는 상태. 기회가 되면 연극도 하고 싶고 뮤지컬도 하고 싶다며, 욕심을 내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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