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희는 장신의 소녀다. 키 170cm에 몸무게 50kg이 되지 않는 마르고 긴 몸을 가졌다. 그 몸은 걸어다닐 때 구부정해진다. 홍익대 근처 어느 초등학교 돌담벼락에서 사진촬영을 마치고 카페로 돌아가는데, 이연희는 하얀 더플코트를 몸 앞쪽으로 바짝 끌어당기며 어깨와 가슴을 움츠리고 팔짱을 낀 채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나갔다. 짧은 머리칼을 질끈 동여맨 선머슴 같은 소녀 뒤로 금방이라도 “연희야, 같이 가!”하며 같은 반 여학생 두세명이 따라붙을 것 같다.
막돼먹은 백만장자 소년과 참되게 자란 소녀의 멜로 <백만장자의 첫사랑>에서 백만장자 재경(현빈)의 마음을 흔드는 열아홉살 은환의 모습도 열아홉살 이연희의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은환이는 상처는 많지만 밝고 당차고 씩씩하고, 아픈 와중에 아르바이트도 열심히 하고, 그런 모습이 저랑 비슷해서 꼭 하고 싶었어요. 말을 툭툭 내뱉기는 해도 다 걱정하는 마음에서 나온 말들이기도 하고. 그런 게 제가 좋아하는 모습이기도 하거든요.” 이 점을 활용하려 했던 걸까. 김태균 감독은 “은환이가 어떤 아이인가를 생각하려 하지 말고 너답게 연기하렴” 하고 지시했다고 한다. 준비를 지나치게 많이 해와서 도리어 갇힌 연기를 했던 이연희는 그때부터 자신이 느끼는 자연스러운 감정을 그대로 표현할 수 있었다.
은환이가 친엄마를 찾아가 “왜 날 못 알아봐요”라며 울먹이는 장면은 유독 가슴을 울리는 대목이다. 이 장면을 촬영하기 전에 이연희는 감독에게 “은환이 성격에 엄마 앞에서 소리내 울지는 않을 것 같다”며 “흐느끼기만 하면 어떻겠냐”고 상의했다. 눈물을 애써 참아내는 은환이를 연기하다 제 마음에 설움이 복받쳐올랐다. 저도 모르게 고개가 떨어뜨려졌고, 쏟아지는 눈물을 훔쳐내느라 한쪽 팔이 올라갔다. 은환이의 작은 어깨를 들썩이게 만든 건 이연희의 진심어린 연기다. <백만장자의 첫사랑>에서 이연희는 그 나이 때가 아니면 표현할 수 없는 순수함과 맑음, 사랑스러움으로 여과없이 예쁘게 빛난다.
열다섯살인 2002년 주위의 권유 반, 호기심 반으로 이연희는 SM엔터테인먼트 주최 ‘청소년 베스트 선발대회’에 지원했다가 덜컥 대상에 뽑혔다. 그전까지는 육상과 수영을 좋아하는 평범한 아이였다. 50m 전력질주를 8초대에 끊는 날쌘 긴 다리 소녀는 종종 반 대표 달리기 주자로 운동회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했다. 학기 초에는 늘 존재감 없는 조용한 아이였다가 학기 말쯤 되면 반 친구들 대부분이 그의 친구가 되었다. “심하게 싸운 일도 그날 풀고 잊어버리는” 뒤끝없고 털털한 성격에 친구들의 고민 들어주기를 좋아하는 이연희는 저와 절친한 친구들 대부분이 키가 작다고 했다. 그 친구들의 눈높이에 맞추고 어깨에 팔을 둘러주느라 이연희는 몸을 구부정하게 만드는 습관을 얻은 것 같다. 인터뷰 중에도 그의 자세는 대답할 준비보다 귀 기울일 준비를 하고 있다.
씩씩하고도 친절한 이 소녀를 데리고 눈을 함박 맞은 담벼락 곁에서 사진을 찍었다. 추울 걸 뻔히 알면서도, 얇은 원피스 차림으로만 사진을 찍자는 미안한 제안을 했다. “괜찮아요.” 맑고 초롱한 얼굴과 묘한 부조화를 이루는 낮고 풍성한 음색으로 그는 씩 웃더니 주먹을 불끈 쥐고 “이얏!” 하며 살짝 기합을 넣었다. 이연희는 2004년 드라마 <해신>에서 수애의 아역으로 데뷔를 치른 뒤 <부활>과 <금쪽같은 내 새끼>까지 세편의 드라마를 찍었다. 첫 영화를 합쳐 2년간 4편의 작품을 해치운 셈이다. 준비를 워낙 많이 하는 성격이라 매니저 수첩에 담긴 스케줄을 자기 다이어리에 죄다 옮겨놓을 정도라고, 그래서 매니저로부터 “그냥 니가 매니저 해라” 하는 농담섞인 핀잔을 듣는다는 가녀린 열아홉살 소녀의 잠재력은 얼마나 될까. 굳이 몸을 쫙 펴려하기보다 구부정한 채로 그저 질퍽한 눈길을 헤쳐나가는 데 집중하고 있는 뒷모습이, 곧 큼직한 그림자를 드리울 것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