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혜정은 매번 꼬리를 자르고 도망쳤다. <나비>의 유키도, <올드보이>의 미도도, <웰컴 투 동막골>의 여일도, <연애의 목적>의 홍도 그랬다. 강혜정은 스스로를 한계치까지 밀어붙여 만들어낸 캐릭터들을 마치 꼬리를 잘라내듯 남기고 도망쳤다. 그래서 강혜정이 연기한 여자들, 유키와 미도와 여일과 홍은, 영화가 끝나도 생명을 잃지 않고 피와 살이 남은 꼬리처럼 꿈틀거린다. 비릿하고 아프고 가슴 저린 여자들. <도마뱀>의 주인공 아리도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도마뱀>은 사라졌다 나타났다를 반복하는 여자 아리와 끝없이 기다리는 남자 조강의 기이한 로맨스다. 자신을 만지는 사람에게는 저주가 옮는다고 믿는 소녀 아리는 어느 날 갑자기 소년 조강 앞에 나타난다. 둘의 살이 처음으로 닿은 날, 조강은 홍역에 걸리고 아리는 사라진다. 그로부터 10년 뒤에 나타난 아리는 사랑이라는 홍역을 대신 조강에게 남겨놓고 떠나간다. 그리고….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는 뭔가에 체한 기분이었어요. 아리라는 애는 도대체가 풀어젖히는 게 없잖아요. 조강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말도 못하고. 속에 쟁여져 있는 것들 때문에 가슴이 아리는 기분이었어요.” 하지만 아리는 지금껏 강혜정이 남긴 꼬리들과는 다르다. 아리는 상처를 품었으되 순정으로 가득 찬 로맨스의 주인공이며, 강혜정은 전작들과는 달리 소녀처럼 웃고 여자처럼 운다. 관객을 꽉 물어버릴 듯했던 도발적인 인상은 온화한 미소에 가려져 보일 듯 말 듯할 뿐이다. 스튜디오로 들어서는 강혜정의 미소가 예전과 달라 보이는 것도 아리의 잔상이 남아서일까. 표정으로 질문을 보냈더니 “치아 교정을 했어요. 잇몸이 내려앉는 것 때문에, 그런 의료적인 이유도 있어요. 하지만 그것보다는, 정말로 예뻐지고 싶어서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저 많이 바뀌고 있거든요. 좀 유들유들해진 것 같지 않으세요? 그런 이야기 요즘 많이 듣는데. <도마뱀>도 제가 지금까지 했던 영화 중 가장 밝아지려 노력한 작품이에요. 인상 찌푸리고 힘들어하는 여자보다 밝은 여자가 예쁘니까. 제가 보통의 기준으로 평이하게 예쁜 얼굴은 아니잖아요. 그런 건 다 알고 이 영화도 시작한 거고. 하지만 지금은, 정말로 예쁜 얼굴이에요.”(박수치며 웃음)
걱정이 없을 수가 있나. 화사한 강혜정의 미소 속에서 미도와 홍과 유키와 여일을 다시는 볼 수 없을것 같다는 괜한 걱정 말이다. “아. 그런 건 없어요. 강렬한 캐릭터들을 연기할 때가 그립기도 하지만…, 하지만, 이것도 나고 저것도 난데. 저는 제 다중성을 너무 사랑하거든요. 여전히 사이코 같은 역할도 해보고 싶지만 다음 작품은 다시 따뜻한 감성을 느낄 수 있는 것으로 할 거예요. 제가 그런 기운이 필요해서 그럴지도 모르죠. 배우마다 그때그때 필요한 기운이 있고, 그게 작품으로 많이 묻어나오는 거 아닐까요.” 이 영리하고 똘똘한 배우의 느슨한 대답이 여전히 어떤 전략의 일종이라고 의심하지 않는 것은 힘들다. 강하고 드센 역할에 함몰되지 않기 위해 자신을 추스르는 방법이라면, 연인과 함께 가슴 아리는 로맨스에 출연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듯하다. 하지만 강혜정은 그렇게 머리를 굴릴 만한 위인은 되지 못하노라고 고한다. “어떤 경계심을 갖고 작품을 선택하지 않는데요. 그냥 제가 좋으면 가는 거죠. 전략이라면 전략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같은 캐릭터를 연기하는 게 싫어요. 기운이, 내 캐릭터의 느낌과 관객에게 주는 진동의 폭이 반복되는 건 죽어도 싫거든요. 달랐으면 좋겠어요. 어디까지 가는지, 어디까지 망가지는지, 어디까지 우아해지는지도, 다 보고 싶어요.”
최근 강혜정은 <도마뱀>을 촬영하며 두 가지 큰일에 도전했다. 하나는 종교다. 무신론자였던 강혜정은 오빠의 권유로 얼마 전부터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종교를 갖는다는 건, 평범해지는 일인 것 같아요.” 평범해지길 원한다는 게 무슨 뜻이냐는 질문에 그는 한동안 골똘히 생각한 뒤 고해에 가까운 대답을 꺼내놓았다. “그동안은 내 맘대로 하는 게 제일 행복한 거라고 생각해왔지만, 요새는 평범하게 사는 게 행복한 일이라는 생각을 자주 해요. 평범한 걸 느끼고 싶어요. 그동안 평범한 거 모르고 살았잖아.” 그건 <웰컴 투 동막골> 직후의 인터뷰에서 했던 말과는 다르지 않은가. 재미없으면 아무것도 안 한다더니, 뭐든 재미가 우선이라더니. 그런데 이같은 원칙에도 이제는 몇 가지 예외가 붙었다. “간혹은 재미가 없어도 해야 하는 일이 있더라고요. 이를테면, 스크린쿼터 운동은 재미보다는 사명감으로 하는 것이고, 영화 홍보에 관련된 것들은 재미가 없더라도 타협을 봐야 하는 것들이고. 영화는 일과 인간적인 관계의 경계에서 헷갈릴 때가 제일 위험한 것 같아요. 그런 걸 잘해나가는 게 어른인 것 같아요.”
큰일이라고 말하기는 뭣하지만, 또 다른 큰일은 운전면허 취득이다. “승우 오빠에게서 완전 조심운전으로 배웠어요. 조심운전 할 줄 아는 사람이 바쁘게 운전할 때도 안전한 법을 알잖아요.” 이러니 강혜정이 왜 이리 조심스러워졌냐고, 왜 이렇게 미소가 유해졌냐고, 의아해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오히려 강혜정은 단단하게 안전벨트를 매고서 한번도 밟아보지 못한 속도로 스스로를 몰고 갈 준비를 하고 있을 뿐이다. 더 단단하고 야무진, 다 큰 여자의 도마뱀 꼬리를 키우면서.