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없는 남자와 꿈이 너무 많은 여자가 만나 사랑을 한다면 어떤 빛깔일까. 2월20일 용산 CGV에서 시사회를 가진 <시티즌 독>은 삭막하고 메마른 도시에서 피어난 독특한 러브스토리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펜엑 라타나루앙 등과 함께 타이 뉴웨이브를 이끌고 있는 위시트 사사나티앙 감독의 두번째 작품으로, 데뷔작 <검은 호랑이의 눈물>을 뛰어넘는 화려한 비주얼이 보는 이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와 CJ 인디아시아영화제에서 상영돼 관객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은 바 있는 영화의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하릴없이 소일하던 촌뜨기 팟은 어느날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방콕으로 떠난다. 정어리 통조림 공장에 취직한 그는 급기야 손가락이 잘리는 사고를 당하게 되고, 이후 아무런 꿈도 없이 경비원, 택시 운전수 등의 직업을 전전한다. 대도시에서 이름을 잃고 익명의 존재가 되어 버린 그는‘시티즌 독’(Citizen Dog)으로 하루 하루를 살아간다. 폿이 한눈에 반해 짝사랑하는 진은 폿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는 여인이다. 무엇이든 질서 정연하게 정리해야 하고, 작은 얼룩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며, 읽지도 못하는 언어로 쓰여진 하얀 책을 항상 지니고 다니는 진. 그녀는 꿈이 너무 많아서 문제다. 회사동료들은 가상의 인물과 수시로 대화를 나누는 그녀를 미쳤다고 여긴다.
영화는 전혀 다른 성격의 두 주인공을 러브스토리로 엮어 한 자리로 초대한다. 공통점이라곤 없는 듯하지만, 극중 두 남녀는 주어진 현실을 충분히 즐길 줄 모른다는 점에선 동일하다. "대도시의 소인들(Big City, Small People)에 관한 스케치"라는 감독의 설명처럼, 팟과 진은 대량으로 양산되는 정어리 통조림 속에서, 매일같이 늘어나는 플라스틱 빈병 속에서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찾아 헤맨다. 꿈이 너무 많아도, 혹은 없어도 이 과정은 고난하다.
광고를 연상케 하는 독특한 비쥬얼에 힘입어 <시티즌 독>이 펼쳐놓는 발랄한 상상들은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오간다. 하늘에선 오토바이 헬멧이 떨어지고, 통조림통 안에서 손가락이 꿈틀대며, 곰인형은 말하는 걸로 모자라 담배까지 핀다. 이는 영화가 현대인의 일상이라는 다소 우울한 소재를 다루고 있음에도 유쾌한 톤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다. 아무리 지루하고 척박한 일상이라도, 행복은 바로 옆에 있을 수 있다고 속삭이는 영화 <시티즌 독>은 오는 3월 9일 개봉한다.
<시티즌 독> 100자평
방콕에 살았던 한국 친구가 했던 한 마디 “형, 방콕은 태국이 아니야”. 태국은 방콕과 방콕 아닌 지역으로 구분된다. 그만큼 비동시성의 동시성이 심하다는 말씀. 20세기의 시골에서 상경한 가난한 청춘이 21세기의 휘황한 메트로폴리스를 견디는 방법은 무언가를 꿈꾸는 수밖에. 가장 낮은 곳에서 저 높은 곳을 향한 꿈은 때때로 허황될 수밖에. <시티즌 독>은 가까운 곳에서 희망을 찾으라고 속삭인다. 가난한 청춘남녀의 이야기를 아시아식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요리한 작품. 특히 태국에 머물렀다면, 방콕의 소음만 들어도 추억이 호출된다.-신윤동욱/ <한겨레21> 기자
도시로 이사 온 착한 사람들의 착한 이야기들. 그들은 노동하고 사랑하고 슬퍼하고 꿈꾼다. 발랄한 상상력과 달콤한 노래와 화려한 미장센이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지운다. 강렬하고 감각적인 색채와 표정 없는 도시의 몽상가들은 가볍지만, 때때로 사랑스럽다.-남다은/ 영화평론가
<아멜리아> 보다 깜찍 발랄한 상상력으로, 급격한 도시화로 인한 인간소외를 돌파하는 즐거운 '분열증 무비'! 그러나 동성애 포르노가 환경운동 만큼이나 첨예한 정치적 의미를 지니는 것을 간과하는 건, 이 영화의 한계로 보아야 할지, 태국 영화의 한계로 보아야 할지, 숙고가 필요하다.-황진미/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