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순수로의 불가능한 회귀, <브로크백 마운틴>
2006-03-22
글 : 한창호 (영화평론가)
퇴행으로의 유혹을 자극하는 <브로크백 마운틴>

영화는 눈이 시릴 정도로 찬 푸른색의 하늘을 배경으로 시작한다. 침묵과 푸른색의 고립된 들판에 그 하늘색만큼이나 푸른 옷을 입은 잭(제이크 질렌홀)이 시커먼 고물 지프를 타고 나타난다. 이동버스로 만든 어느 간이사무실 앞이다. 먼지를 뒤집어쓴 사무실 현관의 계단에는 잭보다는 온화한 느낌을 주는 카키색 상의를 입은 에니스(히스 레저)가 앉아 있다. 첫눈에 봐도 과묵해 보이는 에니스는 꼼짝도 않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고, 잭은 지프의 사이드 미러를 통해 면도를 하며 힐끗힐끗 에니스를 훔쳐본다.

거울을 통해 타인을, 그것도 이성이 아니라 동성의 인물을 바라보는 이 장면에서 두 남자의 관계의 변화를 예상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시선의 주체에 잭이, 그 대상에 에니스가 자리잡고 있어, 관계의 주도권을 누가 먼저 행사할지도 알 수 있다. 결국 그 관계는 차가운 푸른색만큼이나 고통스럽게 두 남자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멍을 새겨놓을 것이다.

나르시스의 치명적인 동일시

알려진 대로 <브로크백 마운틴>은 카우보이들의 동성애를 다룬다. 전반부는 사랑의 발견과 희열을, 후반부는 아주 대조적으로 금지된 사랑에 대한 인식의 고통을 묘사한다. 희열이 크면 클수록 그 결과는 더욱더 고통스러운 전형적인 멜로드라마적 구조다.

잭이 거울을 통해 에니스를 바라볼 때, ‘나르시스 잭’의 비극은 이미 예고된 셈이다. 잭은 처음부터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 자신의 영원한 사랑의 대상인 에니스에게 다가가지만, 사랑을 소유하는 데는 계속 실패한다. 미소년 나르시스가 물속으로, 곧 자신의 이미지 속으로 뛰어들며 자신의 존재를 초현실의 공간으로 옮긴 뒤 사랑을 성취하듯, 잭의 사랑도 이승에서는 결실을 맺지 못할 운명인 것이다.

잭은 거울을 보며 에니스와 동일시하고 있는데, 자신은 그런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소년’이다. 그러므로 이 사랑은 말 그대로 원초적인 감정에서 출발한다. ‘아버지의 법’이 개입되기 이전이라는 뜻에서 그렇다. 잭은 오이디푸스의 갈등 이전 단계에 존재하고 있다. 자기가 동일시한 대상과 첫사랑에 빠지고, 자아가 손상받지 않는 축복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브로크백 마운틴’이라는 곳은 우선 잭의 공간이다. 금기도 없고 명령도 없는 ‘순수한’ 세계다. 잭의 사랑을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보면, 이곳은 에니스의 공간이기도 하다. 두 남자는 금기와 명령이 상징하는 ‘문명’과는 저 멀리 떨어진 높고 깊은 산, ‘자연’에서 사랑을 꽃피운다. 첫눈에 반한 사랑이라는 것이 사실은 허구라는 것을 알 리가 없는 순진한 ‘꼬마들’이다. 그렇지만 바로 그 순진한 허구 때문에 두 남자는, 그리고 우리 관객은 눈물짓는다. 우리는 평생 그 첫 감정으로 되돌아가려는 헛된 욕망을, 달성할 수 없는 욕망을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브로크백 마운틴’은 한번 떠나오면 돌아갈 수 없는 곳이다. 그곳은 ‘법’ 이전의 공간이다. 적어도 어른이라면 그곳으로 되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잔인한 운명’을 받아들인다.

비록 순수의 공간에서 뛰노는 나르시스와 같은 소년들이지만, 잭에 비해 에니스는 문명의 감염도가 높은 인물이다. 그에겐 강력한 초자아가 존재한다. 에니스는 잭을 사랑하지만 사회에서 금지된 사랑, ‘아버지의 이름’으로 금지된 사랑 때문에 죄의식에 빠져 있다. 에니스가 잭과 첫 관계를 맺은 다음날, 한 마리의 양이 피를 흘리며 죽어 있는 모습으로 그의 죄의식이 얼마나 큰지는 효과적으로 상징화돼 있다. 반면에 잭은 계속해서 ‘브로크백 마운틴’으로의 귀환을 고집하는, 초자아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퇴행에 별다른 죄의식을 보이지 않으며, 집요하게 첫사랑에 집착한다.

세속적인의 가해자들, 아내와 멕시코 남자

동성애 영화에서 종종 보이는 거북함은 타자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다. 끼리끼리 어울리고 나머지는 대개 부정적인 가치로 내몰린다. 이런 점에서는 <브로크백 마운틴>도 엇비슷하다. 잭과 에니스라는 두 남자의 사랑을 방해하는 인물은 아내인 ‘여자들’이다. 이들은 ‘순수’의 대립항인 ‘문명’, 곧 보통의 우리와 같은 도시의 사람들이다. 그런데 우리가, 두 남자가 상징하는 자연에 한껏 동일시돼 있을 때, 여자들은 그 자연을 파괴하는 문명의 은유로 등장해, 그들은 남자들에게 적대적인 인물로 비쳐지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는 남편들의 ‘순수한’ 영혼을 갉아먹는 사람이 여자들로 제시돼 있다.

에니스의 아내 알마(미셸 윌리엄스)는 남편의 일탈로 고통받는 희생자인 동시에 그를 ‘자연’에서 파멸의 ‘문명’으로 끌어당기는 세속적인 가해자다. 그녀는 결국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돈 있는 남자를 찾아 에니스를 포기한다. 그리고 잭의 아내 로린(앤 해서웨이)은 한발 더 나아가 오로지 돈만 세는, 지독하게도 탐욕적인 여성으로 비쳐진다. 이런 여성들과 만든 가정이라는 공간은, 사랑의 공간 ‘브로크백 마운틴’과는 극단적으로 대조된다. 적어도 두 남자에게는, 아내들이 지키고 있는 가족과 가정은 영혼을 파괴하는 장소다.

잭과 에니스는 도시와 아내의 공간에서 질식할 것 같다. 두 남자는 가정을 꾸린 지 4년이 지난 뒤, 첫사랑을 가르쳐준 ‘브로크백 마운틴’으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더이상 자아가 손상되는 고통을 견뎌낼 수 없는 것이다. 이들의 행동은 성장을 거부하는 퇴행이다. 반복하지만, ‘브로크백 마운틴’은 어른이라면 돌아가서는 안 되는 금지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욕망을 억압하고 만족을 지연시키며, 문명 속에 머물라는 초자아의 명령을 받아들이며 산다. 욕망에 대한 포기의 상처 때문에 우리는 슬픔의 올가미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법인데, 멜로드라마는 바로 그 상처를 자극해 ‘브로크백 마운틴’에 대한 망각을, 다시 말해 보류한 욕망을 다시 일깨운다. 잭과 에니스는 1년에 한두번이지만 ‘브로크백 마운틴’으로 돌아감으로써, 우리가 억압하고 포기했던 욕망을 눈앞에서 실현하고 있다.

브로크백 마운틴으로의 여행은 죽음의 여행

‘자아가 손상받지 않은 상태로의 회귀’, 곧 브로크백 마운틴으로의 여행은 결혼한 두 어른이 오이디푸스 이전 단계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불가능한 여행’이다. 바로 이 점이, 여행이 죽음과 맞닿아 있는 이유다. 전반부의 산은 에로스의 공간이었지만, 후반부의 산은 똑같은 곳임에도 죽음의 공간으로 바뀌어 있다. 진정 이들이 퇴행의 달콤함을 계속 욕망한다면 생명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 이외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점에서, 산으로의 여행은 죽음으로 다가가는 긴 여정의 한 부분이다. 두 남자의 사랑은 그래서 ‘죽음과의 키스’를 예고하는 것이다.

두 남자가 마치 강보(襁褓) 속으로 들어가듯 산속으로 들어가서, 새로 태어난 아기들처럼 맨몸으로 돌아가 천진하게 물속으로 뛰어내릴 때, 이들은 상징적으로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선형적인 시간의 흐름을 뒤로 돌리고 있는 탓이다. 특히 초자아의 억압을 상대적으로 덜 의식하는 잭의 죽음은 이곳 말고도 또 다른 곳에서 더욱 강력하게 상징화돼 있다. 에니스와의 너무나 오랜 이별 뒤의 만남에 고통받던 잭이 육체적 욕구 해결을 위해 멕시코로 가서 ‘밤의 남자’를 만나는 장면이다. 순수로의 불가능한 회귀를 욕망하던 그가 충동적으로 타락의 ‘검은 손’을 잡을 때, 잭의 죽음은 일종의 처벌처럼 뒤따르게 된다. 잭이 멕시코 남자와 함께 시커먼 어둠이 덮여 있는 골목길 저쪽으로 걸어가는 장면은 죽음에 대한, 그것도 불행한 죽음에 대한 명백한 상징으로 기능하고 있다.

앞에서는 가정의 여성들이 동성애 남자들의 순수함을 세속화시키는 부정적인 타자로 등장했는데, 여기서는 비백인 남자가 검은 세상으로 주인공을 끌고 가는 죽음의 사자처럼 등장했다. 이 영화는, 백인 남자들의 동성애에 초점을 맞추며, 여성과 비백인, 이들 두 집단을 부정적인 타자의 위치로 밀어내고 있는 점에서는 대개의 주류 영화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떠날 수 밖에 없는 순수의 공간, ‘브로크백 마운틴’

우리 모두는 한때 ‘브로크백 마운틴’ 같은 공간에서 지극히 행복한 사랑을 맛보았다. 그런 뒤, ‘금지의 명령’을 슬기롭게 받아들이며 ‘사회화’된다. ‘브로크백 마운틴’에서의 충만한 행복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장은 사실 그 행복을 포기한 대가로 얻는 허깨비 같은 것이다. 어른으로 성장은 했지만 우리는 ‘상실’이라는 영원히 치유할 수 없는 억압의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영화는 우리가 머물고자 욕망했던 곳, 그렇지만 떠날 수밖에 없었던 순수의 공간, 바로 ‘브로크백 마운틴’으로 영원히 돌아가려고 노력했던 남자들의 멜로드라마다. 억압하는 초자아에 굽실거리고, 통제가 안 되는 이드 때문에 죄책감에 고개 숙이고 살아가는 ‘초라한’ 우리로서는 잃어버린 그 무엇을 찾아가는 두 남자의 ‘무모한’ 여행이 몹시 부럽다. 우리는 그냥 마음속에 ‘자기만의 브로크백 마운틴’을 간직하며, 고개 숙이고 살아가고 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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