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석의 B딱하게 보기]
[B딱하게 보기] 사랑은 기억을 지배한다, <이터널 선샤인>
2006-02-24
글 : 김봉석 (영화평론가)

인간에게 기억이란 무엇일까? <블레이드 러너>나 <공각기동대> 같은 사이버펑크물에서는, 기억이 인간의 정체성이라고 말한다. 과거의 기억에 대한 태도나 감흥 같은 것이,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게 만든다. 인간에게 기억이란, 그 자신이다. 그러면서도 인간이란 또한, 능동적인 존재다. 기억이란 것에 모든 것을 의존하지도 않는다. <토탈 리콜>의 퀘이드는, 자신의 정체가 악인 하우저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는 하우저로 돌아가지 않고, 이식된 기억을 따라 영웅 퀘이드로 사는 것을 택한다. 그가 기억하는 것이, 그를 이끌어가는 것이다. 가짜 기억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선택한다. 인간은 많은 과거를 잊어버린다. 때로는 거짓된, 변형된 기억이 그를 사로잡는다.

인간에게 기억이란 절대적인 것일까? <이터널 선샤인>의 조엘은, 클레멘타인과의 깨어진 사랑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그 기억을 지워버리려 한다. 기억은 모두 지워진다. 하지만 기억이 지워진 뒤에도, 조엘은 무언가를 직감한다. 그저 마음이 이끌린다. 조엘만이 아니라 클레멘타인도, 그들이 처음 만났던 장소로 향한다. 그리고 다시 만나고, 다시 사랑에 빠진다. 그들만이 아니다. 의사를 사랑했던 메리는 기억이 모두 지워진 뒤에도, 다시 그를 짝사랑한다.

어쩌면 단지 사랑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랑이란 단지 감정의 화학적 반응이 아니라, 미지의 문이 열리는 마술적 순간이기 때문에. 결코 말과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이해할 수도 없는, 그렇기 때문에 한없이 강렬한 매혹의 마술이라고. 기억을 지워도, 그들에게는 여전히 사랑이 남아 있다. 사랑의 흔적은 단지 기억으로 남는 것만이 아니니까. 마음 어딘가에서 혹은 우리의 몸이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영혼의 어딘가에, 나이테처럼 각인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사랑이란 위대한 것이고, 모든 것을 초월하기 때문이라고.

어쩌면 기억이란, 인간이 만들어낸 환영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이 풍진 세상에서 살아가는 자신을 달래기 위한, 그 무엇. 자신의 존재와 역사를 합리화하기 위한, 기만 같은 것. 인간이란 기억을 통해 자신을 인식하고, 타자와의 추억을 간직하지만, 그건 어쩌면 순간의 꿈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이란,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기억을 만들어내는, 조작하는 힘마저 가지고 있으니까. 기억이란 불완전한 것이고, 말 그대로 일장춘몽이다. 아마 우리의 인생도 그런 것이겠지만.

<이터널 선샤인>이 가슴 아팠던 이유 하나는, 그것이었다. 이유를 알지 못한 채, 그들은 기억을 지우려 한다. 지운 뒤에도, 가슴이 왜 그리 아픈지 알지 못한다. 기억이란 건 부질없는 것이다. 그보다는 비과학적인 사랑을 믿는 것이 낫다. 자신이 사랑했다는 증거보다는, 마음속 어두운 저편 어딘가에 묻혀 있는, 비논리적이고 초현실적인 무엇을 찾는 게 낫다. 그게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믿음은 존재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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