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가이드]
로버트 알트먼이 만든 현대판 누아르, <기나긴 이별>
2006-03-09
글 : 김의찬 (영화평론가)

좋은 원작은 영화에 어떤 그림자를 남길까. <기나긴 이별>은 이 질문에 엉뚱한 답변을 남기는 경우다. 레이먼드 챈들러 원작소설인 <기나긴 이별>은 하드보일드 계열 소설 중에서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 “잘 가게, 친구. 안녕이라는 말은 하지 않겠어. 그 말은 진짜 의미가 있을 때 했었지. 정말 슬프고 외롭고 마지막이었을 때 했던 거야”라는 대사로 유명한 소설이기도 하다. 레이먼드 챈들러 소설 중에서 염세적 작품으로 알려진 <기나긴 이별>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는, 누아르영화가 1970년대에 새롭게 태어났음을 보여준다. 사설탐정 필립 말로우는 깡패나 다름없는 친구 테리 레녹스의 부탁을 받고 새벽 3시 반에 그를 멕시코까지 차로 태워다준다. 다시 LA로 돌아온 그는 레녹스의 부인이 살해된 것을 알게 되는데 경찰은 레녹스를 용의자로 지목한다. 사설탐정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은 경찰은 말로우가 친구를 해외에 가도록 도와준 사실을 문제삼는다. 한편 금발의 에일린 웨이드는 소설가 남편이 실종됐다며 찾아달라고 말로우를 고용한다. 또 폭력단은 자기들 몫인 35만달러를 말로우가 빼돌린 줄 알고 돈을 받아내려고 찾아온다.

챈들러의 원작소설만 읽고 영화를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기나긴 이별>은 낯설게 보일지 모른다. 일단 주인공 필립 말로우의 모습만 봐도 그렇다. 우리에겐 <오션스 일레븐>이나 TV시리즈 <프렌즈>의 조연으로 더 친숙한 엘리엇 굴드가 연기하는 필립 말로우는 어쩐지 어색하다. 줄담배를 피우면서 여성들과 미묘한 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은 흡사하지만 챈들러 소설 특유의 쿨함은 찾아보기 힘들다. 평론가 로빈 우드는 “알트먼 영화 속 주인공들은 거만함과 약함이 혼합된 청춘기의 특성을 보인다”라고 논한 바 있는데 변형된 필립 말로우의 캐릭터 역시 이 범주에서 벗어났다고 보긴 쉽지 않다. 영화 속 필립 말로우는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사건을 조금씩 풀어가기 시작하며 모든 사건들이 하나로 엮여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놀라운 직감과 추리력 게다가 유머까지 곁들여 사건을 해결하게 되는 것이다. 알트먼 감독의 <기나긴 이별>은 흑백영화에 등장하곤 했던 탐정을 좀더 현대적으로 재해석했으며 소설 속 이야기를 빌려오되, 좀더 실험적인 뉘앙스의 현대판 누아르를 만들어냈다. 그래서 영화에 대해 “하워드 혹스보다는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영화에 가깝다”라고 평한 어느 비평가의 이야기는 의미심장하다.

<야전병원 매쉬>(1970)와 <기나긴 이별>(1973), <내슈빌>(1975) 등으로 1970년대 미국영화의 한 장을 장식한 알트먼 감독은 할리우드의 장르 관습을 독창적으로 해체하는 데 앞장섰다. 1990년대에 <플레이어>(1992)로 성공적으로 재기한 알트먼 감독은 최근까지 <고스포드 파크>(2001> 등의 수작을 연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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