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일본 청춘만화라는 소우주, <스윙걸즈>
2006-04-05
글 : 정성일 (영화평론가)
귀여운 영화 <스윙걸즈>가 교복 속에 감춰둔 몇가지 비밀

나는 지금 카운트 베시가 1938년 데카 레이블을 위해서 했던 24곡의 녹음을 들으면서 이 글을 쓴다. 왠지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다. 물론 레스터 영이 테너 색소폰이다. 첫곡은 <조지아나>이다. 그런 다음 이 귀여운 영화를 떠올린다. 야구치 시노부의 <스윙걸즈>를 보았다. 야구치 시노부는 재즈를 향한 간절한 사랑을 바치는 중이다. 그것도 쿨이나 비밥, 퓨전이 아니라 스윙재즈이다. 이 영화는 누구라도 사랑할 수밖에 없다. 마치 천국에 온 듯한 느낌. 야마가타 마을의 작은 고등학교의 여름방학. 공부 못해서 과목 낙제를 한 13명의 소녀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수학 수업을 들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야구부 응원을 하러 떠난 밴드부가 점심을 두고 간 것이다. 막 낮잠에 돌입하려던 스즈키 토모코는 벌떡 일어나 손을 들고 선생님에게 밴드부원들에게 점심을 가져다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가 시작이다. 하지만 여자저차하고 저차여차해서 스즈키 토모코와 이 13명의 소녀 여기에 두명의 전기기타 소녀가 가담하고 그리고 홍일점(?) 소년 나카무라 다쿠오를 더해서 ‘스윙걸즈(앤 어 보이)’라는 스윙 재즈밴드를 결성해서 악전고투 끝에 그해 겨울, 눈 내리는 날 마을 음악경연대회에 참여해서 멋진 연주를 들려준다. 사소한 사건이 줄을 잇고, 이런저런 불운이 겹치지만 언제나 행운은 스윙걸즈의 편이다. 물론 해피엔딩.

교복, 일본 靑春영화의 중요한 기호

게다가 감동적인 후일담은 이 ‘스윙걸즈’들이 영화를 시작할 때는 전혀 재즈를 연주하지 못했지만 영화를 찍으면서 맹렬하게 연습에 돌입했고, 마침내 마지막 대목에 이르러서는 우습긴 하지만 그래도 진지하게 엔딩을 장식한다. 뭐 나쁘지 않다. 그러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여기에 더하고 싶은 것은 <스윙걸즈>를 설명하려 들거나(아니, 이런 영화를 본 다음에 누가 설명을 원한단 말인가?) 혹은 이런저런 점을 들어 투덜대려는 것이 아니다(아마, 즐거운 내 기분을 망치지마, 라고 내게 소리칠 것이다). 사실 <스윙걸즈> 같은 영화는 정색을 하고 보면 오히려 바보 같아진다. 언뜻 생각하기에 이런 영화는 십대 소년 소녀들을 위한 로맨스 같지만, 우연히 영화관에 들어온 어른들에게도 동화 같은 노릇을 톡톡히 할 수 있다. 더할 나위 없는 명랑함. 하지만 <스윙걸즈>는 취향의 즐거움이 보는 기쁨 안으로 그냥 통과되지 않는다. 통과의 실패? 뭐랄까, 여기에는 그저 이야기라고 부르기에는 억지를 부리면서 슬그머니 남겨두고 온 부조리, 어색함과 단지 명랑하다고 말하기에는 불편한 현실 혹은 역사의 흔적이 어쩔 수 없이 남아서 중얼거린다. 그 소리가 흥겨운 스윙재즈의 선율 저편에서 잡음처럼 자꾸만 들려온다. 스즈키 토모코와 그녀의 ‘스윙걸즈’ 친구들이 타다히코 수학선생님 집을 방문했을 때 그 벽에서 에릭 돌피와 부커 리틀이 1961년 7월16일 파이브 스폿에서 벌인 라이브 연주음반 LP표지를 보는 것은 그저 우연이었을까? 은밀한 프리 재즈적인 다성적 중얼거림. 내가 귀 기울이려는 것은 그 소리이다. 그러므로 이 글은 일종의 댓글이다. 아니, 차라리 그냥 리플로 읽어주길 바란다. 가장 순진한 의미에서. 그러니 댓글을 읽은 다음 기분 나빠지는 것은 내 책임이 아니다. 댓글은 그냥 무시하는 게 최선의 방어책이다. 하지만…

… 하지만 이런 질문을 해볼 필요가 있다. 내가 알고 있는 한 지구상에서 청춘영화를 가장 잘 만드는 건 일본영화이다. 아니, 차라리 일본영화는 청춘영화를 하나의 장르로 완성시켰다. 여기서 ‘靑春’영화는 한국말의 ‘청춘’과 그 뉘앙스가 다르다. 만일 한국말로 번역해야 한다면 ‘校服’영화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이다. 검은색 교복에 ‘카라’를 세우고 ‘호크’를 풀어젖힌 남자 고등학생들 혹은 눈부시게 하얀 세일러복. 그것이 일본 청춘영화가 ‘틴에이저’영화로 번역되지 않는 칸막이를 친 기호들이다. 일본 청춘영화는 교복이 가장 중요하다. 그 교복 안에서 모든 모순이 생겨나고, 이야기가 시작되고, 사랑이 싹 튼 다음 금지되고, 교복을 중심으로 학교의 명예를 건 패싸움이 벌어지고, 그런 다음 교복을 벗기 전에 엔딩을 맞는다. 이 기호들의 세계는 한때 한국영화에서 있었지만 재빠르게 사라져가고 있다. 물론 이것은 일제강점하 식민지 유산으로 남겨진 기호들의 일부였으며, 미국식 교육이 그 자리를 차지하면서 1980년대 이후에는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다. 구태여 최근의 예를 떠올리자면 그 시대의 향수에 빠져든 유하의 <말죽거리 잔혹사>.

사회와 학교사이 원근법의 상실

물론 청춘영화란 비겁한 말이다. 그건 어른이 되기 무서워서 어른의 몸으로 어린아이 같은 얼굴을 하는 것이며, 그 안에서 온갖 시행착오를 벌인 다음 결국 그건 안 되는 일이었다고 고백하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용서받으려는 알리바이이다. 하지만 일본 청춘영화에는 좀 다른 면이 있다. 일본 청춘영화의 붐은 태평양전쟁 이후에 좀더 정확하게 이시하라 신타로의 소설을 영화로 옮긴 후루카와 다쿠미의 <태양의 계절>이 1956년에 개봉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영화는 이전의 <이즈의 무희>의 ‘교복 입은 남학생의 첫사랑 청춘’과 결정적인 선을 그었다. 일본 청춘영화는 무언가 성장한다기보다는 그 안에서 그냥 부서지거나 아니면 그 안에서 전적으로 만족하고 그저 머물려고 하였다. 어느 쪽을 선택하건 방점은 ‘그 안’에 있다. 여기에는 전후 청춘영화들의 성장의 포기가 있다. 말하자면 일본 청춘영화의 목표는 도쿄대학에 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한국 청춘영화와의 결정적 차이점이다. 일본 청춘영화에서 ‘그 안’은 단지 나이가 아니라 학교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지옥은 그들의 천국이기도 하다. 그 안에 머물려고 할 때 사회는 학교에서 보이는 대로 보일 수밖에 없다. 그때 교복은 그들의 방패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교복은 매우 중요한 기호이다. 그러나 반대로 사회에서 보면 그들은 아직 사회로 나온 것이 아니다. 여기서 누구도 이것을 사회 안으로 들어왔다고 말하지 않는다. 모두들 학교 바깥으로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여기에는 안과 바깥 사이의 방향의 문제가 있다. 그런데도 이들은 이미 자신들이 학교 바깥에 있다고 믿는다. 몸은 학교에 있는데, 마음은 사회에 있다. 그러나 그 역은 없다. 그래서 여기에는 사회와 학교 사이의 원근법의 상실이라는 문제가 개입하고 있다. 이 거리의 상실의 문제에 대해서 가라타니 고진은 훨씬 근사한 말로 정의하였다. 그는 일본 다이쇼 시대 이후의 문학이 지닌 원근법의 상실을 말하면서 ‘몰이상’(沒理想)이라는 개념을 끌어당기고 있다. 원근감이 만들어내는 깊이를 느끼는 것의 망설임, 거기서 깊이의 결여를 보는 대신 구태여 그것을 그렇게 깊이 보아야 할 것인지를 아직 결정하지 못한 상태. 뭐랄까, 나쓰메 소세키의 그 망설이는 학생, 더 정확하게 망설이는 나, 학교 바깥으로 나간 것도 아직 사회로 나온 것도 아닌 것 같은 나. 망설이는 일인칭 주어. 왜 일본 청춘영화에서는 그런 애매해져버린 내가 중요해진 것일까?

일본의 모순에 대해서 즐기는 방법

그때 일본영화는 무언가 말을 해야 하지만 멈추어도 괜찮은 장르를 발명한 것이다. 이 어쩔 수 없다는 말투의 뉘앙스, 그 자체. 하여간 그것에 대해서 말을 해야 한다. 하지만 그만 그 말을 꺼낸 것에 대해서 중간에 그만둘 수는 없는가? 그래도 상관없는 적절한 방식. 그때 이것은 필연적으로 실패해버린 책임, 아니, 실패를 전제로 한 도피이다. 일본 청춘영화들은 당연히 항상 유치한 이야기를 한참 늘어놓은 다음 그렇게 터무니없이 끝나지만, 그럼에도 그게 유치하게 보이지 않는 까닭은 감히 끌어안기 힘든 대상을, 소재를, 토픽을, 문제를, 사건을 포옹하기 때문이다. 그냥 이렇게 말해도 된다. 하면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만다. 하지만 하다가 만다. 수많은 예 중에서 그냥 지금 막 생각나는 예 혹은 우리도 생각해야 하는 불편한 대상. 이를테면 이즈쓰 가즈유키의 <박치기!> 혹은 동어반복처럼 보이는 유키사다 이사오의 <고>(Go). 여기서 이 명랑한 청춘영화들은 ‘조센진’이라는 말을 하고야 만다. 일본영화에서 ‘조센진’을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그것을 말하고야 만 것에 대해서 충분히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말하고 난 다음 그냥 그것으로 그만둔다. 그때 그저 실망하는 것으로 충분치 않다. 왜 이런 실망을 뻔히 알면서 그것을 말하는 것일까? 설마 그것을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용기를 낸 것에 대해서 비난 따위를 받고 싶지는 않다, 라고 생각할 때 어느 자리에서 말을 꺼내느냐, 라는 문제가 중요해진다. 일본 안의 ‘조센진’이라는 문제는 목 안의 가시이다. 그걸 단순히 타자라고 말하기에는 함께 살아야 하고, 그걸 함께 살자니 타자라는 게 불편하다. 정확하게 그 지점에서 그냥 말을 멈출 수는 없는 것일까? 그게 뻔히 문제라는 걸 알고 있는데 문제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구는 것은 불편하다. 하지만 그것이 문제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때 이것은 도덕적이긴 하지만 비윤리적이다. 일본이 그것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것을 보지만, 그러나 그러한 용기만으로 충분하다고 스스로 말한 다음 일본이 그것에 대해서 갖고 있는 불편함을 말하지 않으려는 그 자리로 재빨리 도망치는 것. 책임의 자리에 있지 않은 것. 그건 잘못된 일이야, 하지만 그게 내 책임은 아니잖아, 라고 말해도 괜찮은 자리. 그때 주인공이 여전히 교복을 입고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한 변명의 기호가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 사회적 책임의 주체의 자리에 간 것이 아니다. 그들은 아직도 학생이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잘 알고 있다. 당연하지. 그들도 알 건 다 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직도 학생이다. 여기서 방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 있다. 그때 거기에는 갚아야 할 부채가 없다. 그 대신 용기를 낸 것에 대한 칭찬을 즐길 수 있다. 말하자면 일본 청춘영화는 일본의 모순에 대해서 스스로 즐기는 방법이다. 같은 말이지만 결국 그것을 참을 만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트라우마의 부재, 시간의 순환, <스윙걸즈>

이 점에 대해서 <스윙걸즈>는 훨씬 소심하지만, 그 대신 매우 섬세한 방식으로 문제를 끌어안고 시침을 뗀다. 그런데 여기서 이 문제라는 것이 시종일관 애매하게 다루어진다. 우선 직관적으로 처음 느껴지는 어색함은 고등학교 소녀들의 여름방학에 시작해서 눈 오는 날 끝나는 이 영화가 언뜻 사실적으로 보이지만, 분위기가 이상할 정도로 천국처럼 느껴진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된다. 여기에는 보는 것과 느끼는 것 사이의 괴리가 있다. 왜 너무나 당연하게 보이는 일상이 천국처럼 여겨지는 것일까? 아무래도 먼저 떠올릴 수밖에 없는 것이 소녀들이 세상에서 문제라고 말하는 것들, 이를테면 이와이 순지의 <릴리 슈슈의 모든 것>에서 보았던 이지메, 원조교제, 교내 폭력, 오타쿠, 자살 같은 문제에서 완전히 동떨어진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마치 이 소년 소녀들이 동시대에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서로의 시간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말하자면 <스윙걸즈>와 <릴리 슈슈의 모든 것> 사이에는 서로가 서로에 대한 비동시적 동시대성이라는 낯섦이라는 간격이 존재한다. 그래서인지 <스윙걸즈>의 소녀들은 인터넷을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소문과 이야기, 대화를 통해서만 알려지고 전해진다. 게다가 그녀들은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산간지방 야마가타에서 학교를 다니고, 음악을 배우고, 연주를 한다. 모든 이야기는 거기서 시작해서 거기서 끝난다. 그녀들은 아무도 도시에 가기를 원치 않는다. 마치 그녀들이 살고 있는 이곳이 세상의 전부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상 이것은 세상으로부터의 고립이다. 천국이라는 감각은 이 공간이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은 데서 오는 것이다. 이 영화가 성장영화처럼 보이는 것은 일종의 착시현상이다. 여름에서 겨울로 향하는 그 계절의 변화로 인해 여기서 소년 소녀들이 성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성장한다는 것은 통과하는 것이다. 성공적인 통과를 통해 트라우마와 만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어떤 트라우마도 존재하지 않는다. 여전히 선생님들과 부모님의 세계 안에 머물면서, 그들의 인정을 받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며 머문다. 여기서 시간은 앞으로 나간다기보다는 일종의 원처럼 순환한다는 느낌을 준다. 여름에서 겨울로. 하지만 내년 이맘때가 오면 소녀들은 여전히 여름방학 때 보충수업을 받기 위해서 학교에 남아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불러일으킨다. 아니, 차라리 영원히 고등학교 소녀들로 머물기라도 할 것처럼 그녀들은 되고 싶은 것이 없다. 바로 그때 그렇게 시간이 멈춰버릴 때, 역사는 진공상태로 들어가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마을에는 역사가 없다. 이상하게도 나는 <스윙걸즈>를 보면서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지표를 발견할 수 없었다. 오래된 이야기 같기도 하고, 바로 지금 저편, 야마가타에 나와 같은 시간에 살고 있는 소녀들의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 명랑한 척하는 창백한 마을 속에서 불편한 일본이 말끔하게 지워진 웃음의 세계와 만난다. 그때 이 웃음에서는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어떤 부드러운 외면 같은 것이 느껴진다. 말 그대로 세상에 대해서 고개를 돌리는 것 그러므로 세상으로부터 떨어져나온 이 마을을 찾아오는 사람도 혹은 여기를 떠나는 사람도 있을 리 없다. 여기는 낯선 타자가 없는 거의 순결한 일본이라는 마을이다. 내가 여기서 일본의 마을이라는 말 대신 일본이라는 마을이라고 썼다는 사실을 생각해주기 바란다. 이 ‘스윙걸즈(앤 어 보이)’의 소년 소녀들은 이 마을에 산다.

안에서 안으로, ‘배움’이라는 계몽의 명령

말하자면 세상으로부터 떨어져나온 일본 소년 소녀들. 그때 이 소년 소녀들이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문제는 아주 중요해진다. 이 문제가 중요하게 여겨진 것은 <스윙걸즈>는 아무리 생각해도 일본 소년 소녀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스윙걸즈>의 소녀들은 스스로 이런 대화를 나눈다. “재즈? 그건 아저씨들이나 좋아하는 거 아냐? 위스키를 마시면서 듣는 음악!” 세상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에는 전혀 관심없는 소년 소녀들. 오직 스윙재즈만이 관심인 소년 소녀들. 이 영화의 핵심이 사실상 교육에 있다는 것을 놓치면 안 된다. 소년 소녀들은 배움에 몰두한다. 그것이 이상하게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이 배움은 소년 소녀들에게 아무 도움이 안 되는 스윙재즈이다. 그걸로 대학을 가는 것도 아니며, 돈을 버는 것도 아니다. 단지 그것이 즐거운 것이다. <스윙걸즈>는 근본적으로 계몽적인 영화이다. 물론 계몽이 소년 소녀들에게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계몽이 즐거운 사람은 그것을 가르치려 드는 선생님의 자리에 간 어른들이라는 것을 구태여 지적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데 계몽이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배움이 미래를 향한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그 행위의 과정 자체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립된 장소, 고립된 행위. 그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안에서 바깥으로가 아니라 안에서 안으로라는 점이다.

배움의 즐거움이라는 형식 안에 숨은 계몽의 명령은 소년 소녀들에게 그들 자신을 버리고 밴드 안으로 들어오기를 요구한다. 우리는 ‘스윙걸즈’ 밴드의 소녀들 중 누구도 처음에는 재즈를 연주할 줄 몰랐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그녀들은 재즈를 하고 싶은 자신의 소망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스윙걸즈’라는 재즈 밴드의 욕망에 불려가는 것이다. 왜 스윙이 여기서 중요해진 것일까? 왜 비밥이나 쿨 혹은 퓨전이나 프리 재즈가 아니라 이 소녀들이 스윙재즈를 연주하는 것이 그토록 중요해진 것일까? 그저 그것을 야구치 시노부의 취향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만일 그녀들이 쿨을 했다면 그래서 피아노나 더블 베이스를 했다면, 좀 심심하기는 하겠지만 밴드가 해산했다 할지라도 그냥 혼자서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스윙재즈는 함께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서로가 함께 있는 힘을 다해서 화음을 내야 한다. 앙상블의 세계. 일사불란한 하나. 그중에서 하나라도 빠져나간다면 결국 무너지고 만다.

그 하나를 위해서 너 하나의 사생활 따위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두개의 하나. 큰 하나와 작은 하나. ‘스윙걸즈(앤 어 보이)’라는 하나와 14명의 소녀들과 한명의 소년. 원래는 있지 않았지만 결국 그 무엇보다도 중요해진 하나와 처음에는 있었지만 나중에는 거의 문제시되지 않는 하나. 동화에 가까운 이 이야기에서 내가 가장 신기하게 본 것은 무엇보다도 <스윙걸즈>에 로맨스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많은 소녀들이 한꺼번에 등장하고 있는 데 어떤 소녀도 스윙걸즈 빅 밴드의 단 한명의 소년 나카무라와 연애의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 자신들의 밴드가 해산하는 바람에 연주할 곳을 찾아 ‘스윙걸즈’를 찾아온 두명의 기타리스트 소녀들도 그녀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눈물을 흘리는 순정파 남자친구들이 있지만 소년들을 위한 로맨스는 발전하지 않는다. 정말 맹렬할 정도로 15명의 소녀들과 소년은 스윙재즈 연주를 위해서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다. 로맨틱한 음악이 흐르긴 하지만 이 영화는 조금도 로맨틱하지 않다.

전체를 위한 하나, 그러나 외로운 하나

온갖 우여곡절 끝에 ‘스윙 걸즈(앤 어 보이)’는 마침내 무대에 선다. 그러나 스윙걸즈 소녀들과 소년은 일등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다(영화는 수상식이 있기 전에 재빨리 끝난다). 혹은 누군가를 감동시키려는 것도 아니다. 상투적이긴 하지만 누군가가 죽어가면서 부탁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누군가와 무엇을 걸고 약속한 것도 아니다. 말하자면 여기에는 몰이상이라는 것이 있다. 그녀들은 어떤 목표, 어떤 것을 이루기 위해서 그토록 간절하게 폭설이 내려 교통이 두절되는 날, 그 눈을 기어이 뚫고 마을 공회당까지 달려가 모두 함께 스윙재즈를 들려주려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낙오자 없이 모두 함께, 라는 것이 중요하다. 낙오자는 오직 악보도 읽을 줄 모르면서 아무나 재즈를 한다고 설치는 게 꼴사납다고 외치던 수학선생님 타다히코뿐이다. 아니, 그렇지 않다. 결국 그도 하나 중 하나이다. ‘스윙걸즈’가 연주할 때 그도 객석 맞은편에서 열심히 엉터리일지라도 지휘하고 있지 않는가? ‘스윙걸즈’ 주변의 이웃과 친구 모두가 여기서 하나가 된다. 전체로서의 하나, 하나가 된 전체. 이 영화의 주인공 토모코라는 이름이 ‘友子’인 것을 그저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조금 더 말하는 것을 허락해준다면 <스윙걸즈> 옆에 필사적으로 모두가 하나가 되어 함께 남으려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아무도 모른다>가 바로 곁에 있다고 덧붙이고 싶다.

아, 이제 당신이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지 알았다고? 하지만 나는 여기서 흥분된 어조로 과장된 결론을 내릴 생각은 없다. 그러기에 <스윙걸즈>는 정말 귀여운 영화이다. 게다가 그 귀엽다는 기분을 망치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이 말은 해야 한다. 일본영화에는 여러 명이 모여 무언가 한 가지 일을 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야기의 전통이 있다. 물론 47명의 충신들이 힘을 합쳐 억울하게 죽은 주인의 분을 풀고 전원 할복자살한 ‘충신 구라(노스께)’(忠臣藏) 이야기에 홀린 듯이 빠져드는 자기 최면에 가까운 황홀감이다. 그걸 반복하고 또 반복하면서 세대에 세대를 거쳐 하고 또 한다.

하지만 적어도 <7인의 사무라이>는 마지막 순간, 나이 많은 사무라이 감베이의 입을 빌려 “결국 이긴 것은 농민들이야”라는 말을 했다. 그 순간 이 활극영화는 집단이 된다는 것 그래서 하나가 되어 거둔 승리에 대해서 만족하지 않고 차라리 그것이 사라져버려야 할 정신이라는 것을 비판하는 전후 의식을 잊지 않고 있었다. 무언가 전체가 하나가 되어 무언가를 해내려고 하는 일본영화 속의 집단에 대한 한없는 매혹에 대해서 구로사와는 그 끝까지 가본 다음 무겁게 탄식하면서 그것을 경고한다. 그 배움은 나를 버리고 어딘가에 기대서 하나 안에 들어가려는 집단적 히스테리를 막으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스윙걸즈>에는 그것이 없다. 그냥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 안에 들어가려고 한다. 그때 나는 <스윙걸즈>가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다시 한번 총리가 된 시대의 영화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이 생각은 여기서 멈춰야 한다.

카운트 베시의 음반이 끝났다. 나는 교정을 보면서 오넷트 콜맨이 돈 체리, 찰리 헤이든, 빌리 히긴스와 함께 1959년 5월22일에 녹음한 <다가올 재즈의 모습>(The Shape of Jazz to come)을 들을 생각이다. 첫곡은 <외로운 여인>이다. 스즈키 토모코는 ‘스윙 걸즈(앤 어 보이)’와 함께 하나가 되어 스윙을 연주할 때는 안심할 것이다. 그러나 연주가 끝나고 무대에서 내려오면 스즈키 토모코도 외로운 하나가 될 것이다. 그때부터가 정말 문제이다. (계속)

관련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