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의도가 좋은 영화를 만들진 않는다. 또한 계몽의 효과가 좋은 영화의 기준이 될 수도 없다. 그렇다 해도 스티븐 스필버그의 <뮌헨>은 시급한 영화다. 테러가 테러를 낳는다. 혹은 니체의 경고대로 괴물과 싸우다 괴물을 닮아간다. <뮌헨>의 윤리적 전언은 자명하고 정당하다. 많은 사람들은 노엄 촘스키의 말은 듣지 않아도 스필버그의 영화에는 눈을 모으고 귀를 기울인다. <화씨 9/11>의 계몽 효과는 <뮌헨>에 비교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영화를 거부하기란 힘들다.
<뮌헨>이 스필버그의 전작 <우주전쟁>보다 뛰어난 영화는 아니다. 계몽적 의도는 가끔 이야기를 흘러넘쳐 장광설로 흐르며, 구성의 결함도 있다. 그러나 기술적으로 눈부시다. 야누스 카민스키가 만들어낸, 푸른 하늘을 한번도 보여주지 않는 낡은 색조와 거친 톤의 영상은 일품이며, 첫 장면에서부터 숙명적 비애의 공기를 만들어내는 존 윌리엄스의 음악은 종종 마음을 사로잡는다. 노배우들의 연기는 흠잡을 데 없으며 고요의 불안을 조성하는 사운드도 탁월하다. 무엇보다 이 영화를 강하게 만드는 건 스필버그의 유혹의 기술 혹은 설득의 기술이다. 그 기술은 스필버그의 성취와 한계를 동시에 드러낸다.
불안의 공기 속에 흐르는 불길한 예감
<뮌헨>의 이상한 점 가운데 하나는 분노에서 출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실화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이 영화의 시작은 1972년 뮌헨올림픽 선수촌에서의 이스라엘 선수 인질극이다. 인질들은 모두 납치범들은 대부분 현장에서 사살된다. 보복 암살단의 리더로 불려나온 아브너는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의 내근 직원이다. 영화는 그의 감정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는 자기 속에 너무 깊이 가라앉아 있거나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지만 묵묵히 암살 지령을 받아들인다.
타지의 술집에서 낯선 여인으로부터 유혹을 받은 뒤 갓 태어난 딸과 통화하다 오열하는 장면을 제외한다면, <뮌헨>의 주인공은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 미국 평론가 토드 매카시는 관객이 감정이입할 수 있는 주인공의 내면묘사가 결여되는 바람에 젊은 관객은 시계만 쳐다볼 것이라고 비난했는데, 동의하기 힘든 말이다. 분노와 참회는 계몽의 의도가 담긴 영화가 택하는 가장 단순한 이야기 방식이다.
스필버그가 분노의 격정 대신 택한 것은 불안의 공기다. <뮌헨>의 많은 인물 가운데 분노의 언어를 쏟아내는 인물은 암살단 동료 스티브뿐이다. 뮌헨의 선수촌을 잠입하는 ‘검은 9월단’ 멤버들의 서투른 몸짓과 초조한 눈빛, 참혹한 뉴스를 접하는 아브너와 아내의 거실에는 처음부터 긴 불안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암살단이 배회하는 유럽의 기품있는 거리와 건물은 더이상 아름답지 않으며 살육의 불길한 예감으로 가득하다. 과녁을 좇는 주인공은 언제 과녁이 될지 알 수 없으며, 게다가 폭약은 언제 과녁을 넘어 그들과 무관한 나를 덮칠지 알 수 없다.
<뮌헨>이 전하는 건 특정한 불행에 처한 인물(들)의 사연이 아니라 그들을 보고 있는 우리에게 번져오는 불안이다. 불안에는 경계가 없다. 지구촌의 삶은 성능이 오인된 폭약과의 동거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심리적 온도를 낮추고, 우리가 서 있는 지반의 허약함을 일깨우는 것은 <뮌헨>이 <우주전쟁>과 공유한 좋은 점이다.
그는 여전히 대중영화의 기술을 활용한다
또한 스필버그는 여전히 대중영화의 관습적 기술을 활용한다. <뮌헨>은 감각적 자극과 장르적 쾌감을 종종 끌어들인다. 검은 9월단 난입 직후의 상황이 펼쳐지는 첫 플래시백에서 한 이스라엘 선수는 어설프게 반격하다 총을 맞아 볼에 구멍이 뚫린다. 볼에선 피가 솟구치는데 그는 얼빠진 표정으로 떠밀려간다. 후반부의 한 장면은 더 충격적이다. 암살단이 쏜 총을 맞고도 비틀거리며 의자를 찾아 앉은 무표정한 살인청부업자 여인의 드러난 가슴 위로 피가 꾸물꾸물 솟아난다. 이 장면들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폭격으로 떨어져나간 자신의 팔을 들고 우왕좌왕하는 병사의 모습과 겹친다. 육신이 손상된 채 어쩔 줄 모르고 서성이는 인물은, 처참한 시체보다 훨씬 끔찍하고 자극적이다. 스필버그는 정교하게 조작된 이런 장면들이 관객의 시선을 포획할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살육의 스펙터클에 대한 자의식이란 점에서 <뮌헨>은 <우주전쟁>에서 나아갔다고 보기 힘들다.
암살단이 유럽의 도시를 옮겨가며 벌이는 암살 시퀀스들은 각종 스릴러의 관습을 필요에 따라 전용된다. 암살단의 활약을 중심에 놓으면 <뮌헨>은 첩보물, 히치콕식 스릴러, 전쟁영화의 진열장이기도 하다. 164분의 러닝타임이 길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각각의 암살 장면들이 지닌 장르적 쾌감 때문일 것이다.
이건 윤리적으로 미묘하다. <뮌헨>이 스릴러의 관습을 전용할 때, 그것은 이 영화의 메시지와 은밀하게 충돌한다. 스릴러는 주인공의 성공을 바라도록 관객을 유도하기 때문이다. 매력적인 외모의 주인공은 살인을 성취해야 하며 체포되거나 죽어선 안 된다. 관객인 우리는 슬픔도 분노도 없이 그의 성공에 쾌감을 느낀다. 폭력을 다룬 장르영화가 윤리적 주장을 시작할 때 발생하는 딜레마를 <뮌헨>도 완전히 피해가긴 힘들다.
여성 살인청부업자 살해 장면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시퀀스 전에 아브너가 그녀의 유혹을 받았지만 동침 제안을 힘겹게 물리친 뒤, 아내와 통화하며 흐느끼는 장면이 나오고 동료가 그녀의 제물이 된다. 영화 전체를 통틀어 아브너는 여기서 유일하게 사적 분노를 표출한다. 관능적인 여인은 벌거벗은 채 피를 뱉으며 죽어가고 남자들은 여인의 몸을 덮지 않는다. 스필버그 영화에는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 이 과격한 장면은, 동료의 복수라는 표면적 이유 외에도 요부에 대한 남자들의 가학과 처단이라는 욕망이 작동한다(스필버그 영화의 변함없는 주제 중 하나는 아버지 되기의 힘겨움이다. 요부는 아버지 되기의 적이다).
스필버그식 계몽의 한계
스필버그의 설득의 또 다른 작은 기술은 그들에게 말하게 하는 것이다. 이 점이 시오시스트의 비판의 초점이 됐다. <뮌헨>은 정보 제공자를 프랑스 마피아로 설정함으로써 시오니스트의 변론을 최소화하고 대신 아테네에서 우연히 안전가옥을 같이 쓰게 된 PLO 단원의 입을 통해 팔레스타인의 소망이 유대인과 같다는 점을 설득한다. 스필버그는 드디어 그들의 말을 듣는다. 그러나 끝내 그들의 자리에 가보지는 않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카메라는 맨해튼의 빌딩 숲 가운데 서 있는 쌍둥이 빌딩을 잡는다. 뮌헨 사건과 9·11은 실은 같은 것이다. 테러의 지속되는 악순환을 상징하는 이 인상적인 장면은 그러나 스필버그식 계몽의 한계이기도 하다. 두 사건의 공통점은 아랍이 도발하고 서방이 보복을 감행한다는 구도다. 아랍과 서방의 충돌이 가자지구 혹은 헤브론 학살이 아니라 뮌헨과 9·11로 환유되고 명명되는 순간 서방은 자신을 피해자로 상상하며 폭력의 기원은 아랍으로 돌려진다. 아랍과 서방은 충돌의 시작부터 모두 괴물이었다.
스필버그는 <쉰들러 리스트>의 유아적 휴머니즘으로부터 멀찍이 벗어나, 오래전부터 자기 속의 어둠과 불안을 들여다봤고 이제 타자 속의 인간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아직은 대중영화의 관습에 기대, 그리고 자신의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 그렇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