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뮌헨올림픽 때 11명의 이스라엘 선수들을 죽인 팔레스타인 그룹에 대한 이스라엘 비밀요원들이 벌이는 암살 작전을 다룬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진지하면서 자부심 가득한 영화, <뮌헨>은 공포와의 전쟁이 그렇듯 가혹하다. 영화는 느릿느릿하고 반복적이지만 일종의 분석적인 매력을 뿜어낸다. <뮌헨>은 한 영화감독의 간청을 담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극화나 보복 테러의 도덕성에 대한 반추가 아니다. 영화는 정치를 넘어 스필버그가 믿는 할리우드 엔터테인먼트를 통한 속죄에 근거하고 있고 ‘마셔’뿐 아니라 ‘멘시’까지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어하는 감독의 계속되는 시도이다(마셔와 멘시 모두 이디시 속어며 각각 일반인과 성인을 구분하는 단어다-역주).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관점에서 만들어졌어도 <뮌헨>은 끈질기게 팔레스타인인들을 인간적으로 비추고자 노력한다. 모사드와 검은 9월단만 이상한 커플이 아니다. 시나리오는 (본질적으로 비정치적인 <포레스트 검프>로 오스카상을 받은) 에릭 로스가 처음 쓰고 (상당히 정치화된 <엔젤스 인 아메리카>로 퓰리처상을 받은) 토니 쿠시너가 개작했다. 미국의 신보수주의자들과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자들이 동시에 싫어할 것이 뻔하다. 스필버그가 헤집고 들어간, 이성적인 분석을 용납하지 않는 이 상황 속에서 양쪽은 피해의식을 느낀다.
취한 미국인 선수들이 일단의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을 선수촌에 들어오게 하면서 <뮌헨>은 과장된 가짜 유대인 비애로 비극을 증폭시킨다. 그들은 이스라엘인 숙소로 들이닥쳐 선수 몇을 쏘고 나머지는 인질로 가둔다. 세계가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동안 게임은 계속된다. 스필버그는 오스카상을 받은 <9월의 하루> 다큐멘터리의 부분을 맥루한(핫미디어와 쿨미디어의 개념으로 유명한 캐나다의 문명비평가-역주)식 광란으로 편집해 보여준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처럼 오프닝 장면이 가장 뛰어난 장면이다.
<뮌헨>은 확인될 수 없는 아브너의 모사드 암살팀에 관해 들려주는 조지 조나의 1984년작 <복수>를 각색했다. 그는 <복수>와 1986년 HBO판 각색 <기드온의 칼>의 모사드 지휘관들처럼 유능하지만 도덕적으로 갈등을 겪고 있다. 신경과민 폭파 전문가(마티외 카소비츠), 불안한 외교관(시아란 힌즈), 호전적인 근육질 유대인(대니얼 크레이그), 둔감한 위조 전문가(한스 지쉴러)와 그들의 능수능란한 조직책(제프리 러시) 등 혼돈에 혼돈을 더할 다양한 부대원들 사이에서 에릭 바나가 연기하는 아브너는 다소 공허해 보인다.
아브너의 요원들은 11명의 암살 목표를 지정받는다. 그러나 의도하지 않은 사상자들을 내고 목표를 더 늘리며 작전을 멈추기를 거부한다(무고한 모로코 웨이터를 살해한 릴리함메르 사건은 나오지 않는다. <복수>에서 릴리함메르는 다른 모사드 팀이 한 일로 설명된다). 잔인한 살해가 양팀이 따르는 규칙이지만 팔레스타인인은 좋은 이웃이나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로 인간화된다. 반면 민간인 피해는 잘려나간 팔이나 다리 정도로만 보여준다.
액션은 로마에서 파리, 사이프러스, 베이루트, 아테네, 런던으로 이어지지만 정보를 팔고 있는 전지한 프랑스인 조직 외에는 아무도 아브너 요원들이 뭘 하는지 모르는 듯하다. <복수>에서 이 가족으로 구성된 스파이 조직은 ‘르 그룹’으로 알려져 있다. <뮌헨>에서 이들은 오히려 ‘루테세’ 같아서 훌륭한 요리사인 아브너에게조차 ‘전통적인’ 요리를 내온다(루테세는 뉴욕의 유명한 프랑스 식당-역주). 이들 미식가 무정부주의자들은 반쪽 액션영화에 철학적인 요소를 버무리며 의도하지 않은 코미디적인 순간들을 제공한다. “우리가 어떻게 조국을 되찾았다고 생각하나? 친절로?”
복수를 거듭하며 <뮌헨>은 점점 어두워져 고뇌로 점철되는 악몽이 되고 만다. “우리는 의로운 사람들이어야 하고 그게 아름다운 삶이야.” 폭파 전문가는 울부짖지만 동료들은 여자 살인청부업자(마리 호세 크로즈)를 살해한다. “네가 바로 우리가 기도한 존재야.” 아브너의 어머니조차 영화의 궁극적인 유대인 애국주의 표현을 사용하며 아들을 확신시키려 하지만 막상 아들이 한 일을 알고자 하지는 않는다.
도덕적 불확실함에 눌린 <뮌헨>은 있을 수 없는 상황들을 어렵게 어렵게 억지로 뚫고 나간다(한 장면에서 르 그룹은 모사드 요원들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수행원들을 동시에 같은 안전 가옥에서 지내게 한다. 그중 한명이 아브너에게 “고향을 잃은 게 어떤지 당신은 몰라”라고 말할 때 알 그린의 <Let’s Stay Together>가 흘러나온다). 하지만 영화 후반부에 오프닝 시퀀스처럼 매끈하진 않지만 스필버그는 유혈의 72년 사건을 한번 더 보여주면서 거슬리지만 거부할 수 없는 진실을 들려준다. 생존한 이스라엘 인질들이 공항으로 끌려가지만 공포로 초래된 폭력의 촉발로 테러범들에게 모두 죽는 장면이다.
독일 경찰이 서투르게 구조 작전을 펴면서 벌어지는 이 시퀀스를 스필버그는 아내와 섹스를 나누는 아브너의 고통스런 표정과 번갈아가며 편집하고 영화 오프닝에서 사용된 슬픈 멜로디를 입혀 보여준다. 이것이 감독의 ‘빅뱅’ 이론인가? 그의 울화인가? 전형적인 학대의 경우처럼 스필버그는 그 자신의 절망을 관객에게 쏟아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