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조르주 바타유의 인용. “(중략) 그러나 금기를 범하는 순간 우리는 고뇌를 느끼며, 고뇌와 함께 금기가 의식되고, 죄의식도 체험하게 된다. 이러한 고뇌와 죄의식 끝에 우리는 위반을 완수하고 성공시킨다.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우리의 의식은 그 위반을 즐기기 위해 금기를 지속시킨다는 것이다. 금기를 어기려는 충동과 금기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고뇌를 동시에 느낄 때 비로소 에로티시즘의 내적 체험은 가능한 것이다….”
그 다음 바타유에 기댄 미셸 푸코 글의 인용. “… 그러므로 위반과 한계의 관계는 검은색과 흰색, 금지된 것과 허용된 것, 외부와 내부, 제외된 것과 주택이라는 보호된 공간의 관계와 다르다. 오히려 어떤 고지식한 가택 침입도 이겨낼 수 없는 나선형의 관계에 따라 위반은 한계에 연결된다. 어쩌면 밤중의 섬광 같은, 시간의 밑바닥에서, 밤이 부인하는 것에 짙고 검은 존재를 주고, 내부에서 그리고 그것을 송두리째 그것을 비추고, 그러면서도 그것에 자체의 생기있는 빛, 자체의 격심하고 우뚝 솟은 특이성을 빚지고 있으며, 밤의 절대력이 각인되는 그 공간 안으로 사라지고, 마침내 어둠에 이름을 붙인 뒤에 침묵하는, 말하자면 그 어떤 것.”
다시 한번만 두개의 인용을 반복해서 느리게 읽어주실 것. 왜냐하면 장 클로드 브리소의 아홉 번째 영화 <남자들이 모르는 은밀한 것들>에 관한 글은 두개의 인용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더이상 덧붙일 말이 없을 정도이다. 금기와 위반, 그리고 그로 인해 알게 되는 한계는 이 영화의 유일무이한 스펙터클이다. 물론 브리소는 그 안에서 바로크적인 과장, 바흐와 헨델, 비발디의 오라토리오들, 정신분석적 담론을 유혹하는 광경들, 마르크스의 우화적 버전, 17세기 프랑스 연애소설의 전형적인 계약, 가장 나쁜 니체주의라고 할 만한 인물, 사드적인 명령으로 이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를 뒤죽박죽으로 만든다. 그러나 브리소는 거기서 서스펜스를 끌어내지 않는다. 반대로 그는 이 모든 것을 들고 21세기 프랑스의 일상생활 안으로 들어온다. 그런 다음 그것들이 일상생활 안에서 버티는 금기와 그 경계를 놓고 벌이는 위반을 놓고 게임을 한다. 서스펜스는 파리의 일상생활과 담론들, 그 게임 안에 있다. 그 안에서 필연적으로 한계와 마주쳐야 한다. 그때 영화는 프로이트적인 자리에서 시작한 다음 마르크스적인 토픽을 지나 니체적인 신화와 마주친다. 물론 오해하면 안 된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굉장해지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브리소가 금기와 위반을 놓고 그 안에서 섹스라는 게임을 벌이는 것이 지금 프랑스영화에서 특별한 것도 아니다. 이를테면 카트린 브레이야(<로망스> <팻걸> <섹스 이즈 코메디> <지옥의 체험>), 가스파 노에(<돌이킬 수 없는>), 클레르 드니(금요일 저녁>), 세드릭 클라피시(<에스파냐의 여인숙>), 베르트랑 보네로(<포르노그래프>), 세드릭 칸(<권태>), 필립 그랑드리외(<새로운 삶>), 올리비에 아사야스(<데몬러버>)>. 하지만 그들과 달리 철학적 잡동사니로 가득 찬 브리소의 이 영화에서 흥미진진해지는 것은 담론(이나 장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본다는 데 있다. 그때 이 모든 것이 에로틱해진다. 프로이트도, 마르크스도, 니체도. 혹은 스트립댄스클럽도, 파리의 지하철도, 사무실의 방문과 복도도, 아파트의 침대도, 부르주아들의 집단난교 파티도, 그리고 독수리를 영접하는 죽음도.
구경하기, 진지하지만 무능력한
한심하게도 여기서 브리소가 하는 일은 그저 구경하는 것이다. 그것이 전부이긴 하지만 그는 그것을 진지하게 구경한다. 그러므로 점점 나빠지는 이야기 안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테마가 있음을 놓치면 안 된다. 그건 무능력이다. 내 생각에 이 영화의 핵심은 구경의 무능력이다. 그 안에서 브리소가 보는 것은 우리 시대 에로티시즘의 실패다. 혹은 실패한 스펙터클. 발기하지 않는 구경, 꼴리지 않는 스펙터클. 두명의 주인공 상드린과 나탈리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다음 남자들과의 사랑없는 섹스로 다시 세상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여기에는 텅 빈 육신, 기의없는 사랑만이 남는다. 혼자 버려진 인간에게 유일하게 잃어버린 연속성을 다시 이어주는 에로티시즘은 던져진 존재의 불연속성, 남겨진 육신의 폐쇄성을 포기하게 만들 만한 그 어떤 유혹도 거기에는 남아 있지 않다. 바타유처럼 말하면 여기에 마음의 에로티시즘, 성스러운 에로티시즘은 사라지고 오직 육신의 에로티시즘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지안 로렌조 베르니니의 조각 <성녀 테레사의 황홀경>이 보여준 그 표정을 섹스에 대한 시뮬라크라로 흉내내는 상드린의 제스처. 상드린은 벌리고, 빨고, 핥고, 꿈틀거리지만 그건 그녀의 연기일 뿐이다. 거기에는 마음도, 성스러움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브리소가 할 일은 구경하는 일밖에 없다. 하지만 그 구경은 매우 잔인한 무능력이다. 브리소는 적나라하게 구경한다. 벌어진 다리 사이를 무심하게 바라보고, 그 사이의 털을 흘낏 쳐다보고, 벌어진 성기를 보고, 그 성기를 매단 육신을 또 본다. 그리고 그가 보는 모든 것을 우리도 함께 본다. 그때 브리소의 내기가 시작된다. 자, 여기엔 아무것도 숨겨놓지 않았다. 그러므로 여기서 무엇을 보았나요, 라는 질문에는 얼마든지 대답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무엇을 원하나요, 라고 물을 때 왜 대꾸할 수 없는 것일까? 보는 것과 보여주는 것. 행위의 자유로운 선택. 하지만 그 선택에서 회피할 수 없는 구조. 이 영화가 끔찍해지는 것은 전략이 구조에 복종할 때다. 그 안에서 아무도 도피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항상 토대가 욕망보다 먼저 도착한다. 은밀한 것은 욕망이 아니라 거래다. 날뛰는 리비도, 유혹하는 육신. 그때 붙잡으러 달려오는 것은 욕망의 질문이 아니라 자본의 법칙이다. 리비도의 정치경제학.
영화가 보여주는 은밀한 스펙터클
이 적나라한 영화에서 ‘남자들이 모르는 은밀한 것들’은 나오지 않는다. 혹은 그런 것이란 원래 없다. 브리소가 제안한 제목은 그냥 <은밀한 것들>(Choses secretes)이다. 거기에 ‘남자들이 모르는’이란 말은 없다. 그냥 덧붙인 말이다. 아마도 이 제목을 붙인 사람은 두 여자 사이의 계약 혹은 레즈비언 섹스만을 본 것이다. 때로 ‘각색한’ 제목은 그 영화를 홍보하고 있는 영화사에서 본 감상문 역할을 한다(나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이 영화를 그냥 <은밀한 것들>이라고 부를 생각이다. 이하는 모두 <은밀한 것들>). 그러므로 다시 질문할 수밖에 없다. 은밀한 것들은 누가 알지 못하는 것일까? 그런데 은밀한 것은 무엇일까?
내 대답은 스펙터클이다. 스펙터클? 그렇다. 그것이 이 영화의 역설이다. 그것을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기서 대부분의 장면이 그것을 보거나 보여지기 때문이다. 브리소는 이 영화를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광경(Urszene)으로 만들지 않는다. 그는 장면을 쪼개고 또 쪼갠다. 나누고 또 나눈다. 거의 1200개의 숏에 달하는 편집은 단지 신을 나눈 것이 아니라 섹스하는 그들의 포옹을 찢어놓는 것이다. 그때 여기에는 몽타주는 없고 단지 컷이 있을 뿐이다. 컷(cut)이란 말이 갖고 있는 본래의 의미로 되돌아온 잔인한 베어냄. 마치 수없이 자르고, 뒤엉킨 육신을 베어내고, 삽입된 성기를 잘라내는 것 같은 칼날. 여기서 그 칼날은 보고, 보여주는 시선이다. 푸코의 마지막 경고를 잊으면 안 된다. “어둠에 이름을 붙인 뒤에 침묵하는, 말하자면 그 어떤 것.” 말 그대로 (이 영화의 제목인) ‘Choses secretes’. 보는 시선은 보여주는 육신의 보충 없이는 단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다. 보거나 보여주는 두개의 시선. 그리고 거기서 보여주는 시선을 보는 시선. 말하자면 훔쳐보려고 하는 자에게 보여주려고 안간힘을 쓰는 자. 그런 다음 브리소는 그것을 뒤집는다. 보여주고 있는 데 더이상 훔쳐보지 않는 자. 유혹 뒤에 도착한 거절은 에로티시즘이라는 가냘픈 인간의 고독한 존재가 세상과의 불연속성을 회복하려는 간절한 하소연을 내팽개치는 것이다. 그때 은밀한 에로티시즘은 낱낱이 모습을 드러내서 그 하소연을 비참하게 만든다.
<위험한 관계>의 현대적 변주?
그 비참함의 구체적인 복기. 우선 은밀하지 않은 것들의 목록 중에서도 맨 첫 번째 명단, 섹스. 이 영화에서 섹스는 단 한번도 은밀한 적이 없다. 누군가 그 섹스에 대한 제3자와의 공모가 매번 다른 자리에서 중요해진다. 이를테면 첫 장면. 이야기는 스트립댄스클럽에서 시작한다. 말하자면 아무 데서나 시작한다는 뜻이다. 나탈리는 스트립댄스클럽에서 춤을 춘다. 그런 그녀를 동경하는 사람은 바텐더인 상드린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함께 클럽에서 쫓겨난다. 나탈리는 갈 곳 없는 상드린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고 동거를 제안한다. 그런 다음 나탈리는 상드린에게 게임을 제안한다. “첫째, 남자를 사귀되 사랑에 빠지지 않을 것.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거지.” 그러자 상드린이 대답한다. “그건 누구나 다 하잖아. 남자는 섹스를 하면 딴 여자에게 눈을 돌려.” 두 사람은 백주에 파리 거리를 알몸에 모피만 걸치고 활보하고, 지하철에서 남몰래 브래지어와 팬티를 벗는다. 상드린은 회사에 취직하고, 나탈리는 다른 남자를 만난다. 상드린은 사무직 일을 하지만 나탈리의 계략으로 회사 중역인 들라크로와의 비서가 된다. 그런 다음 상드린은 20년간 단 한번도 외도하지 않은 들라크로와를 유혹하고, 그런 다음 그들 사이에 나탈리를 끌어들인다. 그리고 사무실에서 벌이는 그들의 스리 섬 섹스가 회사를 상속받을 젊은 회장 크리스토프에게 발각된다… 라고 썼으면 좋겠지만, 사실 이 모든 것은 크리스토프의 계략이다. 그는 들라크로와를 무너뜨리기 위해 나탈리를 내세워서 상드린을 끌어들인 것이다.
반전의 반전? 천만의 말씀. 그런 속임수에 브리소는 관심이 없다. 처음 나탈리가 상드린에게 게임을 제안할 때 이것은 쇼데를로 드 라클로가 1782년에 쓴 <위험한 관계>의 현대적 변주로 보인다. 그런 다음 상드린이 들라크로와를 유혹하고 그를 손아귀에 넣었을 때, 하지만 그 제안을 한 나탈리는 그 누군가와 사랑에 빠져서 상처받고 있을 때, 그녀들은 발몽과 메르테유 후작부인의 자리를 놓고 게임을 벌이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들라크로와는 투르벨 부인의 자리에 불려간다. 하지만 크리스토프가 등장할 때 이 게임은 최악의 상황을 맞는다. 말하자면 이런 식의 가설. 라클로의 연애의 운명에 빠진 두명의 주인공이 니체와 (프로이트와) 마르크스를 뒤범벅으로 만들어 힘에의 의지의 자리에 자본에의 의지를 가져다 놓은 짜라투스트라, 오이디푸스를 통과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부정의 디오니소스, 말 그대로 최악의 위버멘쉬를 만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육신의 에로티시즘이 신성의 에로티시즘을 영접한다. 하지만 그 신성은 자기 누이의 육신에 몰두한 근친상간에 몰두해 있다. 그때 신의 품속이라고 믿은 것은 악마의 품속이 된다. 그것이 악마의 품이라는 것을 알고 그 포옹을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칠 때 갑자기 자본의 사슬이 등장한다.
큐브릭의 유언에 대한 마르크스적 대답
왜 이런 이야기가 그렇게 중요해진 것일까? 우리는 두 영화의 동일한 장면을 떠올려야 할 것이다. 아마도 <은밀한 것들>에 직접적인 영감을 준 영화는 스탠리 큐브릭의 <아이즈 와이드 셧>일 것이다. 말 그대로 거의 동일한 마지막 장면(의 난교파티). 한밤중 뉴욕시를 자기 욕망이 이끄는 대로 떠도는 빌 하포드의 금기와 위반 사이의 오디세이. 장 클로드 브리소는 그 대신 두 여자 나탈리와 상드린의 욕망이 이끄는 대로 파리의 거리를 대낮에 활보한다. 하지만 그 둘 사이의 친화성은 거기까지이다. 큐브릭은 위반의 바로 앞까지 간 다음 거기서 재빨리 가정으로 후퇴한다. 그 대신 백화점에서 그의 아내 앨리스의 위로와도 같은 음탕한 마지막 한마디를 듣는다. “Let’s fuck!” 물론 이 말은 빌과 앨리스 부부의 회복이자 실제로 부부(였던) 톰 크루즈와 니콜 키드먼의 수많은 소문(톰 크루즈가 게이이기 때문에 그들은 섹스를 하지 않는 일종의 스캔들 입막음을 위한 ‘무늬만’ 부부인 경우라는 줄기찬 의심)에 대한 대답이다. 그 대답이 긍정인지 부정인지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말은 이미 화면이 검게 페이드아웃된 다음 보이스 오프로 들리기 때문이다. 이미지의 침묵, 목소리의 명령. 그 다음 <은밀한 것들>. 브리소의 두 주인공 나탈리와 상드린은 후퇴할 가정을 갖고 있지 않다. 브리소는 퇴각할 수 있는 문을 닫아놓은 다음이다. 그들은 하여튼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그러므로 <은밀한 것들>이 <아이즈 와이드 셧>보다 더 좋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더 밀고 나아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브리소의 목표는 큐브릭과 다투려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로 브리소는 큐브릭을 충분히 염두에 두고 생각하고 또 생각한(것 같)다. 그런 다음 문득 뉴욕에서는 금기와 위반을 놓고 실재와 환상 사이에서 그 선택을 유럽적 비전으로 남겨놓을 수 있었다면 파리에서는 어떤 비전을 통해서 통과할 수 있는가, 라는 무능력과 마주했음을 바라본다. 브리소가 <아이즈 와이드 셧>을 염두에 두고 <은밀한 것들>에서 오마주와 패러디를 오가며 친화성을 놓고 간 길을 되풀이하는 것은 이 위대한 거장의 유작을 본 다음 떠올린 의문이다. 왜 욕망이 금기와 위반을 넘어선 다음 다시 환상으로 뒷걸음질치는가? 큐브릭은 집단 난교를 벌인 다음 그 장소에서 빠져나온다. 그리고는 그것이 환상인지, 아니면 실재인지 모호한 상태로 남겨놓는다. 브리소는 집단 난교를 벌인 다음 그것이 실재라는 서명을 한다. 나탈리는 크리스토프를 총으로 쏴죽이고, 그런 다음 상드린은 게임의 대가로, 또는 같은 말이지만 그 죽음의 덕으로 재산 상속자가 되어 크리스토프의 누이와 함께 이 모든 것을 물려받는다. 이 모든 방종의 토대는 환상이 아니라 실재이며, 그것은 집행된다. 프로이트적인 게임, 니체적 환상. 큐브릭은 충분히 즐겼으면 그것으로 된 것이라고 그 유언을 남겼다. 브리소는 거기에 대답을 덧붙여야 한다고 믿는다. 지난 세기의 끝에 큐브릭이 이미 종결지었다고 생각한 환상에 브리소는 새로운 세기를 시작하면서 지식을 더한다. 말하자면 마르크스적 대답.
끝내기 전에 참고할 만한 주. 맨 앞에 빌려온 두개의 인용은 조르주 바타유의 책 <에로티시즘>과 미셸 푸코의 글 ‘위반에 대한 서언’이다. 푸코는 그 자신의 글에서 바타유를 가리켜 “오늘날 우리는 알고 있다. 바타유가 우리 세기의 가장 위대한 작가 가운데 한 사람임을”이라고 말했다. 이 선언은 적어도 21세기 프랑스영화에서 바타유 없이 더이상 아무것도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을 푸코 그 자신의 다음 세기마저 예언하고 있다. 탄식할 만큼 이를 데 없이 불길한 통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