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키에 스크린 앞에 앉아 영화를 보면서 성장해 왔던 나의 옛 모습을 뒤돌아보면, 배우에 대한 동경과 판타지에 사로잡혀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영웅본색>에서 담배를 꼬나물고 돈을 불태우던 저우룬파(주윤발), 전화박스에서 숨을 거두던 장궈룽(장국영), <탑건>에서 F-14 톰 캣의 시끄러운 굉음에 쾌감을 느끼게 했던 톰 크루즈. 내 나이 또래라면 누구나 하나쯤은 고히 간직했을 법한 브룩 쉴즈, 피비 케이츠, 소피 마르소의 브로마이드. 할리우드와 홍콩 배우에 대한 동경으로 방안 가득 브로마이드를 채워넣었던 내 세대의 평범한 영화 체험은 20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획기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1994년부터 시네마테크 활동을 하며 남들보다 더 많은 영화를 보게 되면서부터 그 평범함과는 점차 거리를 두게 되었다. 배우보다는 감독을 먼저 보게 되었고, 할리우드 영화보다는 유럽이나 제3세계 영화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새로운 영화보기의 경험은 익숙하지 못한 새로운 길을 여행하는 것처럼 피곤하고 힘든 일이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 이 길에 익숙해지기 시작하면서부터 좀 더 다양한 영화적 재미를 만끽할 수 있게 되었다.
고다르나 트뤼포의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와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 이야기>, 구로사와 아키라의 <칠인의 사무라이>와 <이키루>, 레오 까락스의 <소년 소녀를 만나다> 등의 영화를 경험하면서 감독 뿐 아니라 이전에는 만날 수 없었던 스크린의 배우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 만남은 이전에 내가 동경해 마지않았던 배우들의 이미지보다 더욱 깊이 각인되었다. <네 멋대로 해라>의 장 폴 벨몽도와 진 세버그, <400번의 구타>의 장 피에르 레오, <동경 이야기>의 류 치슈와 하라 세츠코, <칠인의 사무라이>와 <이키루>의 시무라 다케시와 도시로 미후네, <소년 소녀를 만나다>의 드니 라방과 미레이유 페리에 등 열거하기 힘들 정도의 배우들이 무차별적으로 나를 매료시켰다.
그 중 나를 가장 매료시켰던 배우는 단연 마리아 팔코네티였다.(광주국제영화제에서 일하고 있을 당시 홍보대사로 너무나 열심히 활동하는 문근영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크라이테리온에서 출시된 <잔다르크의 열정>을 고심 끝에 선물한 적이 있다. 문근영의 진실됨과 마리아 팔코네티에 대한 배우로서의 각별함이 배우로서의 가능성과 발전으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칼 테어도르 드레이어의 무성영화 <잔다르크의 열정>에서 숭고하면서도 희생적인 잔다르크 역을 맡은 마리아 팔코네티는 원래 지방의 연극배우 출신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이 영화에서 잔다르크가 지닌 시골처녀의 순박함과 순교자의 열정을 혼신의 힘을 다해 표현하고 있다. 영화는 수개월에 걸쳐서 진행되었던 잔다르크의 종교 재판을 마치 하루 사이에 일어난 일인듯 시간을 압축시켜 다루고 있으며 시종일관 잔다르크를 핍박하는 이들과 고통스러워 하는 그녀의 얼굴을 클로즈업하여 교차시키는 수법으로 수난의 시간을 ‘잔혹‘하다고 할 정도로 부각시킨다.
배우들의 미세한 표정까지 담아낸 클로즈업을 통해 영화 형식이 적절하게 활용될 경우 이 정도로 충격적인 힘을 가질 수있구나 하는 실감을 안겨준 영화였다. 그래서 지금도 마리아 팔코네티의 순교자적인 희생과 구원의 이미지는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는 것이다. 팔코네티가 이 영화에서 보여준 숭고한 이미지는 내가 새로운 영화에 대해서 탐구하고 싶은 열정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새로운 영화에 좀 더 쉽게 조우할 수 있도록 도와준 원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