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초반의 여자가 울었다. 우리네 삶이 그리 호락호락한 것이 아님을 이미 다 알아버린 그를 울린 것은, 자신의 영화 <달려라 장미>였다. “이젠 정말 다시 만나지 말자고 말하는 남대(김태훈)에게 김밥을 쑤셔넣고, 우유를 뿌리던 영미를 연기할 때였어요. 남대에게 이별통보를 받았을 때 영미는 참았지만, 전 눈물이 폭포가 되더라고요. 영미는, 그런 마음을 가졌더라도 그렇게 우는 아이가 아니라서 촬영이 중단됐죠. 그리고 전 한 30분을 꺼이꺼이 울었어요.”
최반야의 영미는 분명 어딘가에 있을 법하지만 동시에 산들바람에도 휙 하니 날아가버릴 듯한 허구의 인물이기도 하다. 결혼 2년차, 남편은 무심하다. 그를 자극하기 위해 옛 애인 이야기를 꺼내보아도 돌아오는 반응은 심드렁이다. 어제도 오늘 같고, 내일도 오늘 같을 일상은 영미를 자꾸 지치게 만들 뿐이다. 당연히 영미가 딛고 있는 현실이 튼튼한 뿌리를 가지고 있을 리 없다.
“너 아니면 안 되는 역할”이라는 김응수 감독의 제의에 한번에 영미로 분하기로 결심한 최반야는 영미를 “자신의 판타지와 꿈을 위해 평소에도 연기를 해야 하는 불쌍한 여자”로 이해했다. 영미가 시종일관 연극을 하는 듯 움직였던 이유다. 그는 촬영기간 내내 현재의 관계 속에서 잘 지내보려 했지만 맘처럼 되지 않아 힘들어했던 영미의 심정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보냈다. 사는 것 자체가 위태로워 보이는 영미가 현실을 속삭일 수 있던 이유이기도 하다. <달려라 장미>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달려라 장미>가 관객을 찾은 것은 영화가 다 만들어진 뒤부터 2년여의 세월이 흐른 다음이었다. 2005년 부산영화제에서 먼저 선보였지만, 개봉을 맡아준 극장은 한곳뿐이다. 최반야는 후회하지도, 속상해하지도 않는다. “이 역할이 흥행과 상관없이 많은 여배우들이 부러워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서다. “한국영화에 입체적인 여성 캐릭터는 드물어요. 한데 영미는 아니죠. 지금이 아니고 2년여 전부터 그랬던 거예요, 영미는…”이라고 덧붙이는 그의 얼굴에 영미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묻어났다.
그는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의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하다. “대학 연극반에서 극본 쓰는 법을 익혔던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죠. 하지만 창피해요. 영화는 혼자 하는 게 아니잖아요. 저 혼자 한 일도 아닌걸요”라며 겸손함을 보였지만, 이내 자신이 한때 한국 시문학에 심취한 ‘문학소녀’였다는 점을 고백했다. 한때는 피아니스트였던 소녀가 문학에 빠져들고, 그러다 한국 건축에까지 흥미를 옮긴 것을 그는 “좋아하면 끝을 보는 ‘단순한’ 성격 탓”이라 했다.
대학 건축과에 들어가며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다고 믿었던 그는 또다시 뜻하지 않은 곳에서 빛을 발견했다. “그냥 흥미로 시작한 거였어요. 한데 오태석 연출가, 명계남·오현경 선생님이 저희 연극반 출신이었죠. 이곳에서 호된 훈련과 함께 제대로 배웠어요. 연기자들이 연기할 때는 부족해서 표현을 못할 지라도 진심을 다하는 면이 있어요. 일상에는 허울 같은 관계가 있지만, 연기에서는, 내가 줄리엣이면 로미오를 사랑한다는 전제는 결코 바뀌지 않거든요. 건축은 차가웠는데, 연극은 뜨겁더라고요. 그 온도가 저랑 맞는다는 걸 그때 알았죠.” 이렇게 배우가 된 최반야는 돌이켜보니, 자신이 학창 시절 내내 연극 대본을 쓰고, 공연에 참여해왔음을 알게 됐다. 그리고 그 순간들이 자신의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음도 기억해냈다. 그렇게 10년여의 세월이 훌쩍 흘렀다.
영화에서 첫 주연을 마쳤지만 아직 다음 작품을 정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역할, 최반야가 아니면 안 되는 것들을 기다린다고 했다. “괴상한 코미디나 자기 안의 끌어넘치는 이상한 것들과의 부조화 때문에 사고치는 인물. ‘입체적이고, 사연 깊은 여자 조연’을 하나의 캐릭터로 완성해보고 싶기도 해요.”
인터뷰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손수 써온 작은 엽서 한장을 내밀었다. ‘<달려라 장미>를 만나실 모든 분들께’로 시작하는 엽서에는 “무심하고 어설픈 한국 남편들과 살면서 꿈과 애정을 놓지 않고 때로는 엉뚱하게 때로는 섹시하게 갖가지 방법으로 고군분투하는 내 언니와 내 친구 그리고 대한민국 모든 기혼여성들에게 응원의 장미를 드립니다. 평생 꿈과 로맨스를 놓치고 싶지 않은 미혼기혼남녀노소 모두모두… 달리십쇼, 부디∼”라는 글이 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