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영화 같다”는 말을 듣는 드라마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느낌을 주는 작품도 있다.
문화방송의 <궁>(극본 인은아, 연출 황인뢰)은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한국 드라마의 미학적 가치를 한 단계 끌어올린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국방송 <봄의 왈츠>(극본 김지연 황다은, 연출 윤석호) 또한 지난 6, 7일 방영된 1, 2회분에서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아름다운 영상으로 시청자들의 호평을 받았다. 낮은 시청률에 가려져 제대로 평가를 받진 못하고 있지만, <천국의 나무>(극본 문희정 김남희, 연출 이장수)도 일본이라는 이국적인 배경과 백색의 눈으로 통일된 색감과 분위기를 화면 가득 채워 영화 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지난해 방영된 <프라하의 연인>(극본 김은숙, 연출 신우철)이나 <이 죽일 놈의 사랑>(극본 이경희, 연출 김규태), <패션70’s>(극본 정성희, 연출 이재규), <불멸의 이순신>(극본 이성주, 연출 한준서), 더 거슬러올라가 <미안하다 사랑한다>(극본 이경희, 연출 이형민), <다모>(극본 정형수, 연출 이재규) 등도 영화적 감성을 주는 드라마로 꼽을 수 있다.
이런 드라마들은 모두 공들여 촬영하고 연출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값비싼 고화질 (HD) 카메라 등 특수촬영장비 사용에 새로운 카메라 작업과 컴퓨터 그래픽, 정교한 조명, 제대로 만든 세트로 텔레비전 화면의 미장센을 넓히고 있다.
일부 ‘사전제작’ 방식이 도입되고 있는 것도 ‘영화적 드라마’를 가능하게 하는 배경이다. 상당수 드라마가 그날그날 ‘쪽대본’으로 촬영을 하고 방송 직전 최종편집을 끝내는 우리 드라마 제작 현실에서 이 드라마들이 높은 완성도를 보이는 데는 여유있는 제작 일정이 한몫을 했다.
앞으로 드라마 제작 현실이 점차 개선되고, 드라마 시장에도 투자자본이 지속적으로 유입될 전망이어서 ‘영화 같은’ 드라마 제작은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이제 시청자는 굳이 티켓을 예매하고 극장에 영화를 보러 나가는 번거로움 없이 텔레비전 리모컨만으로 안방극장에서 오감을 만족시켜 줄 드라마의 세계에 빠져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도 영화처럼” 브라운관 바람났네
한류 힘입은 우호적 투자 바탕
제작비용·기간 크게 늘리고
유능한 인력·첨단장비 동원
미려한 영상·광대한 스케일 담아
1980년대 김종학 피디가 만든 <동토의 왕국>은 텔레비전 스케일을 뛰어넘는 스토리와 비주얼을 담아 ‘영화적’인 드라마로 시청자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세트장 건설에만 100억원 이상이 들어간 <불멸의 이순신>은 ‘블록버스터 해전 사극’이란 표현까지 나올 만큼 규모와 특수효과 면에서 영화 못지않은 평가를 받았다.
요즘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가운데는 문화방송의 <궁>과 한국방송 <봄의 왈츠>가 대표적인 ‘영화 같은’ 드라마로 꼽을 수 있다.
입헌군주제 아래의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한 판타지적 가상 역사물 <궁>은 원색이 조화롭게 사용된 궁궐 내부와 주연배우들의 화려한 전통의상, 아름다운 그림을 보는 듯한 상차림 등 세련된 영상으로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봄의 왈츠>도 새하얀 눈에 덮인 오스트리아의 산과 들, 노란 유채꽃과 푸른 보리밭 사이의 흙길을 따라 넓게 펼쳐진 바다를 담은 한반도 남쪽 섬마을 풍광, 화려한 색감 등 영상미가 돋보였다.
◇ 드라마 미술에 콘셉트 도입=<궁>은 영화 <내 마음의 풍금>, <혈의 누>에 참여했던 민언옥 미술감독이 전체적인 비주얼을 총괄 감독했다. 영화의 ‘프로덕션 디자인’ 개념(작품 전체의 미술, 색감, 배경, 구도, 빛, 의상, 소품 등을 총체적으로 컨트롤하는 개념)을 드라마에 도입해 좀더 효율적인 관리가 이뤄진 것.
민 감독은 “<궁>은 세트 디자인뿐 아니라 인테리어 소품에서 의상, 음식, 테이블 장식까지 모든 미술에 대해 세심하게 정성을 기울였다”며, “의상의 색깔과 장신구 하나까지 콘셉트를 가지고 작업을 하다 보니 각 개체들이 홀로 빛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서로 시너지 효과를 냈다”고 설명했다. 그는 “쉽게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으면서도 보통 드라마 영상이 아닌, 영화적이면서도 ‘맛있는’ 디자인이 되도록 노력했다”고 덧붙였다.
촬영을 앞둔 배용준 주연 드라마 <태왕사신기> 역시 영화 <취화선>과 <하류인생>의 주병도 미술감독이 참여한다. <태왕사신기>의 이경석 총괄 프로듀서는 “작품의 전체 콘셉트를 미리 정한 다음, 여기에 맞춰 각 장면을 촬영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드라마 세트와 미술의 대형화, 고급화=경기도 오산의 <궁> 세트는 궁 내부 제작에만 15억 여원이 들어갔다. 여기에 가구와 도자기 등 소품비용에 25억 여원을 썼다. 그래서 다른 드라마 촬영 세트와 달리 <궁> 세트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볼거리가 될 만큼 화려하다.
문화방송 특별기획드라마 <신돈>의 경기도 용인 오픈세트도 110억 여원의 제작비에 1년이 넘는 제작기간이 걸려 고려 후기 왕궁과 사찰, 민가 등을 재현함으로써 장대한 스케일의 비주얼을 보여 주고 있다. 문화방송이 준비 중인 사극 <주몽>도 약 2만평의 터에 대규모 세트를 짓고 있으며, <태왕사신기> 역시 제주도에 2만여평 규모로 고구려 광개토대왕 궁궐 등을 건축하고 있다.
◇ 고화질 촬영장비와 특수기법은 필수=<봄의 왈츠>가 아름다운 영상을 보여 주는 데는 첨단 촬영장비가 큰 구실을 한다. 이 드라마 제작사인 윤스칼라 조성우 기획실장은 “<봄의 왈츠>는 영화 촬영용 고화질(HD) 소니 F-900 카메라와 독일제 고화질 특수 렌즈로 촬영해 영화 못지않은 화질과 영상을 만들어 낸다”고 말했다. 보통 드라마는 줌렌즈 하나로 촬영하지만, <봄의 왈츠>는 단렌즈 6개에 줌렌즈 2개, F-900 카메라 2대로 찍고 있다는 것. 조 실장은 이어 “장면마다 가장 적절한 노출과 영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다른 드라마보다 촬영에 몇 배 이상의 공을 들이고 있다”고 밝혔다.
기존의 틀을 벗어난 카메라의 역동적인 동선과 영화에서 많이 사용되던 컴퓨터 그래픽 작업, 와이어 액션 등도 드라마의 영상을 한단계 높이는 데 기여했다. 영화평론가 남다은씨는 “영화적인 제작기법이 과감하게 드라마에 도입되고 있다”며, “특히 <다모>에서 <불멸의 이순신>, <궁>에 이르기까지 사극과 퓨전 사극에서 이런 기법이 빛을 발하고 있다”고 말했다.
◇ 변화의 배경과 전망=이런 변화는 일단 시청자들의 수준이 높아졌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민언옥 감독은 “요즘 젊은층은 그림이 좋지 않으면 극의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느낀다”라며, “드라마는 줄거리가 우선이지만 이를 완성해 주는 것이 영상”이라고 설명했다.
드라마 제작환경이 변화하고 있는 점도 변화를 가능하게 한 이유가 된다. 조성우 실장은 “영화처럼 완성도를 보이는 드라마들은 대부분 충분한 시간을 갖고 제작에 나선 작품들”이라며, “사전제작제는 풍광이 빼어난 촬영장소를 찾아내는 등 치밀한 사전 준비는 물론이고, 좋은 영상을 만드는 데 필수 요소인 조명 등을 충분한 시간을 두고 세팅할 수 있어 완성도를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결국 유능한 제작진을 기용해 대형 세트와 고품격의 미술작업을 거쳐 값비싼 고화질 촬영장비로 드라마를 사전제작하려면 선결조건이 이에 걸맞은 제작비이다. <쾌걸춘향>, <마이걸> 등을 만든 전기상 피디는 “드라마 한 편 제작에 몇십억원 이상 드는 제작비는 한류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대형 독립제작사들에 몰려들고 있는 국내외 투자자본으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전 피디는 이어 “뉴미디어 시대를 맞아 하나의 콘텐츠를 다양한 채널에 공급할 수 있게 됐다”며, “앞으로 드라마 제작도 이를 고려해 영상에 더욱 신경을 쓰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별들의 안방귀환
배용준·손예진·감우성 등 주연으로…출연료 상승·좋은 작품 덕
영화 배우들이 티브이 드라마로 돌아오는 현상이 눈에 띈다. 배용준, 손예진, 감우성, 성현아, 양동근, 윤소이, 천정명 등은 극장에서 더 자주 볼 수 있던 스타들이다.
방송작가 김일중씨는 영화에서 ‘몸값’을 높이던 배우들이 일제히 티브이로 돌아오는 이유를 두 가지 작품에서 찾는다. 한국 드라마의 지형도를 바꾼 <대장금>과 <내 이름은 김삼순>이 그것이다.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배우 김선아가 보여줬던 캐릭터 변신은 사건이었습니다. 브라운관의 대중적 파급력을 이용해 새로운 이미지로 거듭나려는 배우들은 전처럼 상대역을 따지지 않고, 배역이 참신하면 출연을 결정하는 추세입니다.”
<대장금> 이후 훌쩍 높아진 드라마 출연료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라고 한다. 곧 방영될 드라마 <연애시대>에 출연할 손예진은 회당 3천만원의 출연료를 받는데, 이는 <대장금>의 전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것.
한류 수출 붐과 외주제작 활성화로 영화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에게도 ‘티브이 진입 장벽’이 낮아졌다. 드라마 독립제작사들이 우수한 제작진 확보 경쟁을 벌이는 덕분에 많은 작가와 감독들이 활발하게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오간다. 감독의 입장에서는 ‘장편’을 시도할 기회이며, 작가들에게는 이름을 알릴 수 있는 기회이다.
영화 <잠복근무>, <여고괴담4>와 드라마 <불량주부>의 시나리오를 쓴 설준석 작가는 “영화는 감독 중심인 데 비해, 드라마는 작가 몫이 크다. 작가로서는 정당한 대접을 받는다는 자부심을 갖게 된다”고 밝힌다.
브라운관으로 돌아오는 이들은 대부분 그 이전에도 방송 경험이 있던 사람들이다. 대작 기대를 받고 있는 드라마 <태왕사신기>의 주경도 미술감독과 <궁>의 민언옥 미술감독 모두 문화방송 출신이다. 처음 드라마를 시작한 이들에게는 속도가 가장 큰 걸림돌이다. 사전제작 비율이 기껏해야 50%에 이르는 드라마의 ‘초치기 제작 환경’은 아직 크게 개선된 것이 없기 때문이다. 2000년대 초반 영화로 대거 진출한 방송인들이 2006년 다시 돌아오는 상황을 두고 드라마가 자축하기는 이르다. 투자 이전에 제작 환경이 개선되어야 지금의 황금기를 지킬 수 있을 것이다.
“눈 높아지는 시청자들 무서워”
‘궁’ 연출 황인뢰 인터뷰
문화방송 드라마 <궁>의 황인뢰 피디는 일찍부터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넘나들며 연출력을 인정받았다. 드라마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고개 숙인 남자>, <연애의 기초>에서 보인 감수성과 연출력에 힘입어 영화 <꽃을 든 남자> 감독을 맡았으며, 2005년에는 다시 <한뼘드라마>로 호평을 받았다. 이번에 연출을 맡은 <궁>도 영화 같은 드라마라는 찬사 속에 20%가 넘는 높은 시청률을 올리고 있다. 황인뢰 피디를 만나 제작 과정에 대해 들어 보았다.
“<궁>은 2년 동안 공을 들이며 제작사인 에이트픽스가 영화, 방송 가리지 않고 좋은 인력을 찾다 보니 영화인들의 참여가 많았습니다.”
<궁>은 영화 <텔미 썸딩>과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줘>의 인은아 작가가 극본을 맡았고, 영화 <유령>, <내추럴시티>에서 실력을 보인 민병천 감독이 시각 효과를 책임졌다. 영화 <혈의 누>를 했던 민언옥 감독은 미술로 참여했다.
“<궁>은 영화 같은 느낌을 주려고 고화질(HD)급 16 대 9로 제작했습니다. 수목 시간대 미니시리즈에서 16 대 9의 화면을 시도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왕 시작한 일이라 카메라도 영화 <스타워즈>에서 사용했던 것과 같은 기종을 사용하고, 모든 장면에서 다초점 렌즈를 일일이 바꿔 끼우며 최대한 선명도를 높이려 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다 보니 소품, 의상, 세트의 색을 통일하는 데만도 각별히 신경을 써야 했단다.
“영화에서는 당연한 작업이지만, 50인치 이상의 화면일 때만 차이를 느낄 수 있기에 여지껏 드라마에서는 이런 시도를 하는 데 인색할 수밖에요.”
황 피디는 “시청자와 관객은 우습기도 하고, 무섭기도 한 존재”라고 말했다. 한심한 영화에 관객이 몰리기도 하고, 좋은 드라마를 외면하기도 한다는 것. 그러나 갈수록 시청자들의 심미안이 높아지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
‘빛의 마술사’ 황 피디도 시청자들의 눈높이는 늘 부담스럽다. “채경이 궁에 들어가기 전과 후의 화면색을 다르게 하고, 주인공 네 사람에게 각각 캐릭터에 맞는 색채를 부여하는 등 여지껏 드라마에서 해보지 않았던 시도를 해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전회 사전제작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현실에서 처음 의도했던 점들을 완벽히 실현할 수는 없었다. “사실 <궁>에서는 제가 표현하고 싶었던 것의 30%밖에 실현하지 못했습니다. 이 아쉬움은 다음 작품에서 풀겠지요.”
애초 20부작으로 기획됐던 <궁>은 높은 시청률에 힘입어 24부작으로 연장 방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