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울고 있어도 웃음이 난다, <구세주>의 조상기
2006-02-27
글 : 김나형
사진 : 이혜정

혹시 조상기가 누군지 아세요? 네이버에 물어보니 <미지왕>이라는 옛 영화가 튀어나온다. 파격적인 정사 장면으로 시작하여 기괴한 B급 유머를 늘어놓는 1996년 컬트코미디가 그의 데뷔작이었다. 사연인즉 이러하다.

당시 미술학도였던 조상기는 <미지왕> 오디션 공고를 본다. 결혼식에 모인 하객을 그린 듯한 일러스트에는 괴상한 인물들이 잔뜩 모여 있었고, 그 위로 ‘개성있는 분들을 찾습니다’라는 문구가 씌어 있었다. 졸업전은 끝났고 군대는 안 갔고 심란하기도 한 차에 추억이나 만들어보자 싶어 문을 두드린다. 오디션으로 뽑힌 27명의 신인 중에 조상기는 주연 ‘왕창한’으로 캐스팅된다.

<미지왕>을 찍으면서 그는 영화에 푹 빠져버렸다. 배고픔도 시공간도 다 잊고, 여러 사람이 한마음로 작업하는 게 너무 좋았다고 했다. 그렇게 <미지왕>은 연기자로서의 길을 열어주었지만, 그 길 참 혹독했다. “다시 영화를 하고 싶다는 생각, 너무나도 많이 했었어요. 하지만 기회가 오지 않았습니다. <미지왕>이 당시로서는 너무 파격적인 영화였으니까요. 드라마 <내 마음을 뺏어봐>에 출연한 뒤 군대를 다녀왔는데, 갔다오니 기회가 더욱 없더라고요.” 그는 10년 동안 영화를 그리워하면서, 몇편의 드라마에서 크고 작은 조연을 맡았다.

그러던 조상기에게 <구세주>의 ‘칠구’ 역할이 주어졌다. 칠구 이미지에 맞는 배우가 없어서 주연배우들이 정해진 뒤에도 칠구 자리는 계속 공석이었다. 조상기를 아는 한 매니저가 그의 이름을 들먹였고 김정우 감독은 “내가 왜 이 배우를 생각 못했지” 했다. 뒷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리워하던 영화에 돌아온 기쁨이 클 수밖에 없다. 진심으로 기다려온 기회인 만큼 비중을 늘리려 하거나 튀려고 했을 법도 하다. 그러나 조상기는 칠구의 포지션이 무엇이며, 자신이 어떤 식으로 충실해야 더 빛날 수 있음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 “철저히 어시스트를 해야 하는 역할이라 생각했어요. 튀어나오지 않는. 성국이 형은 또 본인이 주인공이니까 절제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요. 형이 ‘칠구가 여기서 이렇게 나오면 어때?’ 하면서 도움을 많이 줬습니다.” 그 때문인지 최성국과 조성기의 콤비 플레이는 최성국-신이의 그것보다 훨씬 감칠맛이 난다.

칠구는 부잣집 외동 정환(최성국)의 단짝 친구다. 둘 다 골때리는 무능력자이긴 마찬가지지만, 정환에겐 부모가 주는 돈이 있고 칠구에겐 없다. 10년째 만년 대학생 노릇을 하며 졸업여행을 유람처럼 여기는 정환은, 칠구의 등록금이며 여행비를 모두 대준다. 그 점을 노리는 건지 생각이 없는 건지 모호하지만, 칠구는 그런 정환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시키는 일은 다 한다. “칠구는 바보죠. 그렇지만 처음 시나리오를 받았을 땐 칠구가 바보라고는 생각지 않았어요. 정환에게 빈대붙어서 금전적으로 이용도 할 줄 아는 인물인데 어찌 엮여서 따라다니다보니 그런 지경까지 가게 된다고요. 하지만 감독님은 칠구가 순간순간에 충실하고 그만큼 감정 기복이 큰 인물이라 했습니다.”

그는 칠구가 바보라 했지만, 칠구는 그렇게 단순한 캐릭터가 아니다. 어수룩하지만 못되거나 못나지 않은, 미묘하게 복잡한 인물이다. 그런 면에서 칠구는 실제 조상기와 닮았다. 조상기가 “정식으로 연기를 배운 적이 없으니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을 때 <피아노>의 오종록 PD는 “네가 지금 가진 모습이 좋아. 연극영화과 가서 굳이 정형화할 필요없다”고 조언했다. 그의 말대로 조상기에겐 ‘조상기가 가진 뭔가’가 있다. 그는 분명 하나의 표정을 짓고 있는데 그 속에서 여러 다른 느낌이 배어난다. 다만 아직 충분히 익지 않아 미묘하게만 감지할 수 있을 뿐이다. 조상기는 그것을 “선생님한테 맞고 아파서 엉덩이를 비비는 친구를 볼 때의 느낌”이라 표현한다. 감정이 극에 달하면 순수하게 슬픈 연기를 해도 웃음이 난다고.

32살. 그의 나이 적지 않건만, 그는 소년처럼 설레한다. 그의 경력 짧지 않건만, 신인처럼 어색해한다. 이제 ‘조상기’라는 이름을 아마 더 많은 사람이 기억하게 될 것이다. <구세주>는 조상기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번 길은 전보다 순탄한 길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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