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쓰레기 속에서 별을 볼 수 있네, <시티즌 독>
2006-03-22
글 : 허문영 (영화평론가)
화려한 색감과 현란한 카메라워크 속에 제3세계의 자의식 드러내는 <시티즌 독>

판타지와 뮤지컬과 호러와 멜로가 뒤섞인 <시티즌 독>은 더 판타스틱하고 더 그로테스크한 타이판 <아멜리에>다. 대도시를 배회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입을 모아 노래를 부르고, 정어리 통조림에 실려나간 손가락은 주인을 찾아온다. 죽은 오토바이 택시기사는 착한 좀비가 되어 다시 오토바이를 몰고 다니며, 초라한 곰 인형은 소녀에게 버림받아 운다. 할머니는 죽어서 벼와 메뚜기와 메기를 거쳐 도마뱀으로 돌아온다.

<시티즌 독>은 <아멜리에>가 그런 것처럼 결핍과 외로움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니며, 그저 손가락이 베인 것처럼 아플 뿐 누군가 따뜻하게 감싸준다면 모두 행복해질 수 있다고 위안한다. 사랑은 멀지 않은 곳에 있으며, 애타게 찾기를 멈출 때 불현듯 가까이서 나타난다. 거기에 더해 <시티즌 독>에선 사물은 사람의 손길로 생명을 얻으며 죽음조차도 비극이 아니어서 죽은 할머니는 마침내 주인공의 아이로 환생한다. 비현실적인 원색으로 가득한 동화적인 색감,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내레이터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 현란한 카메라워크와 기발하고 엉뚱한 유머, 정상은 아니지만 미워할 수 없는 인물들의 기벽, “내 마음은 텅 비었었네/ 그대의 사랑이 날 찾아와/ 내 눈을 열기까지”(<시티즌 독>)라고 노래하는 혹은 “당신이 없는 오늘은 어제의 찌꺼기일 뿐”(<아멜리에>)이라고 읊조리는 사랑 예찬론도 <시티즌 독>과 <아멜리에>가 공유한 것이다.

그러나 <시티즌 독>은 <아멜리에>와 비슷한 만큼 다르다. 감독 위시트 사사나티앙의 말처럼 이 영화의 현란한 색채가 타이의 전통적 색감을 얼마나 잘 되살렸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혹은 이 영화가 동시대 타이인의 삶과 어떤 내면적 연관이 있는지도 알 수 없다. 다만 <시티즌 독>에는 <아멜리에>에 없는 제3세계의 자의식이 있다. 그 자의식이 이 영화를 혼란스럽고 흥미롭게 만든다.

파리의 아멜리에에겐 없는 제3세계의 자의식

<아멜리에>의 인물들은 자신의 영토에 머물며 이전엔 자기에게 속했으나 지금은 사라진 것들로 슬퍼한다. 아버지는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며 옛 인형을 꺼내든다. 한 중년 남자는 40년 만에 돌아온 보물상자를 껴안고 눈물을 흘리며 옆집 아줌마는 30년 만에 도착한 죽은 남편으로부터의 편지를 받고 환호한다. 젊은 아멜리에와 니노는 좀 다르다. 아멜리에는 마더 테레사와 다이애나 비와 동일시하고 인형의 해외여행을 꾸민다. 그럴 때 그녀는 떠나고 싶어하는 것 같다. 니노는 찢어진 남의 사진을 모아서 앨범을 꾸민다. 그럴 때 그는 자신의 얼굴을 보고 싶어하는 것 같다. 혹은 자신이 그곳에 속한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들의 결여는 실은 짝짓기에의 열망에서 온 것이다. 둘이 맺어지자 모든 문제는 해소된다. <아멜리에>의 공간은 아름답고 정갈하며 폐쇄적이고 자족적인 소우주다. 바깥세상은 그림엽서에 실린 풍문 속의 풍경일 뿐이다. <아멜리에>는 정착민의 노스탤지어다.

<시티즌 독>의 무대는 파리가 아니라 소란스럽고 어지러운 방콕이다. ‘팟’은 시골에서 상경한 순박한 청년이다. 떠나올 때 그는 할머니로부터 “방콕에서 일자리를 얻으면 다음날 눈떴을 때 엉덩이에 꼬리가 자라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일자리를 얻고도 꼬리가 자라지 않는다. 대신 추레하고 덜떨어진 친구 ‘요드’와 한눈에 반했으나 다가갈 수 없는 ‘진’을 만난다. 그리고 좀비가 되어 오토바이를 몰고 다니는 ‘콩’, 8살 외모의 22살의 거칠고 정서불안인 소녀 ‘맴’, 그녀의 영원한 친구인 곰 인형 통차이, 기억을 잃어버린 ‘틱’을 만난다.

<시티즌 독>의 사람들은 자신이 잃어버린 것이 무언지 알지 못한다. 대부분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며, 자신의 거주 공간을 추한 곳으로 상상하고 혐오한다. 진은 끊임없이 닦으며, 틱은 끊임없이 핥는다. 진의 육체는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마다 발진이 생긴다. 그들의 욕망은 지금 이곳으로부터의 탈주다. 그들은 새로운 곳에서의 정착을 꿈꾼다. 그곳은 하얗거나 깨끗하며 고귀한 곳이다. 여기엔 이미지와 공간의 정치학이 개입한다.

진은 자신을 소설 속의 백작의 여인으로 상상하고, 하늘에서 떨어진 해독불능의 ‘하얀 책’을 계시라 믿고 열심히 읽으며, 자신이 사랑하는 백인이 환경운동을 하다 사살된 피터라고 오인한다. 틱은 자신의 이름 외엔 모든 기억을 잃어버렸으며 택시를 타고도 갈 곳을 말하지 못한다. 요드의 여자친구 무아이는 자신이 중국 황제의 딸이라 믿고 중국으로 떠나버린다. <시티즌 독>은 3세계 유랑민의 불안 혹은 식민본국에 정착하려는 식민지 원주민의 욕망이다.

자기의 땅에 정착하지 못한 그들은 언젠가부터 자기 이미지를 잃어버렸고, 1세계의 이미지로 자기 이미지를 재구성하려 한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실패한다. 하얀 책의 계시는 동성애 포르노로 판명됐고 진이 좋아한 남자는 환경운동가 피터가 아니었다. 피터 나무라고 이름 붙인 그 나무는 옥수수였다.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가장 쉬운 방식은 부재한 자기 이미지를 창안하고 그것을 자신의 시원적인 것으로 절대화하는 것이다. 장이모가 <붉은 수수밭>이나 <국두>에서 그렇게 했다. <시티즌 독>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오염과 더러움을 긍정한다

사랑을 얻지 못하고 낙담한 팟은 고향에 돌아간다. 하지만 그곳은 모든 것이 너무 느려서 견딜 수가 없다. 위시트 사나나티앙은 장이모처럼 전근대를 미화하고 신비화하지 않는다. 팟은 고향에 머물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는 방콕으로 다시 돌아온다. 며칠 사이에 방콕은 또 변했다. 할머니가 예견한 꼬리가 모두에게 생겼다. 이상하게 아직도 팟은 꼬리가 생기지 않았다.

우리는 그 이유를 플라스틱 산에서 짐작할 수 있다. 살해된 백인 환경운동가를 연모한 진이 환경운동에 동참하기 위해 플라스틱 병을 모아놓은 곳이 이제 달에까지 닿는 산이 되었다. 그곳은 이제 젊은이들의 데이트 명소가 됐다. 놀랍게도 플라스틱 산이 긍정적인 이미지로 바뀐 것이다. 환경운동에 참여할 때 진은 “식물이 영웅이라면 플라스틱은 악당”이라고 외쳤다. 백인 남자와 하얀 책에 대한 그녀의 오인이 이 구호를 외치게 했다. 그렇다면 이 지당해 보이는 자연예찬론 혹은 문명혐오론에는 혹시 3세계의 저개발을 고착화하려는 1세계의 음모가 개입돼 있는 건 아닐까. <시티즌 독>은 은밀히 그 질문을 제기하지만 명확하게 답하진 않는다. 다만 거대한 플라스틱 산은 이제 방콕시의 한가운데 우뚝 서 있고 그 풍경은 아름답진 않지만 돌이킬 수도 없다. 팟이 플라스틱 산에서 진과 맺어질 때 드디어 그에게도 꼬리가 생긴다.

<시티즌 독>은 오염과 더러움을 긍정한다. 혹은 “내게 보이는 건 쓰레기와 오물뿐, 하지만… 쓰레기 속에서 별을 볼 수 있네”라고 노래한다. 플라스틱과 꼬리를 피하거나 감출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시티즌 독>은 제3세계에서의 삶이 필연적으로 오물과 더불어 살아가기라고 말한다. 그리고 혼란스럽게도 짝만 찾으면 만사형통이라고 동시에 말한다. <시티즌 독>은 정말 이상한, 하지만 <아멜리에>에 비할 수 없이 흥미로운 멜로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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