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에 걸면 귀고리, 코에 걸면 코걸이식으로 변한다 해서 변신괴물 키메라에 비견되는 ‘원본에 대한 충실성(fidelity)’이라는 잣대는 새 영화 <오만과 편견>의 평가에도 어김없이 따라다녔다. 예를 들어 다아시와 리지가 첫눈에 서로에게 호감을 갖는다든가, 첫 청혼 때 비에 흠뻑 젖은 채 소리를 질러가며 싸워대다가 무의식적인 성적 긴장감을 의식하게 되고 자칫 키스를 할 뻔하는 설정들은 오스틴의 원래 의도를 왜곡한다고 해서 북미 오스틴 학회를 비롯한 오스틴 순수주의자들의 분노를 샀다. 한편으로 전문가 뺨치는 아마추어 애호가들은 팬사이트에 모여 영화 속에서 리지의 옷이 너무 지저분하며, 무도회에서 장갑을 끼지 않았다는 디테일의 오류를 지적했다. 후반부로 갈수록 옷매무새가 흐트러지는 다아시마저 “머릿솔을 어디다 뒀는지 잊어버리고” 히스클리프가 되어버리면, 이미 영화도 오스틴과는 이별을 고한 지 오래라고 혹평했다. 또 주옥같은 오스틴의 대사들이 잘려나가고, “그 사람은, 너무 부자잖아요”와 같은 직설적 대사들로 대체되었음을 개탄했다. 혹평의 기조는 단순히 디테일에 대한 불만이 아니라, 제인 오스틴이 작품 속에서 끝없이 강조했던 삶의 양식으로서의 사회적 관습, 형식을 갖춘 언어로 표현되는 법도, 데코룸에 대한 존중을 영화가 무시했다는 데 있었다. 즉, 본질적으로 원본의 정신에 불충한 텍스트라는 중차대한 비난인 셈이다.
대담한 시각적 스타일의 선택
그러나 영화를 본 현장 영화비평가들과 일반 관객의 평가는 전혀 달랐다. 그들은 은밀하게 오가는 시선, 가슴 설레는 손짓, 카메라가 창출하는 놀랄 만한 친근감, 과거의 시간을 박진감 넘치게 재창출한 연출, 시대극이면서도 이른바 먼지와 땀을 포착하는 미시적 시선에 매료되었고 ‘결혼’이 여성에게 주어진 유일한 미래의 대안이던 척박한 현실과 낭만적 사랑에 대한 갈구가 충돌하며 빚어내는 긴장이 생생하게 살아난 놀라운 영화적 공감각적 경험이라는 데 더욱 주목했고 그 성과를 백분 인정했다. 프리츠 랑 감독의 말대로 영화가 “이미지와 사운드”라면 <오만과 편견>은 이러한 영화적 언어와 문법에 천착함으로써 빛나는 성공을 거둔다. 다아시의 허물어지는 자존심은, 차츰차츰 흐트러지는 옷매무새라든가 방어막을 모두 떨어뜨린, 여리고 막막한 표정들처럼 시각적인 힌트들로 설명된다. 첫 번째 무도회에서 마치 “색칠한 공작”과 같았던 무표정하고 빳빳한 다아시는, 영화의 마지막에 네커치프도 하지 않고 셔츠 단추를 푼 채 마당의 닭들과 초라하게 함께 앉아 사랑하는 연인을 기다린다. 빙리의 어린아이처럼 서툰 사랑은, 제인의 치맛자락에 아기처럼 매달리는 안타까운 손짓으로 “보여진다”. 비주얼 심벌리즘은 종종 논리적 리얼리즘 나아가 오스틴이 그토록 중시했던 데코룸마저 희생할 정도다. 다아시와 같은 사람이, 정장을 하지 않고 장인어른 될 사람에게 청혼을 하다니. 리지가 더비셔의 절벽에 바람을 맞으며 서 있는 위험천만한, 그러나 가슴 벅찬 그 장면은 또 어떤가. 리지가 펨벌리의 갤러리를 거닐며 뒤늦은 사랑의 각성과 왠지 모를 회한에 눈동자가 촉촉이 젖어드는 장면은? 이처럼 대담한 시각적 스타일이 창출해내는 친밀한 공감각적 체험은 젊은 감독 조 라이트의 공인데, 흥미롭게도 그는 난독증으로 정규교육을 중도 포기한 미술학도다. 영화를 맡기 전 오스틴의 책을 한권도 읽지 않았던 조 라이트 감독은 당연이 문학보다는 시각예술의 문법에 익숙했을 테니, 오스틴의 언어를 경외하는 팬들이나 학자와 일반 관객, 영화 비평가들의 반응이 이처럼 갈린 이유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워킹 타이틀이 이 육중한 기획을 신참인 조 라이트에게 맡긴 것은 물론 계산된 움직임이다. 영화는 원본과 애증의 헤게모니 싸움을 벌이게 되는데, 원본 서사의 이 미끄러운 ‘본질’을 모셔오되 새로운 해석으로 재창조하려면 지나친 외경은 오히려 독이 되기 때문이다. 특히 <오만과 편견>의 경우 오스틴 학회와 일반 팬들의 아우성에서 알 수 있듯, 원본의 아우라가 여간 휘황찬란한 게 아니었다. 게다가 그게 다가 아니다. 새 영화 <오만과 편견>은 원작의 무게 말고도 부담스러운 준거점을 하나 더 떠안고 있었다. 1996년작, 콜린 퍼스가 다아시 역할을 했던 <BBC>의 ‘완벽’에 가깝다는 미니시리즈였다. 따라서 신작의 제작진은 원본과 전설적인 전작의 아우라에 밀리지 않고 자기만의 목소리와 색깔을 낼 수 있는 당차고 신선한 시각이 절실히 필요했다.
<BBC>판 <오만과 편견>의 차용과 발전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본과 <BBC>의 전작이 행사한 크나큰 압력의 흔적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다아시 역의 매튜 맥파든은 “젖은 셔츠를 입는가?” “당신도 호수에 뛰어드는가?”라는 질문을 수도 없이 받았다면서 머쓱하게 “그에 상응하는 장면이 있다”고 수없이 대답했다. 코트를 펄럭이며 새벽 들판을 하염없이 걸어오는 다아시의 이미지는 분명, 젖은 셔츠를 휘감고 걸어가던 선배에 대한 의식적 오마주다. 게다가 영화가 개봉하던 당시, 여자 MC들은 리포터들에게 마치 의무처럼 “다아시가 또다시 호수에 뛰어드나요?”라는 질문을 던지고는 짐짓 실망한 듯한 한숨을 짓곤 했다. 긴장의 절정을 장식한 것은, 영화의 비정통성을 맹비난한 북미 제인 오스틴 학회 회원들에게 조 라이트 감독이 “그러면 다들 가서 호수에나 뛰어들라고 해요”라고 대꾸한 사건이었다. 다아시가 젖은 셔츠 바람으로 엘리자베스와 마주치는 이 문제의 설정이 원작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순전한 <BBC> 미니시리즈의 창작이라는 점을 조 라이트 스스로 꼬집었다는 사실은 몹시 재미있다.
그러나 새로운 <오만과 편견>의 실험을 가능하게 한 것도 바로 이 <BBC>의 전작이며, 새로운 <오만과 편견>의 행동반경을 제한한 것 역시 어찌 보면 <BBC>의 전작이다. 굳이 19세기 초의 리젠시 시대가 아니라 오스틴이 첫 원고를 탈고한 18세기 말로 시대를 옮긴 것도, 전체적 비주얼이 전작을 연상시키지 않게 하려는 ‘영향의 불안’에 기인한 선택이었다. 리지의 주관적 시선에 철저히 기댄 카메라워크, 훨씬 더 가족적이고 정서적으로 안정된 리지의 가족 등도 역시 영화를 <BBC> 판본과 차별화한다. 그러나 워킹 타이틀의 <오만과 편견>은 <BBC> 판본의 업적을 딛고서야 나올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BBC>판의 가장 큰 업적은 뭐니뭐니해도 리지와 다아시의 사랑 이야기에서 원초적인 성적 끌림의 차원을 발견해낸 것이었다. 시리즈 방영 당시 각색자 앤드루 데이비스는 마치 “종마와 같이 성적인 혈기가 흘러넘치는” 다아시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으며 펜싱, 사냥 등의 인서트 컷을 통해 이러한 점을 강조했다. 다아시의 성적 욕망을 리얼리즘과 데코룸의 틀 속에서 최고조로 끌어올린 <BBC>의 <오만과 편견>은 영국 TV사상 초유의 히트를 기록하며 일종의 사회현상으로 떠올랐다. 현재 영국의 성인 여성들 중에서, 이 드라마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워킹 타이틀의 새 영화 <오만과 편견>은 바로 이러한 문화적 맥락에서 다시 시작한다. <BBC> 판본이 발견해낸 성적 긴장감과 무의식적 끌림, 로맨틱한 설정들을 기정사실로 두고 여기서 나아가 한 걸음 더 내딛었다는 것이다. 훨씬 더 젊고 어려진 리지와 다아시는 이제,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꿈꾸는 완벽한 도덕적 전범으로서의 역할은 살짝 포기하고, 제인 오스틴의 소설 속에 서브텍스트로 숨어 있는 첫사랑의 달콤쌉싸름한 경험을 전면에 부각시키며 그 경험에 온몸을 내던진다. 다아시가 리지를 마차에 태워주면서 손끝이 닿는 장면의 전기충격 같은 설렘이라든가, 옷차림이 흐트러진 다아시가 잠옷 바람의 리지가 묵는 거실로 들어와 편지를 주고 가는 장면의 초현실적인 연출 그리고 퍼붓는 폭우 속에서 얼굴을 맞댄 설전과 키스의 충동, 훗날 빙리와 함께 찾아온 다아시의 시선을 안타까이 좇는 리지의 가슴앓이까지. 이런 면에서 의미심장한 사실은, 심지어 원전에는 없고 <BBC> 판본에만 있는 대사가 그대로 새 영화에 들어가 있다는 사실이다. 연출은 몰라도 각색에 <BBC> 미니시리즈가 얼마나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리지가 언니인 제인에게 “깊은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면 절대 결혼하지 않을 거야”라고 말하는 대사는, 제인 오스틴이 아니라 앤드루 데이비스가 첨언한 것이다.
로맨틱한 서브텍스트의 강조
결국 우리는 여기서 흥미로운 현상을 보게 된다. 한 문학작품의 각색작들이 서로 경쟁할 뿐 아니라, 또한 서로 대화하며 원본텍스트의 서브텍스트를 끝없이 풍요롭게 하는 보완적 해석으로 공존하는 문화적 현상 말이다. 새로운 판본과 제인 오스틴의 원작 사이의- 상당히 넓은- 간극을 메워주고 보충해주는 것은 다름 아닌 <BBC>의 미니시리즈다. 이는 워킹 타이틀이 이 영화로 <오만과 편견>의 독자들이나 제인 오스틴의 팬베이스를 넘어서서 일반 대중과 더 넓은 세계시장을 공략할 수 있는 교두보가 되어주었다. 워킹 타이틀은 이 영화가 소비될 시장을 크게 둘로 나누었다. 영국의 관객에게 이 영화는 그들이 사랑하고 아끼는 소설에 대한 또 하나의 신선한 해석으로, 그리고 그 권위를 훼손하지 않는 문학적 주해로, 그리고 <BBC> 드라마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환기하며 동시에 그와는 다른 극 경험을 제공하는 기품있고 세련된 영화로 선보여야 했다. 그러나 제인 오스틴이 낯선 세계의 관객에게 이 영화는 좀더 보편적인 로맨틱코미디의 원형- 워킹 타이틀의 장기인- 으로 어필하면 되었다. 결혼의 사회성에 대한 도덕적 교훈의 핵을 이루는 위컴 플롯이 새 영화에서 약해진 것이나, 외국에서만 덧붙여져 개봉된- 우리나라에는 있다- 해피엔딩도 이러한 계산의 발로다. 따라서 이러한 달콤하고 비국지적인 해석을 가능하게 한 것은 뭐니뭐니해도 <BBC> 미니시리즈의 존재라 할 것이며, 기존의 이 판본은 새 영화가 원작에서 한 발짝 더 멀어져서 로맨틱한 서브텍스트를 강조할 수 있도록 영국의 문화적 환경 속에서 간극의 의미를 채우는 역할을 해주었다. 말하자면, 텍스트와 콘텍스트와 상호텍스트성이, 이 새로운 각색작을 지금의 모습으로 빚어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