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질투는 나의 힘, <손님은 왕이다>의 이선균
2006-03-04
글 : 이영진
사진 : 이혜정

“쟤, 뭐 하는 놈이야?” 충격이었다. 새벽 3시였지만, 하는 수 없었다. 궁금증은 풀어야 했다. 친구에게 무턱대고 전화를 걸어 물어봤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을 졸업했던 2001년의 어느 날이었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비디오로 보다가 류승범이라는 괴물을 발견한 이선균(31)은 그가 연기를 배운 적이 없는 생짜 배우라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곱빼기’로 먹었다. “에너지가 굉장했다. 이후로도 실망한 적이 없다. 비슷한 패턴의 연기를 하는 것 같지만 뿜는 에너지는 다 달랐다.” <손님은 왕이다>에서 김양길(명계남)의 정체를 알게 된 안창진(성지루)만큼이나 그때의 이선균도 당황했을 것이다. 연극반에서 활동하다 결국 다니던 대학을 중도에 그만두고 연극원에 들어갔던 그로서는 밀려드는 열패감에 분통을 터뜨릴 만도 했다.

울뚝불뚝 솟아오른 질투가 힘이 된 것일까. 마침 운도 찾아들었다. 연극원 시절, 그를 눈여겨봤던 이진아 교수가 뮤지컬 <록키 호러 픽쳐쇼>를 무대에 올리면서 그에게 출연 제안을 한 것이다. “춤이랑 노래랑 잘하는 게 아니라고 했는데 선생님께서 B급 뮤지컬이니까 상관없다고 하시더라. (웃음) 그 이후에 뮤지컬 제안이 좀 들어왔는데 일천한 실력이 들통날까봐 일부러 피했다.” 뮤지컬 덕에 곧바로 시트콤 <연인들>에 출연했지만, 이선균은 그때를 떠올리면 식은땀이 난다. “대사도 얼마 없는데 리허설없이 하려니까 안 되더라. 카메라를 어디 봐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6년 공부하면 뭐 하나 자기 원망 많이 했다. 현장 가면 다 바보가 되는데….” 현장 경험을 좀더 쌓아야겠다는 각오를 다졌고, 이후 그는 <서프라이즈> <일단 뛰어> 등을 시작으로 단역도 가리지 않는 배우 수업을 했다.

그렇게 덤벼든 것이 벌써 5년째. 아직 관객에게 이선균은 낯설다. <쇼쇼쇼> <국화꽃 향기> <인어공주> <알포인트> 등에서 꾸준히 얼굴을 내보였지만, 대개 통통 튀는 역할보다 금세 사라지는 그림자 같은 배역을 더 많이 맡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뭘 하고 싶다고 세상이 다 기회를 주는 것도 아니고, 또 지나치게 과장된 연기를 필요로 하는 역할들은 싫고, 소모되는 역할은 거절했더니 나중엔 일이 잘 안 들어오더라.” 고등학교 동창이 라인 프로듀서였던 <손님은 왕이다>의 이장길 역도 처음엔 거절했다. “극중 배역의 나이가 40대 초반이라고 하는데 왜 굳이 나를 쓰려고 할까 싶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이장길은 보조적인 기능만을 수행하는 역할에 불과했다. 찍고 나서 편집당할 군더더기가 없다는 것 말고는 매력이 없었다. (웃음)”

그런데 어쩌다 마음을 바꿔먹은 것일까. “감독님과 만나서 새벽까지 술을 마시다가 적극적으로 캐릭터를 다시 만들어보자고 하시기에 그러겠다고 했다.” 불륜 뒷조사가 전문인 <손님은 왕이다>의 ‘개코’ 이장길은 이선균의 제안에 따라 “구타를 하면서도 섹스를 하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풍선껌을 부는” 시니컬한 악동으로 거듭났다. 시나리오의 대사가 실제 영화에 거의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이장길의 대사가 바뀐 것은 오기현 감독이 이선균을 신뢰한 결과이기도 하다. 오 감독은 이선균에게 애드리브를 허용했고, 이선균은 처음으로 맘껏 풀어진 연기를 해보일 수 있었다. “선배들 도움도 많았다. 주연배우들은 불가피하게 자신의 감정을 위해서 연기할 때 울타리를 쳐놓는 경우가 많다. 테이크를 많이 갈 수 없는 조연들로서는 위축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명계남, 성지루 두 선배는 맘껏 놀 수 있게 해줬다. 안 되면 어떻게 하라가 아니라 안 되면 다시 찍지 뭐, 이런 생각으로 할 수 있어서 좋았다.”

<손님은 왕이다>에서 이선균에게 호기심을 품은 이라면, 다음 일은 문소리·김태우 주연의 <사과>가 어서 개봉하기를 바라면 된다. 이선균은 <사과>에서 어느 날 갑자기 이별 통보를 한 뒤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 이미 결혼한 문소리를 혼란에 빠뜨리는 남자친구 역할을 맡았다. “결혼을 앞두고 남자들도 두려움과 부담을 느끼잖나. 그래서 훌쩍 여자친구 곁을 떠날 수도 있고, 또 갑자기 보고 싶다며 연락해서 만나자고 할 수도 있고. 충분히 개연성이 있어서 공감하고 찍은 영화다. 나중에 시사회 때 가서야 악역인 줄 알았다. 영화를 본 사람들이 다들 재수없다는 반응이더라. (웃음)”

대학 시절, 선배가 공연을 앞두고 도망가는 바람에 대역배우로 무대에 선 뒤 뒤늦게 발견한 재능을 믿고 ‘딴따라’가 됐지만, 그는 어떤 면에서는 여전히 서툴다. “졸면 안 돼요!” 사진촬영 도중 졸다가 사진기자에게 주의를 받질 않나, 매니지먼트사 홈페이지 특기란에 ‘플루트, 댄스, 수영’이라고 적혀 있어 “그 많은 걸 언제 다 배웠어요?”라고 물었더니 자신의 진짜 특기는 “농구, 당구, 포커”라고 털어놓질 않나. “언제까지 내가 배우로 살 수 있을까” 싶어 가슴이 답답해질 때면 대학 후배들의 에너지 끓는 공연장을 찾아가서 원기를 회복한다는 이선균. “평생 배우로 남을 수 있다고는 말 못한다. 다만 주어진 상황 안에서 내 것을 찾고 또 표현하려고 애쓰다보면 유통기한이 조금씩 늘어나지 않을까?” 화려한 스타덤이 그의 몫인지 장담할 수 없지만, 견실한 배우의 길을 걷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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