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작 <기쁨에 부쳐>에서 <거울을 통해 어렴풋이> <가을 소나타> <외침과 속삭임> 그리고 <리허설이 끝난 뒤> 등으로 이어지는 비극적인 가족드라마는 잉마르 베리만 영화의 한축을 형성한다. 사랑이 악마와의 동거이고 결혼은 일상의 구원자와 사는 것이라면, 가족의 비극은 구원자가 악마로 변할 때 일어난다. 그들은 서로를 할퀴고 저주하며 경멸의 말을 서슴지 않는다. 그 대표작 <결혼의 풍경>은 파괴되고 해체되어가는 가족의 모습을 우아하고 대담하게 그린 작품이다. 중년의 남편 역을 맡았던 엘란드 요셉슨은 훗날 이어질 작업을 예상한 건지 “이번 여름이면 난 마흔다섯이 돼. 아마 30년은 더 살 수 있겠지”라고 읊조렸다. 그리고 과연 30년의 세월이 흐를 동안 그는 <부정>(베리만의 각본을 리브 울만이 연출한 <부정>은 이혼한 부부의 비극을 거칠게 소묘하며 <결혼의 풍경>과 <사라방드>를 연결한다)과 <사라방드>에 출연해 베리만 영화의 마지막 증언자로 남게 됐다. <사라방드>는 베리만이 부인 잉그리드 폰 로젠의 죽음 뒤 그리움의 고통에 빠져 지내다 연출한 작품으로서, 감독에 의해 마지막 작품으로 선언된 영화는 로젠에게 바쳐졌다. 베리만의 가족드라마와 실내극 스타일의 완결편인 <사라방드>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그리고 그 사이의 10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야외신 하나를 제외하면) 완벽하게 통제된 세트 속에서 한편의 연극처럼 진행된다. 이혼 뒤 30여년 동안 보지 못한 요한(엘란드 요셉슨)을 마리안(리브 울만)이 방문한다. 숙모의 유산을 받은 요한은 한적한 시골에서 노년을 보내고 있고, 그가 첫 번째 결혼에서 얻은 아들과 손녀딸이 근처에 살고 있다. 프롤로그를 제외한 각 장에서 두 배우의 듀엣 연기가 펼쳐지는 영화는 넷의 상처가 드러나고 치유되는 과정을 담담하게 따라간다. 영화의 정점은 감정적 문맹자로 남아 있던 두 노인이 옷을 벗어던지고 나체로 마주 선 10장에서 벌어진다. 그들의 마음속으로 카메라 뒤에 선 베리만이 ‘가족의 짐과 무게를 덜어내고 느껴지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때 평안이 찾아오리라’라고 말하는 게 전해지고, 이어 에필로그에서 마리안이 오랫동안 버려둔 딸의 얼굴에 손을 대는 순간 그녀는 자신을 수십년 동안 괴롭힌 문제를 돌고 돌아 풀게 된다. 바흐 무반주 첼로 조곡의 다섯 번째 사라방드, 그 격에 어울리는 작품이 아닐 수 없다. DVD에 수록된 메이킹 필름(44분)이 인상적이다. 시종일관 활달한 모습으로 배우와 스탭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면서도 자신의 고집을 쉽게 꺾지 않는 노 감독의 모습에서 감동이 느껴진다.
씨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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