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연인은 언제나 스크린 밖에 있었지, 스크린 안에 존재한 적은 없다. 만질 수 없고 체취를 맡을 수도 없고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는 상상 속의 연인에게 나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나는 다만, 스크린 속 배우들의 어떤 이미지에 간혹 감동할 뿐이다. 이를테면, 삶의 상처를 담고 냇물처럼 흐르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주름, 눈빛 하나만으로도 시끄러움을 표현해내는 잭 블랙의 기괴한 표정 아니면, 소리 없는 움직임으로 악기가 되는 버스터 키튼의 정직한 몸? 그래서 내겐 죽도록 싫어하는 배우는 있어도, 죽도록 사랑하는 배우는 없다. 그러므로 이 글은 ‘스크린 속, 나의 연인’이 아니라 그나마 일관되게, 그것도 매우 가늘고 긴 시간동안 나의 관심을 끌어왔던 어느 배우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의 이름은 스티브 부세미다.
어느 날인가, 나의 건장한 룸메이트는 자신의 소심함에 어이없어 하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이 시대, 남자의 소심함이 얼마나 큰 미덕인지 모르는군.” 자기성찰을 할 줄 모르는 뻔뻔한 남자들 틈에서 소심한 남자들은, 적어도 자신을 괴롭힐지언정, 폭력적이지 않다는 그의 논리는 일면 설득력이 있었다. 예민한 신경이 스스로를 말라 죽일지라도,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나의 소심함이 당신을 잠시 피곤하게 만들지라도, 세상을 평정하는 무소불위의 독불장군이 되지는 않겠어. 그래서 소심한 남자의 삶은 비극적이다. 홍콩 누아르 속 주인공들처럼 폼 나게 비극적인 것이 아니라, 단 한순간도 피로를 떨쳐버릴 수 없어서 비극적이다. 나는 스티브 부세미를 볼 때마다 그런 상념에 빠져든다. 그의 몸은 언제나 날카로운 바늘처럼 위태롭고 영양실조에 걸린 듯이 창백한 얼굴은 죽음을 눈앞에 둔 듯하고, 쉴 새 없이 흘러나오는 불만 가득한 말들은 분열증적이다.
이건 그가 맡은 역할이 강도나 킬러나 그저 평범한 남자일 때나 상관없이 이미 그에게 주어져 있는 어떤 불운한 분위기다. 그래서인지, 그가 어떤 연기를 하든 그는 단 한번도 안정되거나 행복해 보인 적이 없다. <판타스틱 소녀 백서>에서처럼 소녀에게 사랑을 받아도, <커피와 담배>에서처럼 여전히 수다스러워도, 코헨형제의 영화에서처럼 어딘지 모자란 살인마가 되어도, 내 눈에 그는 날이 갈수록 자신도 방어하지 못하는, 퀭한 눈빛의 나약한 짐승이 되어 간다. 세상의 모순을 자기 것이 아닌 양 너털웃음으로 날려버리는 호탕한 남자들과 달리, 이 우유부단한 남자는 그 모순들을 하나하나 자신의 신경에 새기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에게 소심함은 운명이다.
그가 <파고>에서 토막 난 시체가 되어 분쇄기 속의 뼛가루로 남았을 때, 나는 이것이 바로 이 시대, 소심한 남자들의 말로가 아닐까, 잠시 슬퍼했다. 마초가 득세하는 시대, 꽃미남이 각광받는 시대에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자신에게 생채기를 내다 사라지는 소심한 남자들. 그들에게 내려진 가혹한 형벌. 물론, 나는 스티브 부세미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연민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소심함에 고통 받다가 죽어가지 않도록, 마초들이 여전히 건재한 세상에서 그 혼자만 괴로움에 지쳐가지 않도록, 소심한 그가 행복해지는 순간까지 애정 어린 시선으로 지켜보는 것. 우습지만, 이건 나에게 일종의 책임감과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