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리포트]
[현지보고] 디지털로 꿈을 빚는 공장, 픽사를 찾아서
2006-03-22
글·사진 : 박혜명

황량하다기보다, 외져서 아늑한 곳이다. 샌프란시스코 외곽 에머리빌에 위치한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전경은 그렇듯 텅 비어 보이는 가운데 묘하게 생기를 풍긴다. 까만 철구조물 기둥 세개로 간소하게 세워진 정문 위에 ‘PIXAR’라는 다섯개 알파벳이 놓여 있다. 군더더기없이 명료한 이 입구는 <토이 스토리>(1995)부터 <몬스터 주식회사>(2001), <니모를 찾아서>(2003) 그리고 <인크레더블>(2004)에 이르기까지 작품마다 흥행과 비평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사냥하는 데 무리없이 성공해온 픽사 스튜디오의 자신감처럼 보인다.

6월5일 개봉을 앞두고 일찌감치 완성된 픽사 스튜디오의 신작 <자동차>(Cars) 프리미어와 함께 한국은 픽사 스튜디오 방문 티켓을 받았다. 몬스터 설리와 카우보이 우디, 광대어 니모를 직접 만나는 듯 설렌다. 실제는 설리와 우디, 니모의 조물주들을 만나는 것이겠지만 그들과 악수를 나누더라도 설리의 복슬복슬한 손이나 니모의 지느러미를 잡은 듯할 것이다.

사내 이동도구는 퀵보드, 순발력과 자유로움의 상징

철조물과 유리창으로 이뤄진 픽사 스튜디오 본관 건물에 들어섰다. 인사와 교육을 담당하고 있다는 랜디 넬슨은 기자들을 동쪽 갤러리로 안내한다. 캐릭터 및 스토리를 그림으로 먼저 구체화한다는 시각개발(Visual Development) 코너다. <인크레더블>의 주요 캐릭터들이 선 몇개와 원색 중심의 색 몇개로 심플하게 그려져 벽에 걸려 있다. 긴 복도를 따라 전시된 것은 마켓(Maquette)이라 불리는 작은 조형물들. 이 모형을 스캔해 컴퓨터에 저장하면 3D 모델이 완성된다고 넬슨이 설명한다. 미세스 인크레더블의 목이 눈에 띈다. 섬뜩한 회색빛 조형물로 덩그러니 놓인 두상 절반을, 3D 모델화 작업에 필요한 모눈이 덮고 있다. 픽사 방문객에게 3D애니메이션 제작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구성된 코너마다 최신작 <인크레더블>이 사례로 쓰이고 있다. <자동차>가 개봉하고 나면 모든 사례가 <자동차>로 바뀔 거라고 넬슨이 설명한다. 이때, 곱슬머리의 흑인 여자가 퀵보드(미국인들은 그것을 스쿠터라 불렀다)를 타고 기자들 곁을 슝 지나간다. 넬슨이 말한다. “이곳 사람들은 퀵보드를 애용한다. 저것이 없다면 이 넓은 공간을 어떻게 다닐 수 있겠나?”

픽사 스튜디오 본관 내부

퀵보드가 없어도 다니려면 다닐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직원들이 본관 1, 2층을 스쿠터로 누빈다. <벅스 라이프> <몬스터 주식회사>에 이어 <자동차> 프로듀서를 맡은 달라 K. 앤더슨은 “내 방에 있는 스쿠터만 다섯개”라고 한다. 퀵보드는 이들의 일상을 빠르고 유연하며 자유롭게 만들어준다. <자동차>의 한 애니메이터는 “지금까지의 작업에 문제가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도 있다는 점을, 우린 늘 염두에 둔다”고 픽사의 과감한 작업 분위기를 설명했다. 1층의 넓고 넓은 홀 한켠에는 오락실에서 볼 수 있는 오락기구와 당구대, 그외 몇 가지 보드게임 장비가 마련돼 있다. 골프장을 연상시키는 너른 뜰에는 배구장과 수영장, 축구장, 농구장이 있다. 아이팟 이어폰을 끼고 조깅을 하건, 1층 카페테리아에서 커피를 마시다 동료와 보드게임을 하건 픽사는 그 모두를 일로 여긴다. “이곳 사람들은 많은 것을 자기 안에 채우고 싶어한다(People like lots of inputs). 놀이도 평상시 일의 한 부분이다.” 설명하던 넬슨 앞으로 누군가가 서커스의 한 장면처럼 외발자전거를 타고 달려든다. 이 ‘서커스 단원’ 역시 픽사의 애니메이터다.

픽사의 작품들이 종종 상상을 뛰어넘는 매력을 보여준 데에도 이런 순발력과 자유로움이 두드러진 사내 분위기가 일조했을 것이다. 픽사만의 특별한 점은 이곳이 “자본이나 간부가 아닌 크리에이티브가 이끄는 집단”인 것이라고 달라 앤더슨이 말한다. 픽사 사람들은 “존 래세터의 원칙은…” 혹은 “존 래세터가 늘 강조하는 것은…” 등의 말로 이곳의 핵심 브레인이자 모든 크리에이티브의 최종 결정권자가 존 래세터임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픽사가 다른 어떤 곳보다 개개인의 아이디어 그리고 그 아이디어들간의 커뮤니케이션을 중시한다고 결론맺곤 했다. 일부분 주관적인 자부심의 발로이겠으나 픽사 스튜디오만의 작업 분위기를 시샘하지 않기도 힘들다.

무엇이든 그림으로 말한다

개그 코너(Gag Sessions)라는 곳에 멈추자 다양한 그림체로 그려진 한컷 유머들이 눈에 들어온다. “픽사 사람들은 모두 그림으로 스토리를 지어낼 줄 안다.” 농담을 해도 그림으로 그려서 하고, 그림을 그릴 줄 모른 채 입사한 경비원이 그림 그리는 법을 배워 나간다고 넬슨이 설명했다. 한 기자가 물었다. “당신도 그림 그릴 줄 아는가?” 넬슨은 유명 배우 같은 미소를 잃지 않고 미대 시절부터 픽사 입사 전까지의 자신의 화려한 경력을 읊은 다음 덧붙였다. “모두 할 수 있는 일이다.”

개그 코너에 걸린 한컷 유머들

넬슨의 말처럼 그림은 모두가 그릴 수 있다. 배우지 않아도 부릴 수 있는 기술이며 최소한의 의사소통 도구다. “회화(painting), 그림(drawing), 조각 등은 모두 선사시대적인 도구다. 우리가 이 도구를 존중하는 이유는 모든 사람들이 이를 통한 스토리텔링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떠올려보면 <토이 스토리> <몬스터 주식회사> <니모를 찾아서> 등은 스크린 위에서 화려한 쇼나 장기를 부리기에 앞서 이야기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자 했다. 픽사 사람들은 그것이 자신들이 하고 있는 예술이라고 믿는다. 늘 그랬듯 픽사는 신작 <자동차>의 본편 시작에 앞서 흥미로운 단편 하나를 선보였다. <인크레더블>의 감독 브래드 버드와 또 한명의 감독이 공동 연출한 작품이다. 이같은 단편 작업을 지속할 것이냐는 질문에 달라 앤더슨이 대답했다. “당연하다. 그건 예술을 위한 예술(art for the sake of art) 작업의 일부다.”

혁신은 리스크 없이는 나오지 않는다

<인크레더블>의 ‘엘라스틱 걸’의 두상 마켓

“애니메이터 분들! 애니메이터 분들! 지금 바로 정글5로 내려오세요! 정글5로 내려오세요!” 확성기에서 흘러나오는 흥겨운 목소리가 스튜디오 안을 가득 채운다. 정글5라는 이름의 방으로 오라는 지시일 텐데, 철구조물과 유리와 목재로 만들어진 픽사 본관 안에 정글처럼 생긴 곳은 전혀 없다. 이곳 사람들은 디지털 프로덕션 구역의 동료들을 디지털 배관공(digital plummer)이라 부르고, 엄청난 용량의 메인컴퓨터 방을 구동 농장(render farm)이라 부른다. 탁 트인 회의실과 철저히 사적 공간으로 분리된 개인 작업실의 대조를 보며 개방성과 독립성을 칼같이 구분하는 전형적인 미국식 문화를 느끼면서도, 이곳이 조금은 사랑스럽다. 850여명 전체 구성원 가운데 20여명쯤 된다는 한국인 중 애니메이터 훈 킴을 만났다. 근무 7년째라는 그는 이곳의 가장 큰 매력이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각자의 능력과 열정도 뛰어나지만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사람들의 팀워크가 정말 좋다.” 스쿠터가 상징하는 자유로움, 그림은 의사소통의 도구임을 되새기는 간명한 원칙, “혁신은 곧 위험 감수”(Innovation means to take risks)이므로 팀워크를 더욱 의지하는 분위기. 잘나가는 벤처기업들의 평범한 덕목일 수 있는 이 장점들이, 올해로 창립 20주년을 맞는 픽사에서는 좀더 특별하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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