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민족 vs 친일 사이의 여성
2006-02-17
글 : 정희진 (대학 강사)

‘정치적으로 올바른’데다 박식한 사람과 영화를 보면 쾌락이 배가되기도 하지만, 감동이 박살나는 경우도 있다. <청연>을 이런 친구들과 같이 봤다. 나는 감정이입을 넘어 주인공과 동일시되어 코트가 젖도록 울고 있는데,“1920년대는 유럽이란 말 안 썼어”, “하늘이 근대의 알레고리지, 문제는 하늘=일본이라는 거야”, “당시 도쿄 술집에서 한국말 쓰는 건 거의 커밍아웃이었다구”, “<하버드대학의 공부벌레들> 일제시대 버전이군”…. 친구들은 내 눈에는 들어오지 않은 온갖 오류를 지적하며 영화의 리얼리티 부재를 비판했다.

‘자원이 많은’ 내 친구들은 <청연>에서 감명받을 수 없는 ‘주류’였다. 주인공 박경원(장진영)에게 그리고 내게, 여자가 자기 꿈을 이루는 것은 시대를 초월하는 절박한 정치적 이슈이다. 성별, 나이, 계급, 국적 등에서 ‘꿀릴’ 게 없는 사람들은 ‘자아실현’을 위해 세상과 갈등하지 않아도 된다. 세상은 어떤 사람의 욕망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다른 이들까지 동원해 지지해주지만, 어떤 사람의 그것은 비난하거나 최소한 질문한다(“네 처지에 왜 그걸 원하니?”).

<청연>은 ‘민족주의’영화다. 다만 민족의 대표가 기존의 재현과는 달리 남성이 아니라 여성일 뿐이다. 이 영화가 친일 논란으로 관객을 잃다니 어이가 없다. 사실, 이번 사건은 단순한 ‘영화계 소식’이 아니다. 한국사회에서 늘 재연되는 장면. 맹목적 대중 심리가 배타적 국가주의와 만나 ‘생각 정지’ 상태에 이르고, ‘일본 앞에 우리는 공동 운명’이라는 퇴행적 민족주의가 저항적 민족주의로 둔갑한다. 이 과정에서 ‘국민’들 사이의 ‘차이’(이 경우는 성차별)는 은폐되고, 시선은 모두 ‘외부의 적’을 향하게 된다. 주인공이 친일 행적을 했으면, ‘친일 영화’인가? <청연>은 여성에게 ‘친일’과 ‘민족’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되묻고 있다.

우리가 ‘대표 친일파’로 기억하는 이광수나 김활란에게 ‘반민족행위자’라고 하면, 두 사람 모두 억울해서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것이다. 이들은 자신을 민족주의자로 강하게 정체화했으며, 친일을 함으로써(‘근대를 지향함으로써’) 민족을 살릴 수 있다고 믿었다. ‘민족을 살리는 길’은 사람마다 이렇게 다양하다. 조갑제가 쓴 ‘근대화 혁명가 박정희의 비장한 생애’(책의 부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를 보면, 박정희 ‘사상’과 그가 대적했던 김일성의 주체사상이 얼마나 흡사한지 놀랄 것이다. 우파 민족주의냐, 좌파 민족주의냐가 ‘큰 차이’일 뿐이다(둘 다 자기가 ‘진정한 민족주의’라고 주장하지만, 양 진영 모두 민족구성원에서 여성은 제외한다). 창씨개명이나 단발령 등 일제 정책을 거부한 이들 중에는, 일제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유교 규범을 수호하기 위해서인 경우가 많았다.

친일이 불가피했다거나, 사소하다거나, 모든 민족주의는 똑같다는 의미가 아니다. 친일 청산은 절대선, 당위적인 진실이 아니라 경합하는 언설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친일파닷!” 이 한마디가 경합해야 할 사회적 담론장의 다른 목소리를 모두 내쫓는다는 데 있다. ‘여성에게는 조국이 없다.’ 결혼하면 국적을 잃는데 여성에게 국가가 어디 있나. 헌법 제39조 1항은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한 바에 의해 국방의 의무를 진다”며, 여성과 장애인은 국민이 아니라고 못 박고 있다. 문제의 핵심은 여성의 친일 여부가 아니다. 친일의 의미와 행위 맥락, 평가가 남성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논의조차 할 수 없는 우리사회 남성 중심적 목소리의 일방성이다.

아직까지도 일반적으로, 남자가 ‘출세’하면 여자가 따르고 남자들은 그에게 아부하지만, 여자가 ‘성공’하면 남자는 떠나고 여자들은 그녀를 시기한다. <청연>은 기존의 이성애 법칙에 도전한다. 이 영화에서 남자주인공(김주혁)이 박경원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녀가 ‘똑똑하고 야망에 불타며 고집이 센’데다가, 무엇보다도 “너를 통해 세상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청연>에서 남성은 여성을 통해 공적 영역에 진출하며, 여성의 꿈을 지원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다.

박경원과 비슷한 시대를 산 퀴리 부인은 노벨상을 수상한 뒤에도 남편 연구실에서 더부살이를 했고 직장을 구할 수 없었다. 핵분열을 발견하여 베를린 과학아카데미 첫 여성회원이 된 물리학자 리제 마이트너는, 연구소에 여성이 출입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남성들 때문에 정문을 사용하지 못하고 청소부용 반 지하 뒷문으로 다녀야 했다. 박경원은 어땠을까? 일제시대 너무나 가난했던 한 소녀가 현모양처+독립운동가+훌륭한 비행사… 이것이 가능했을까? 미국의 시인, 사상가 오드리 로드는 흑인, 여성, 장애인, 레즈비언이었다. 그녀는 4가지 사회운동을 모두 해야 했는가? 삶은 복잡하다. 우리 주변의 가난한 사회운동가들이 과외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꾸려가듯, 어떤 의미에서 ‘정치적으로 올바른’ 삶은 자원이 많은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일러스트레이션 김순겸

관련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