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깊은 강이 되고 싶은 남자, <브로크백 마운틴>의 히스 레저
2006-03-06
글 : 박혜명

미 언론들마다 난리가 났다. 두 카우보이 청년의 오랜 사랑을 그린 리안의 신작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스물여섯살짜리 호주 출신 꽃미남(Aussie heartthrob)이 진정한 배우의 연기를 보여주었다고 여기저기에서 칭찬이다.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제이크 질렌홀은 감정 표현에 능동적이고 관계에서 적극적인 인물 잭 트위스트 역을 맡았고 히스 레저는 무서운 기억을 내면에 가두고 살아온, 억눌리고 고독한 인물 에니스 델 마 역을 맡았다. “히스 레저는 분노에 찬 독백이나 배우의 자의식이 드러나는 화려한 연기술 없이도 (에니스를) 연기해낸다. 툭툭 끊기는 말들, 동작들 그리고 동물적인 욕구들의 모자이크로 에니스의 슬픔을 깊이 가늠해 보인다.”(<엔터테인먼트 위클리>) “에니스 델 마 역을 하면서, 히스 레저는 보는 사람의 뼛속까지 스며들 것 같은 외로움을 뿜어낸다. 지독히 추운 겨울의 축축함처럼.”(<LA타임스>) 기자들도 기자들이지만 제일 흥분한 사람은 동명 원작 소설의 작가 E. 애니 프루다. “그는 너무나 본능적이다. 대체 어떻게 이 배우는 내 머릿속을 그토록 잘 꿰뚫고 있었던 걸까? 나보다 더 캐릭터를 잘 이해하고 있다.”

히스 레저는 자기 말로 “이 세상에서 제일 고립된 곳”이라는 호주 서부의 소도시 퍼스에서 태어났다. 연기라면 전문학교는커녕 수업시간에도 한번 접하지 못했다. 나름 재능을 보인 필드하키 선수의 꿈을 접고 연기를 하겠다고 결심한 것은, 친누나의 지인을 통해 열세살 때 <익살부리기>란 영화에 엑스트라로 출연하면서였다. “같은 조연이라도 더 기억에 남지 않을까 싶어” 평범한 역이 아닌 게이 역을 맡기도 해봤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연기가 형편없었다. 매번 “이것이 최악의 연기군” 하며 자기 학대를 서슴잖던 그는 예닐곱편의 TV 시리즈와 영화를 찍은 뒤 열여덟살 때, 본격적으로 일을 해보자 마음먹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할리우드에서 호주 출신의 감독 그레고 조던을 만나 10대 소년의 범죄영화 <두개의 손>의 주연을 덜컥 맡았다. 이후로 히스 레저는 근사한 외모의 학교 아웃사이더(<내가 널 사랑할 수밖에 없는 10가지 이유>)에서 시작해서 중세시대 기사(<기사 윌리엄>), 교도소 간수(<몬스터 볼>), 서부개척 시대의 영웅(<네드 켈리>), 19세기 말의 영국인 장교(<포 페더스>) 등을 맡아왔다. 도무지 이 필모그래피로는 배우가 커리어의 예술성과 흥행성의 적정 비율을 고려한다든지 주연만 고집한다든지 감독 이름만 따진다든지 하는 계산은커녕 배우 자신의 취향조차 알 수가 없다. “나는 연기하는 게 재미있어서 이 길을 선택했던 것뿐이다. 재미없다고 느껴지면 언제라도 그만둘 거다.” <브로크백 마운틴>의 차기작으로 평범한 사극멜로 <카사노바>에 출연한 것도 머리를 식히면서 자기 자신을 즐겁게 풀어두고 싶었다는 이유, 그뿐이다.

소설 <폭풍의 언덕>의 주인공 히스클리프에서 이름을 따 붙였다는 히스 레저는, 별로 크지는 않지만 짙고 깊은 눈동자와 그에 어울리는 낮고 풍성한 음색을 지녔다. 브로크백 산자락 같은 서정성을 품은 그를 두고 리안 감독은 “이것저것 시도해보려는 제이크(질렌홀)와 달리 한 가지만 생각하고 거기에 온전히 집중하는 타입”이라며 “놀랍도록 섬세한 배우”라고 평했다. 히스 레저는 에니스의 나이 들어감을 음성의 높낮음으로 미세하게 조절하고, 오래도록 말을 탄 사람이니 다리는 약간 휘고 어깨는 굽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말수가 적은 에니스의 억눌림이 육체적으로 드러나야 할 것이라 믿고 일그러진 입모양과 일그러진 주먹 모양을 만들었다. 리안 감독은 “히스는 그 상황 안에서 그냥 살고 있는 듯하다”고 이야기하고, 히스 레저는 자기가 연기를 정식으로 배워본 적이 없어서 “배우면서 해야 할 실수를 촬영현장에서 다 했다”고 말한다. 재미있기 때문에 연기를 하지만, 연기를 하는 동안에는 마음을 다 바쳐 그 인물로 살아가는 히스 레저는 실제 연애를 하더라도 출연작에서 만난 상대 여배우들과 했다. 인적이 드물었던 브로크백 산자락의 서정적인 풍경은 태생 그대로의 아름다움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이 어린 여자들은 어른스러운 척하려고 해서 싫다”고 최대 18살 연상의 여자하고까지 연애하더니(이때의 나이가 열여덟이었다) 수더분하게 생긴 또래 여배우 미셸 윌리엄스와 동거해 딸까지 낳은 히스 레저의 삶은 배우로서나 개인으로서나 길들여질 것이 아닌 듯하다. <그림 형제>에 출연했던 여배우 레나 헤디는 이런 말도 했다. “그에게 감히 ‘노’(No)라고 대꾸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과연 있을까 싶다. 그의 에너지는 너무나 강력하게 상대방한테 전달된다.” 미셸 윌리엄스가 그의 오른쪽 팔뚝 위에 써준 대로 문신을 새겨넣었다는 ‘Old Man River’라는 구절처럼 히스 레저는 강이 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래 흐를수록, 좁아지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땅을 깎고 또 깎아 넓고 깊어지는 존재 말이다.

사진제공 GAM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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