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크백 마운틴>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다. 미국 와이오밍주에 브로크백 마운틴이라는 지명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는 아무도 에덴동산에 가보지 못한 것과 같은 이유일 것이다(최근 해외토픽에서 에덴동산을 발견했다는 뉴스가 나오기도 했다는데 설령 사실이라 해도 성경에 나오는 에덴동산과 같은 의미는 아니다). 아담과 이브가 먹은 선악과는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잭과 에니스, 두 남자의 사랑이 된다. 양쪽 모두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 추방당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을 거스른 연인들은 누구도 보호해주지 못할 땅으로 쫓겨난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는 아마 평생을 죄의식에 시달리며 살았을 것이다. 그들이 저지른 일을 후회하고 고향을 그리워하며 낯선 곳에서 두려움에 떨었으리라. 기독교의 관점에선 그것이 원죄에 대한 벌이겠으나 하나님의 추방으로 인해 인간은 비로소 우리가 오늘날 아는 인간이 된다. 희로애락을 알고 생로병사를 겪는 존재 말이다. <브로크백 마운틴>은 이런 신화의 이면을 비추는 이야기다. 잭과 에니스는 브로크백에서 추방당했기에 비로소 브로크백을 가슴에 품고 살아갈 수 있게 된다. 무언가 간절히 원하던 것을 잠시 손에 쥐었다 잃어본 사람이라면 낙원이란 실낙원일 때 비로소 깨닫게 된다는 걸 알 것이다. 그리고 그건 동성애자의 러브스토리에만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도.
어떻게 보면 그리 새롭지 않은 이야기지만 감독 리안은 때로 대담하게 때로 섬세하게 장면을 이어나간다. 그들이 낙원의 의미를 알았건 몰랐건 흘러간 시간은 돌이킬 수 없다고 말하는 듯 영화는 20년의 시간을 성큼성큼 건너뛴다. 큰 강의 흐름처럼 밀려나는 시간의 물결 위로 사람들의 표정과 관계는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듯 확대되어 눈에 들어온다. 영화는 잠시 플래시백을 동원하지만 누구나 예상할 만한 순간엔 결코 뒤돌아보지 않는다. 쉽게 시간을 거슬러 만들어내는 감정이 얼마나 얄팍한 것인지 아는 것이다. <와호장룡>에서 몇 마디 대사를 나누는 장면으로 주윤발과 양자경이 평생 숨겨온 감정을 은밀히 표현하던 것처럼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시간을 압축하는 리안의 솜씨는 황홀하다. 그것은 미리 밝힐 수 없는 영화의 마지막 장에서 폭발한다. 리안은 자신의 주인공이 그러하듯 이 대목에서 결코 브로크백 마운틴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주인공의 운명과 연출자의 운명은 그렇게 함께 가야 하는 것이다.
“나는 맹세한다.”(I swear) <브로크백 마운틴>의 마지막 대사는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무엇을 맹세하는지가 생략된 이 온전치 않는 문장이 폐부를 찌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영화의 비밀이 거기 있을지 모른다. 생략된 장면들, 보여주지 않는 장면들이 무엇인지 상상하게 만드는 영화, 그래서 그 상상이 아름다울수록 상실의 아픔이 절절해지는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은 그런 종류의 영화다. 위대한 러브스토리가 종종 그러하듯 이 영화엔 아름답게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 많지 않다. 러브신이 몇번 있지만 그 장면만 떼놓고 보면 특별할 것이 없다. 대신 리안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왜 다투는지, 어떻게 상처받는지, 어떤 마음의 감옥을 짓고 사는지를 그린다. 진심은 그들의 낙담과 좌절을 통해서만 전달된다. 그런 점에서 <브로크백 마운틴>은 나루세 미키오의 <부운>과 맞닿아 있다. 로키산맥의 광활한 풍경 속에 에덴동산의 신화를 빌려 다시 쓰는 <부운>이라? 아무래도 리안이기에 가능한 영화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